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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고(故) 백선엽 명예원수를 향한 박경석의 궤변과 그 논박

  • 기사입력 2021.12.15 20:03
  • 기자명 장순휘 정치학 박사
▲ 고 백선엽 장군   

■ 인연의 끈과 장군의 도(道)

 세상 만사는 인연(因緣)에 달려있다고 한다. 인연이란 불교(佛敎)용어로 인(因)은 결과를 낳기 위한 내적인 직접적인 원인을 의미하고, 연(緣)은 결과를 돕는 외적인 간접적인 원인을 의미한다. 원인없이 결과가 없듯이 인생도 인연이 만드는 것으로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인연에는 선연(善緣)과 악연(惡緣)이 있다. 

인생에서 ‘선연’은 ‘좋은 만남’으로 서로 귀하게 여겨주는 진정한 존중과 배려를 기본으로 만나는 것이라면 ‘악연’은 ‘나쁜 만남’으로 우선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악마와의 키스같다’는 것처럼 인생에서 서로 하는 일마다 충돌하면서 운명적으로 피해를 받게 되는 것이 말로 설명이 안되는 가슴아픈 관계를 공유하게 된다.

이런측면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과 박경석 장군(존칭 생략)은 ‘악연 중에 악연’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2010년 이명박 정부시절에 백선엽 예비역 대장과 관련 대한민국 국군사에 최초로 “명예원수 추대프로젝트”가 부상하면서 국민적으로나 군내부적으로도 공감대가 상당히 형성돼 육군본부나 국방부에서 의례적 심사만을 남겨둔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박경석옹(翁)은 김홍일 장군, 채명신 장군, 박정인 장군, 이대용 장군을 추동하여 생전에 백선엽 장군을 ‘일제 앞잡이’로 매도하면서 명예원수 추대를 무산시켰던 그 장본인이다. 

그의 주장들은 한마디로 객관성과 합리성을 벗어난 무조건 ‘백선엽 죽이기’라고 평가된다. 추가적으로 장군(將軍)도 장교(將校)지만 장군에게는 ‘장군의 도(道)’가 있다는 예의 차원에서 이제 후배장교들이 정론직필(正論直筆)로 박경석씨의 무도한 행위를 막고자 한다. 

삼국지(三國志)에서 219년 관우는 형주를 지키고 있다가 오군 여몽의 기습으로 패주하여 맥성으로 퇴각했다. 여몽은 비록 관우가 적장이지만 그의 가족을 잘 보호해 주는 인(仁)을 보였다. 그리고 관우는 맥성을 탈출하다가 포로가 되었지만 구차한 연명보다 참수(斬首)를 택했다. 오나라 손권은 관우의 목을 조조에게 보냈다. 이에 조조는 관우의 몸통을 나무로 조각하여 좋은 관에 넣어서 정성을 다해 제사지내주는 의(義)를 보였다. 그리고 조조는 관우에게 ‘형주의 왕’으로 추존하여 예(禮)를 다했던 것이다. 조조를 죽이려했던 관우를 왕(王)으로 특진시켜서 덕(德)을 보였기에 지금도 관우는 관왕(關王)으로 모셔지고 있다. 비록 전장에서는 적장이지만 조조가 관우에게 보여준 남다른 도(道)는 천하영웅의 멋이 아닌가? 만일 조조가 관우를 악담과 비하로 모욕을 주었다면 천하패왕이 될 수 있었겠는가? 장군의 도(道)라는 것은 그러한 관용(寬容)과 포덕(布德)을 말하는 것이다.

하물며 1950년 6.25전쟁 당시 국가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처했을 때 고(故) 백선엽 장군이 나이 30살의 청년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악전고투를 하며 구국의 선봉에서 최선을 다했음이 사실(facts)과 진실(truth)이다. 그런 백선엽 장군을 생전과 사후에 끊임없이 악담과 왜곡 그리고 폄훼를 멈추지 않는 박경석 옹의 진의는 무엇인가? 장군의 도(道)를 저버린 패륜언행을 분명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그 긴 악연의 고리를 후배들이 끊어내고자 한다. 더 이상 방치하는 것은 진실의 왜곡을 넘어 국군의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

▲ 박경석 옹  

■육사 2기생(육군종합학교 2기) 박경석은 누구인가?

