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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국민학생의 전쟁 추억담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는 것”

  • 기사입력 2022.08.09 21:47
  • 기자명 이석복 작가
▲ 환희 이 석 복(수필가, 차세대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1950년 6.25전쟁은 우리 국토와 국민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300여만 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안긴 또 다시 있어서는 안 될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돌이켜보면 내 나이 8살,  국민학교(1996년 3월 1일 초등학교로 개칭) 2학년에 막 진학(당시 신학기는 6월 개학)했을 때 시작되어 3년 1개월 간 길고 긴 전쟁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철부지 소년이었던 어린 나는 그 시기에 아픈 추억보다는 그리운 추억이 많은 것 같다. 우리 가족도 온갖 어려움을 다 같이 겪었지만 푸시킨의 싯구(詩句)처럼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는 것”이기 때문이지 싶다. 그리고 어릴 때는 아는 것은 없지만 호기심이 많아서 웬만한 어려움과 고통도 자연스럽게 내면화 시키면서 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6.25전쟁 당시 나는 서울 충무로의 아담한 한옥에 살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날은 일요일 이어서 다음날 월요일에 학교에 갔더니 담임선생님이 “해방군이 곧 내려올 것이니 너희들은 환영할 준비를 해야한다”고 말했던 것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해방공간에서 여론조사는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선호한다는 국민이 70% 수준이었다는 주장들이 상기되는 대목이다. 우리 가족은 국군이 공산군을 용감히 격퇴하고 있다는 뉴스를 믿고 우왕좌왕 하다가 한강교가 끊기는 바람에 남쪽으로 피난도 못 가게 되었다.

벌써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한 북한군 탱크가 집근처인 충무로 4가까지 진출한데다가 아버지(철도 관계 최고기술자)를 체포하기 위한 가택 수색까지 당하는 사태에 직면해서야 우리는 비로소 심각성을 느꼈던 것이다. 부모님들도 갑자기 당한 일 이어서 마땅한 비상대책도 없었던 터라 아버지는 6월 말경 새벽을 틈타 처갓집인 고양군 신도면 지축리로 먼저 출발하셨고, 나머지 식구들은 근처에 사시던 이모님 댁과 함께 몇 일 뒤에 지축리로 합류했다. 지축리 피난지에서도 장년(38세)인 우리 아버지와 대학생이었던 이종 4촌형을 강제 연행하려는 치안대 무장요원들이 불시에 가택수색을 했었다. 아버지와 이종 4촌형은 대청마루 밑에 숨기도 하였지만 발각될 뻔해서 뒷산 넘어 박수무당이 비밀 동굴에 숨겨줘 얼마간 피신했었다. 그러나 그곳도 장기간 머물기에는 여의치 않아서 결국은 그 지역을 탈출하여 변장하고 서울과 문산 지역에서 행상으로 지내면서 간간이 소식을 전해오셨다.

어린 나에게 초기 전쟁 중 공포스러웠던 일은 아버지의 이런 상황을 숨죽이고 지켜봐야 했던 순간들이었다. 나는 지축리에서 사내 애들 중 내 또래가 없어 중학생 이었던 외사촌형을 주로 따라다녔다. 한 번은 인접 마을인 삼송리에 따라 나갔었는데 1번 국도를 따라 행군하던 북한군들이 마침 미군의 쌕쌕이(당시 미공군 전투기의 민간 속칭)가 나타나자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순간을 목격했었다. 몇 분후 상공을 선회하던 쌕쌕이가 목표를 찾지 못하고 멀리 날아가 버리자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사라졌던 북한군들이 가로수인 플라타너스 나무에서 내려와 계속 행군하는 모습을 논뚝에 숨어서 놀란 눈으로 지켜봤던 기억도 있다.

외갓집은 부자였지만 인민위원회 완장을 찬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점심엔 찐 감자와 호박풀떼기도 자주 먹었는데 나는 오히려 밥보다 더 맛있게 먹고 좋아했다. 유엔군 참전 소식을 전해 들었고 애타게 기다리던 9.28 서울수복 후 우리가족은 10월초 석 달만에 서울로 복귀하였다. 아버지는 운좋게 철도복구사업을 수주(受注)하여 단기간 내 얼마간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전쟁 전 다니던 동대문국민학교에 가보니 텅비어 있었고 몇몇 애들을 만나 담임선생이 인민군으로 입대했다는 풍문도 들었다.