 박경석옹(89세)은 일제시대인 1933년 조치원에서 태어나 13세때 해방을 맞았고, 6.25전쟁 당시 육사생도 2기생으로 생도신분으로 계급장도 없이 참전을 하게 되었다. 1950년 전쟁 중 육군종합학교 2기로 18세에 육군소위 임관한 군인이었다. 1951년 2월 강원도 현리 1077 고지에서 싸우다가 인민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포로생활 중 극적인 탈출을 해 국군에 귀대했다. 

그간 그가 어디서 어떻게 포로생활을 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고, “전투 중 수류탄 파편을 맞아 몸의 왼편을 다친 후 인민군 포로가 되었고, 인민군 제10사단에 포로로 잡혀 심문받다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석방됐다”고 지인에 의하여 알려져 있다. 이 진술은 객관적으로 전쟁에서 있을 수 없는 의문이 남겨져 있다. 과연 북한군이 적인 국군장교를 살려보냈다는 것인가? 그 당시 민간인 조차도 가차없이 사살하던 북한군이었는데 어찌 그런 일이 그에게 있었을까하는 것이 기상천외한 경우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특이한 군경력은 1951년 3월 육군 제9사단 포병장교와 4월 다시 보병장교로 전과 그리고 1956년 육군 중위로 보임되는 등 특이한 과정을 겪었다. 그렇다면 소위만 7년을 달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더 황당무계한 일은 박경석이 6.25전쟁 초기에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현충원에 묘가 세워졌었다는 사실이다. 이 묘는 2020년 7월 28일 철거되는 기행(奇行)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따라서 이 살아있는 박경석의 가짜묘는 68년만에 정상화된 것으로 가히 기네스북에 등재될 이상한 짓거리기도 하다. 박경석은 자신의 묘가 현충원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자진해서 철거를 요청하는게 수순이지만 이를 간과했으며, 간혹 둘러서 자신의 묘를 보고 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박경석옹은 자신부터 비양심과 부도덕성을 성찰해봐야 한다. 그런 수준의 사람이 백선엽 명예원수의 호국영웅적 삶을 생전과 사후에 끊임없이 폄훼하는 것은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 언론에서는 현충업무에 관하여 “60여년이 넘도록 가짜 묘가 국민의 세금으로 관리돼 온 부실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라는 비판을 했다. 

특히 월남전이 치열했던 1965년 수도사단 제1연대 제3대대장으로 보직되어 파병준비를 했다. 그런데 10월 4일 강재구 대위(육사16기)의 제10중대에서 수류탄 투척훈련 중 폭발사고로 

훈련중 수류탄 폭발 사고는 정상적이라면 대대장 박경석 중령은 보직해임이 열 번 되어도 마땅하다. 그런데 박경석 증령은 사단장 채명신 장군에게 사고가 아니라 ‘살신성인’이라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해서 사고책임을 피하고, 오히려 ‘재구대대’라는 특별부대명칭을 획득하는 궤변 능력과 처세술을 보여줬다. 창군이래 지휘관 사망사고가 나고도 영전을 누린 상급지휘관은 유일무이할 정도이고, 교언영색(巧言令色)의 달인이라는 점에서도 특이한 인물로 지레짐작이 간다.

실례로, 과거 1986년 8월 제1사단 12연대 2대대 8중대에서 DMZ 수색정찰 중 고 이재탁 상사가 지뢰를 밟아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단장은 사고를 수습한 후에 대대장 K중령(육사#30)의 지휘책임을 물어서 보직해임을 시켰다. 알고보면 비무장지대 내에는 온통 미확인지뢰가 휴전이래로 매장되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뢰사고는 발생할 수 있는 것이고, 정상적인 수색정찰의 과정에서 발생한 인명사고였기에 대대장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나 통상적인 분위기에서 우리 군은 1차 상급지휘관이 사망사고의 책임을 지고 보직해임을 시키는 것으로 사고문책을 종결하기도 한다. 

당시 대대장 K중령은 고 이재탁 상사의 수색정찰사고에 대해 ‘살신성인’이니 ‘DMZ안에서 일어난 사고를 어쩌란 말이냐?’는 제대로 된 변명도 못하고 보직해임을 당했던 것에 비하면 수도사단 제3대대장 박경석 중령은 후안무치(厚顔無恥)의 도를 넘어서 후안극치(厚顔極致)를 보여준 뻔뻔한 레전드(legend)라고 할 것이다. 그것도 매일 얼굴을 대하던 10중대장 강재구 대위의 죽음을 이용하여 ‘살신성인’을 착안해내서 보직해임의 위기를 벗어났고 초대 재구대대장을 마쳤다는 것은 그야말로 아주 특이한 사고방식을 보여주었고, ‘과대망상증’을 의심하게 하는 언행이라 할 것이다. 

만일 K중령이 박경석 중령의 사고조치사례를 알았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보직해임을 당하지 않고 이재탁 상사의 순직을 살신성인으로 미화하여 부사관의 영웅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그리고 이재탁 상사의 8중대는 ‘재탁중대’로 하였다면 K중령은 적어도 준장 진급을 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랬다면 정말 뻔뻔한 대대장의 자세라고 엄청난 윤리적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박경석 중령처럼 못한 K중령은 진급을 못하고 전역을 해야만 했다. 

그후 박경석 대령은 군에서 1972년 육본 인사운영감실 대령과장에서 하나회의 인사청탁을 거절하여 장군진급에서 탈락했다는 사연에서는 그 나름대로 강직함이 있었다. 그러나 1975년 준장이 되었고 1980년 육본 인사참모부 차장으로 근무하던 중 신군부와 갈등을 빚고 1985년 예편되면서 파란만장한 군생활을 마쳤다. 이러한 박경석옹의 군경력을 통해보면 소위시절의 특이한 포로행적에서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구석과 더불어 뿌리깊은 반골기질이 형성된 것으로 엿보인다. 잘났다는 자신보다 잘나가는 선후배에 대하여 질시가 심했으며, 육사를 정상적으로 졸업하지 못했다는 열등감으로 주위와 충돌하는 괴팍성이 내재했다는 증언도 있다. 

박경석옹의 성격을 살펴보면 <DSM-5의 성격장애분류> 중 ‘편집성 성격장애’로 기이하고 괴상한 행동과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동떨어져 지내는 특징이 있다. 특히 상대방에게 의심과 불신이 심하고 다른 사람의 호의를 악의적 적대적인 것으로 해석하여 부당하게 거절, 무시, 이용을 하고, 피해를 입었다는 인지적 왜곡의 성격이 읽혀지는 삶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박경석의 성격은 결코 평범한 성격이 아니다.

■ 고 백선엽 장군에 대한 박경석옹의 궤변 그리고 논박

박경석옹은 고 백선엽 장군이 서거하고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한겨례>인터뷰(2020.7.19)를 통해서 “‘백선엽은 조작된 영웅’ 참전 군인이 말한다”는 제하에 폭로기사가 있었는데 참으로 눈뜨고 읽어가기가 쉽지 않은 궤변과 악담이기에 그 논박(論駁)을 통하여 더 이상 박경석옹의 ‘사자 명예훼손’을 막아야 하고 고인의 명예를 지켜드리는 것이 후배 군인으로서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궤변#1>

백선엽이 일본근 장교로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며 항일독립투사를 체포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를 했고, 여기에 더해 한국전쟁사를 왜곡해 스스로를 영웅으로 만든 위선자이다”라는 주장 

이 주장을 살펴보면 인간 백선엽의 연대별 기록을 고려하지 않은 무차별적인 악의적 매도를 하고 있다. 우선 1920년생인 백선엽은 1940년 3월 만주국 봉천(奉天)군관학교에 21세에 입학하여 1942년 12월 만주군관학교 제9기로 졸업(23세)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군 소위(24세)로 임관했다. 백선엽 소위는 당시 간도특설대에 발령되어 2년여간 근무하던 중 중위(26세)로 해방을 맞이하였다. 

백장군은 조선일보(2020. 5.28)에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한 1943년 초엔 항일 독립군도, 김일성 부대도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밀려 간도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고 없을 때"라며 "독립군과 전투행위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여기에서 전투행위라는 것은 일본군의 부대가 만주지역의 항일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의미인데 결코 1943년 당시 보급장교였던 백선엽 중위가 책임질 정도의 반민족행위를 한 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적어도 단독작전의 임무수행이 가능한 지휘관라면 대대장급(중좌)이상이라는 것은 군대의 상식에 속한다. 박경석옹은 그의 위관시절 3년은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도 없었고, 군대도 없는 패망한 조선의 청년으로서 그야말로 호구지책으로 직장에 불과한 만주군에 입대하여 위관급 장교였었던 것을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친일프레임을 씌웠다. 해방 후 국군창군과 6.25전쟁 참전, 국군현대화에 바친 호국영웅의 일생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매도하는 것은 악의를 넘어서 악랄한 해코지라고 생각되며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될 국군 역사상 최악의 하극상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일본군인으로서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한다면 적어도 계급적으로 영관급(領官級)이상의 전문적인 직업군인으로서 고도의 전문화된 특성을 발휘하는 자로 정의할 수 있다. 헌팅턴, 『국인과 국가』(서울:병학사, 1980):p.7.