당시 전쟁상황은 유엔군이 계속 북진 중에 뜻밖에 중공군의 개입으로 허를 찔려 11월부터 계속 후퇴를 거듭해 수도 서울을 1951년 1월 4일(1.4후퇴)에 다시 적에게 뺏기게 된 상황이었다. 이번에는 정부도 사전에 피난을 권장했다. 우리가족은 몹시도 추었던 1월초 급하게 일단 평택까지 내려가 어느 민가에 짐을 풀었다. 후퇴 상황은 예상외로 불리해서 평택까지 대포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등 안전하지 못해 몇일후 다시 소가 끄는 수레를 빌려 충남 아산군 둔포면 봉림마을(경기도 경계에서 약10리 남쪽)로 이동하여 피난처를 마련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얼마간 살 수 있는 돈을 마련해 주시고 사업거리를 칮기 위해 그 길로 철도국이 이전한 부산으로 걸어서 떠나셨다. 우리 가족은 봉림마을에 온 유일한 피난민으로 어머니와 나(9살), 남동생(5살), 그리고 그곳에서 음력 정월에 탄생한 갓난 여동생까지 4식구였다. 다행히 그 마을에서 서당(書堂)을 운영하던 집의 문간채를 세(貰)로 얻어서 살았다. 3월에는 전쟁 후 처음으로 충청도 지역학교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어서 신작로를 따라 둔포쪽으로 5리쯤되는 관대리 초등학교에 2학년으로 재입학하게 되었다. 학교에 갈 때면 마을의 남녀 아이들이 10여명이 모여 마을 건너편 봉재저수지에서 우리 마을 앞으로 흘러내려오는 수로 뚝을 따라 가게 되는데 책 보따리를 허리에 차고 긴 행렬을 이루어 가곤 하였다.

수업 시작 전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이 훈시를 하신 후 “전우야 잘자라”등 군가를 부르며 각 학년별(1개반)로 열을 지어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교실로 입실했다. 하교 후에는 마을 애들이 모든 학년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모여서 오는데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놀이 등을 하다가 마을로 돌아왔다. 겨울에는 뚝방에 불을 놓아 그 위에 구르기하고 여름에는 저수지 수로 중 제법 넓고 깊은 곳에서 모두 발가벗고 물장난하는 것이 그 중 가장 신나는 놀이였다.

봉림 마을에서 어머니는 곡물 수확기에는 마을 농민들을 도와주는 차원에서 보리와 벼를 사서 방 윗목에 쌓아 두었다가 나중에 곡물 가격이 올랐을 때 내다 팔고 해서 피난 살림을 꾸려 나가셨다. 특히 모든 땔감은 돈주고 사야하는 형편에 내가 조금이라도 생활에 보탬이 되려면 땔감을 구해오는 수 밖에 없었다. 한번은 내가 주말에 한여름 폭우로 쓰러진 뒷동산의 참나무를 새끼로 멜방을 만들어 끌고 오다가 땅벌집을 건드려 벌들에게 온몸을 쏘였는데도 끝내 울면서 나무를 끌고 왔던 적도 있었다. 놀란 어른들이 내 옷을 벗기니까 죽은 벌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온 몸에 된장을 바르고 평상에 누어 꼼짝 못하고 벌독을 치유하던 민간요법을 체험하기도 했다.그래도 괴로웠던 것보다는 땔감을 구해와 어머니에게 도움이 되어 드렸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워 했던 것 같다.

피난 중 우리 가족이 어려웠던 것 중에 하나는 남동생이 병약해서 어머니가 고생과 걱정이 많으셨다.동생이 아플 땐 밤중에 산넘어 의사(무면허)를 불러오는 등 내가 모든 어려운 심부름을 무서운 줄 모르고 다 해냈다. 또 한 가지는 어버지가 부산으로 떠나신 후 소식이 없으시니 가족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밥 먹을 때마다 아버지를 위한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래도 봉림마을에서 주말과 방학에는 애들과 같이 이곳저곳 몰려다니면서 주전부리로 소나무 속살을 베껴 먹기도 하고, 어린 목화송이, 진달래 꽃잎, 찔레순 등을 따먹었던 기억도 있다. 아울러 산나물과 버섯 등을 채취도 하고, 칡뿌리도 캐어 씹어 먹고, 풀피리도 만들어 불던 생각도 난다. 서당집 문간채에 살다보니 한문(漢文)을 배우는 형들 어깨너머로 땅바닥에 써가며 익히기도 하였다. 특히 훈장님 손녀딸이 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는데 나를 잘 따라서 아주 친하게 지내기도 했었다.