《일제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법률 제11494호) 제2조(정의)<개정 2012.10.22.>제10항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이 특정한 20개 기준은 불법적 요소가 있다. 그 가운데 군인에 적용되는 것은 제10항으로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라는 조문이다. 이것은 군대를 모르고 만든 정말 무식한 관련조항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군 하사관으로서 오랜 기간 근무한 자들이야 말로 일본에 충성한 자인데 장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모순성이 아닌가? 전세계의 모든 나라의 군대에서 위관급 장교는 단순한 초급 병력관리자에 불과하지 작전을 지휘하여 ‘침략전쟁’을 할 권한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한다. 

이 조항에서 군계급의 대상을 ‘소위이상’으로 삽입한 점에는 정치적 계산이 적용되어 있다고 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백선엽 장군에게 정치적 타격과 인간적 모욕을 주기위하여 억지로 적용한 것으로 사료된다. 일본군에서 상위(上尉)이상 즉 한국군 소령급 이상으로 일본군대에 직업적으로 장기간 복무했다면 ‘친일파 군인’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고작 소·중위로 2-3년 근무한 것을 친일반민족군인으로 부풀려서 매도하는 것은 시정해야하고, 즉각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서 삭제해야 한다.

따라서 호국의 영웅 백선엽 장군을 친일프레임으로 매도하는 박경석옹의 패륜적 행위는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된다. 

1917년생인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도 만주군관학교를 1942년(26세) 졸업 후, 일본 육사 제57기로 1944년 졸업 및 임관(28세)하여 관동군 포병소위로 근무하다가 뜻밖에 해방을 맞았다. 교육기간을 빼면 고작 1년여 기간이 전부다. 그런데 마치 수십 년 일본군대에서 복무한 것처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매도하는 것이 정상인가? 더욱이 박정희는 1945년(29세) 해방을 맞아서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귀국을 하였다. 이렇게 애국적 결단으로 한때 일본군 출신임을 무릅쓰고 광복군에 자진해서 입대했다는 것은 박정희 소위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라는 것을 검증하는 것이다. 이듬해 1946년(30세)에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2기생으로 졸업하여 한국군대에서 다시 소위로 임관하였다. 박정희 대통령도 고작 일본군으로 근무한 것은 1년 정도로 소위에 불과한 경력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일본 만주군을 지휘한 듯한 고위계급자로 왜곡하여 명예훼손을 당하고 있다. 이제 국가와 군에 헌신한 군인들 중에 친일반민족프레임에 엮어서 불명예를 당하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된다. 

결론적으로 박경석옹의 고 백선엽 장군에 대한 명예훼손은 군인으로서 선배전우이자 전쟁영웅에 대한 패륜적이고 몰상식한 행위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궤변#2>

“6월24일은 육군구락부(현 육군회관) 준공 기념파티가 열린 날로, 춘천방어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친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을 포함해 전방 사단장은 모두 참석했다”고 주장하면서 “백선엽은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임진강 남쪽에서 후퇴하던 사단에 합류했다.”라고 백선엽 제1사단장(당시 대령)의 6.25전쟁 개전일의 위치소재를 추정하여 직무유기를 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우선 6.25전쟁 개전 당시에 춘천지구를 책임진 국군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북한군이 공격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본인도 자리를 지켰으며, 장병들의 휴가와 외출을 금지시켰고, 전부대원을 전투에 배치가 가능했다. 제6사단은 수리산과 소양강의 지형적인 이점을 활용한 방어로 북한군 제2군단의 춘천점령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국군 제6사단장은 사단지휘소를 봉의산에 설치하여 진두지휘하며 5일간 북한군의 진격을 좌절시켰고, 이 전투는 개전초기에 대한민국을 구한 위대한 전승으로 2000년부터 춘천대첩(春川大捷)을 거행하고 있다. 그런데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이 육군회관 준공식에 참석했다고 거짓을 증언하는 것은 ‘명예훼손죄’에 해당된다. 

그리고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에 관하여서도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다. 박경석이 묻고있는 

당시 백선엽 대령의 위치소재는 시흥의 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 재훈련교육을 6월 14일부터 받고 있었다. 

6월 25일 새벽4시부터 4시30분까지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개시되었을 때 이미 백선엽 사단장은 전방상황을 보고받았고, 즉시 수색에 있었던 예비 11연대의 출동과 공병대대장에게 임진강 철교를 폭파하도록 지시를 했다. 육군본부,『1129일간의 전쟁 6.25 』,(서울:육군군사연구소, 2014),p.92. 매우 적절한 지휘조치였다고 본다. 그런데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부대복귀했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1사단 11연대 병사의 육필증언이 확보되었다. 백선엽 사단장은 전방에서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전쟁이 터진 것을 알았고, 새벽잠을 깨서 수색지역에 예비대로 있었던 제11연대장에게 완전군장 출동준비지시를 내리면서 바로 사단사령부로 복귀하여 전투지휘를 했다는 정확한 육필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은 박래봉님(개전 당시 제1사단 11연대 본부중대 서무계 복무/예비역 대위 전역)의 ‘참전일지’에 백선엽 사단장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있다.

“1950. 6. 25 새벽 4시경, 비상나팔 소리가 울리며 북괴 인민군이 개성을 점령하고 전차를 앞세우고 남진 중이라고 전달되었다. 사단장 명령이라고 완전무장을 하고 사단연병장에 집합명령이 내려 배낭과 보자기에 서류를 쌓아 짊어지고 일보계 담당자와 본부중대에 비치된 M기관포 총열과 몸통을 각자 어깨에 메고 연병장에 나가보니 연대병력이 집합이 되어 있었다. 그날 밤부터 비가 오고 있었는데 백선엽 사단장이 우비를 입고 단상에 올라오더니...(중략)...북괴 인민군이 남침중에 있다는 전황을 설명하고 수색역에 기차 화물차가 대기중이니 질서있게 승차하라고 하여 비를 맞으며 화물차에 올라타고 문산까지 가서 하차하였다.” -박래봉선생님『6.25전쟁 참전일지』,p20-2.-

  이 육필기록은 71년전 그날의 진실을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 제1사단 11연대 병사의 눈과 귀로 백선엽 사단장의 6월 25일 새벽의 위치소재지는 국군 제1사단의 사령부와 예비연대 제11연대 연병장(현 수색)에서 부대를 정상적으로 지휘하였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데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백선엽 사단장에 관한 박경석옹의 주장은 미필적 고의로 지어낸 허위라는 사실을 검증했다. 

<궤변#3>

다부동전투(1950.8.13~28)에 대해서도 “백선엽은 후퇴를 참 잘하는 사단장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여서 ‘내가 등을 보이면 총을 쏘라’며 진두에 서서 전투를 지휘했다는 미담 역시 사실이 아닐 것이다”라는 주장에 대하여.

6.25전쟁 당시 다부동전투는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가산면 다부리 일대에서 국군 제1사단과 미 육군 제25사단 제27연대와 북한군 제3, 10, 13, 15사단이 낙동강 방어전의 승패를 걸고 격전을 벌인 50년 8월 최대의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 정면이 미군에 비교하여 약하다는 점을 알고 북한군 4개 사단이 총공세를 했던 것이다. 8월 20일 11연대가 북한군의 공격으로 고지를 탈환당하고 다부동쪽으로 지리멸렬된 상태로 철수하고 있다는 보고에 이어서 미 8군사령부에서 백선엽 사단장에게 질책의 전화가 날아왔던 것이다. 이때 백선엽 사단장은 즉각 퇴각하는 다부동쪽으로 달려가서 병사들은 모아놓고 결연한 의지로 훈시를 했다는 것은 전설이 아니라 진실이다.

“지금 국가의 운명이 이 낙동강방어선에 달려있다. 조국의 운명이 이 유학산에 걸려있는데 우리가 여기에서 후퇴하면 우리 민족은 갈 곳은 어디냐? 이제 사단장이 직접 선투에 서서 나갈 터이니 귀관들은 나의 뒤를 따르라. 만일 사단장이 선두에서 물러선다면 나를 쏴라. 만일 귀관들이 명령없이 철수한다면 내가 귀관들을 쏘겠다.”