시간이 흘러 52년 3월에는 3학년으로 올라갔고 하루 세 번씩 지극정성으로 기도드린 효험 덕분인지 까치가 유난히도 소란스럽게 울어대던 어느 여름날 아버지가 건강한 모습으로 집에 오셨다. 그 감동은 세상을 다 얻은듯했고 기뻐서 울었던 기억도 난다. 아버지는 다음날 다시 서울로 올라가셨다가 일주일 후에 트럭을 준비해 오셔서 1년 반이나 깊은 정이 들었던 봉림 마을을 떠나 서울로 가야했다. 아직 전쟁 중이라 사전 허가받은 도강증(渡江證)을 보이고 한강부교(고무보트를 연결하여 만든 군용다리)를 건너 용산구 한남동에 정원이 있는 단층집으로 이사를 했다. 전에 살던 충무로 집은 폭격을 당해 파괴되었다고 들었다. 나는 어머니의 성화로 한남국민학교에 간단한 시험을 보고 한 학년 월반하여 4학년으로 편입하였다. 피난 시 서당 집에서 익힌 약간의 한문 실력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어느 날 학교친구들과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오다가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105밀리 포병부대가 이태원 끝자락 공터에서 금호동 방향으로 사격 훈련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런 흔히 볼 수 없는 현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포소리가 커서 좀 무섭긴 했지만 최대로 허용하는 근처까지 가서 흙더미에 엎드려 신기한 포사격장면을 지켜보았다. 미군들은 훈련 후 탄약상자(나무), 탄피(놋쇠), 탄통(기름종이 원통)등을 버리고 가기 때문에 미군이 떠나자 경쟁적으로 뛰어가 겨우 탄통 하나를 차지 할 수 있었다. 탄피는 비싸게 팔 수 있고, 나무판자로 된 탄약상자는 여러모로 쓰이고, 두꺼운 기름종이로 만들어진 탄통은 2개를 묶으면 훌륭한 수영 튜브로 사용할 수 있었다.

부모님 사업관계로 5학년에 진학하자마자 중구 남산동으로 이사를 가면서 남산국민학교로 전학했다. 애들이란 또래들과 어울리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는지 이사온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동네 동무들과 남산을 휘젓고 돌아다녔다. 병정놀이용 화이바모와 탄띠도 남산의 어느 동굴에서 줍기도 했다.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 나는 동네 동무들을 데리고 서울역에 가서 포로송환 기차가 일시 정지하고 있을 때 북한군들이 북한 군가를 부르는 모습에 분노를 느끼고 주변에서 돌을 집어 던지고 도망치던 기억도 있다.

나는 전쟁 기간 중 경험했던 기억이 잠재의식으로 저장되어 있다가 대학교를 진학 할 때 마침내 무의식적으로 발현되어 결국 육군사관학교 제21기로 입교하여 군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운명적인 것 같다. 포병장교로 임관해 미국유학 후 충남 성환 근처 한미연합부대에서 근무할 때 어느 일요일 중위 계급장의 군복을 입고 옛 기억을 더듬어 봉림마을 찾아갔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설 때 논에서 일하고 계시던 어른들이 나를 발견하고 “너 석백이(충청도에서는”복“자를 ”백이“로 발음)아니냐?”라고 대뜸 알아보시는 것이 아닌가! 10살에 떠난 소년을 15년 후 장성한 장교복장의 나를 알아보아 주시는 것이 너무도 고마웠다.

내 또래들은 군대에 갔거나 서울로 올라갔고, 나를 따르던 한 살 아래 서당집 손녀딸도 얼마 전 약혼을 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전쟁은 모든 국민들에게 참혹한 고통을 줬지만 우리 국민들은 이를 강한 의지로 이겨내었고, 파괴를 창조의 기회로 하였고 세계가 놀랄만한 기적(奇蹟)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전화(戰禍)속에서 우리 국민이 가장 값지게 얻은 것이 있다면, 공산군의 잔학상을 듣고 보면서 공산주의가 나쁘다는 것을 국민들이 체감한 것이다. 어린 국민학생 시절의 전쟁추억담은 팔순에 돌이켜 보니 아름다운 추억들로 변하였고 새삼 그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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