이에 제1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백선엽 사단장이 진두지휘하면서 앞장을 서자 굶주리고 지친 몸을 일으켜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작전을 수행하여 30분 만에 다시 448고지를 탈환해냈다. 이것을 지켜본 미 제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은 백선엽 사단장에게 다가와 “사단장이 직접 돌격에 나서는 것을 보니 한국군은 신병(神兵)이다”라고 감탄하면서 미군들도 전열을 가다듬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 다부동전투에서 백선엽 장군의 제1사단이 북한군 4개 사단의 공격에 맞서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사수하였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결행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1950년 8월 다부동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 전차가 길옆에 쳐박혀있다 

이러한 전사적 진실에 대하여 박경석옹은 개인적인 논증자료나 증거도 없이 추정적으로 부정하고 미담정도로 깎아내리는 것은 다부동전투에서 전사한 국군장병을 생각한다면 차마 뱉을 수 없는 망발이라고 사료된다.

이 다부동전투의 승리로 북한군의 8월 공세는 기세가 꺾였고, 낙동강 방어선은 안정을 찾았다. 후에 백선엽 장군은 “살아남은 자의 훈장은 전사자의 희생 앞에서 빛을 잃는 다”고 술회하는 겸손한 어록을 남겼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세에 뚫렸다면 대구-부산으로 적의 전차가 진출하여 대한민국은 패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다부동전투’는 국가의 존망이 좌우될 정도로 중대한 전투였기에 ‘다부동대첩(多富洞大捷)’으로 격상하여야 한다. 지난 2021년 8월 11일 거행된 고 백선엽 장군 서거 1주기 추모식에서 빈센트 브룩스 예비역 대장(전 한미연합사령관)은 추모사에서 “다부동 전투에서 가장 명성을 떨친 지휘관은 고 백선엽 대장님이셨다. 다부동에서 그의 용맹한 저항과 적과 기꺼이 맞서는 투지는 모든 미8군 장병에게 결의를 불어넣었고 마침내 이를 통하여 전세를 바꿀 수 있었다.”고 전사를 인용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결코 미 육군대장의 추모사는 빈말이 아니라 전사의 진실을 가지고 책임있는 발언을 남긴 것임을 잊지말아야 한다. 

박경석옹은 대대장 시절에 발생했던 고 강재구 대위의 사망사고에 대하여 “강재구 대위의 죽음이 어찌 살신성인인가? 부하들에게 수류탄 교육을 잘못시킨 실수로 강재구 대위가 죽게 된 사망사고가 맞지 않는가? 그것이 어찌 영웅적인 죽음이란 말인가? 대대장도 교육훈련을 제대로 못시킨 책임이 있는데 왜 처벌하지 않는가?”라는 말을 들었다면 어떤 말로 해명을 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 사고는 입이 열 개라고 할 말이 없는 대대장의 지휘책임이 아닌가? 그럼에도 감언이설(甘言利說)과 궤변적 논리에 채명신 사단장과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까지 넘어간 것은 아니겠지만 군의 사기와 육사장교의 정신적 지표를 위하여 강재구를 육군장으로 치르고 소령으로 추서한 것은 천우신조(天佑神助)이다.  대대장 박경석 중령에게 책임을 묻지않고 일할 기회를 준 것이 군대다. 그런데 백선엽 장군의 전승에 대하여 양심과 상식없이 폄훼를 반복하는 진의가 의심스럽다. 박경석옹은 다시는 다부동전투의 진실을 고의적으로 왜곡하지 않기를 바란다.

<궤변#4>

“2010년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한 백선엽 명예원수(5성 장군) 추대를 막아냈다. 자신이 평생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일제 앞잡이였던 백씨가 한국군 최초의 명예원수가 될 순 없다’고 앞장서 반대했다. 채명신, 박정인, 이대용 장군 등 참전 군원로들도 그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서 무산시켰다”는 주장에 대하여.

10여년 전, 이명박 정권시절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생존의 백선엽 장군에 대하여 명예원수(5성 장군)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비록 상징적인 의미의 추대프로젝트지만 시행되었다면 군의 명예를 드높이는 멋진 행사가 되었을 것이다. 현행 《예비역 진급 및 장교 임용에 관한 규정》에는 명예진급 상한선을 예비역 대령까지로 정했기 때문에 관련 규정을 고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현행 군인사법 제27조는 ‘원수(元帥)는 국가에 대한 공적이 현저한 대장 중에서 임명한다’고 되어있어서 예비역 대장이 명예원수가 되려면 이 법령도 개정해야 한다. 원수의 진급은 국방부 장관의 추천에 의해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서 국회의 동의를 얻어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우리는 창군이래로 원수를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군사적으로 육·해·공군 60여만 대군과 예비군 310여만 명을 보유한 세계 8대 강국에서 명예원수를 배출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스스로 기회를 외면해왔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한국군 첫 육군대장에 오른 백선엽 장군은 사단장, 군단장을 거쳐 32세의 연소한 나이에 최연소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으며, 8월 낙동강 방어전에서 다부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서 전세를 전환시켜 백척간두의 대한민국을 구한 장군이었다. 특히 전쟁 중 한국군을 대표하여 맥아더 장군과 워커 장군을 상대하였으며, 북진 때는 평양에 제1사단을 진두지휘하여 첫 입성을 했던 명실상부한 국군의 전쟁영웅이었다. 

미군에서도 ‘살아있는 전쟁영웅’으로 주한미군에 근무를 오고가는 미군들은 백선엽 장군을 알현(謁見)하는 것이 일생일대의 기념으로 소망할 정도로 추앙을 받고 있었다. 과거 미 육군보병학교에 초청되어 한국전쟁의 당시 참상을 설명했던 육성이 미 조지아주 포트 베닝(Fort Benning)에 개관한 미 국립보병박물관의 한국전쟁전시관에 영구보존되어 있다. 이런 자랑스러운 일은 바로 백선엽 장군이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휴전회담의 한국군 대표로 임무를 수행하여 한국군의 자존심을 세웠으며,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정전협정에 서명을 거부한 한국군의 상징적 장군으로 명예원수로 추대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분이 아닌가? 박경석옹이 고 백선엽 대장의 명예원수 추대를 반대한 세부 주장을 보면 “백선엽의 과거 전력을 조금이라도 알고있는 이라면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정상적인게 없고 그래서 만들 명분도 없다는 점을 바로 알 수 있다. 첫째, 백선엽 장군이 사후 자신에 대한 평가가 반전 될 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노파심 및 명예욕이 맞아떨어져서 추진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백선엽 자신이 추종세력과 함께 짜낸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셋째, 자신의 공을 부풀리고 과오는 감추면서 친일파의 전력이 드러나면 6.25전쟁에서의 구국영웅이 허구가 될 것이 염려되어 추진했다”는 것으로 요약이 된다. 

우선적으로 백선엽 장군 사후의 평가반전(評價反轉)을 우려했다는 말은 가히 소설을 쓰는 망상적 사고로서 노령의 102세를 살아오신 군원로께서 노파심과 명예욕으로 과욕을 부렸다는 발상부터가 잘못 된 것이다. 생전에 백선엽 장군은 초대 5사단장, 1사단장, 2군단장, 1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합동참모총장 등 전무후무한 군인의 영예를 다 누린 분이고 그럴 만한 자격과 인품을 갖춘 분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심지어 2013년 ‘명예 미8군 사령관’으로 추대되는 영광을 누린 분이다. 그를 기념하여 캠프 험프리스(Camp Humphreys)기지내 강당을 ‘백선엽 장군 강당(General Baek's Hall)’으로 명명하여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고 있다.

6.25전쟁기간 중 함께 싸웠던 전 유엔군사령관 겸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Ridgway) 예비역 대장은 “백선엽은 대한민국 육군에서 가장 뛰어난 작전지휘관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직업군인으로서 가장 기본적이고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 개인으로서의 명예, 도덕적 용기, 부하들에 대한 변치않는 애정 그리고 승리를 향한 의지가 그것 이었다.”고 격찬을 하였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차세대미래전략연구원 이석복 이사장(예비역 소장)은 “국가가 영웅을 갖는다는 것은 사회에 큰 자산이다. 우리나라는 건국이후 세계가 추앙하는 자랑스러운 인물들을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이다. 고 백선엽 장군님이 그 전형적 예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둘째로 백선엽 추종세력의 자작극이라는 망발은 법적으로도 책임져야할 말이다. 지난 2010년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각종 기념행사의 하나로 백장군의 명예원수 추대를 한다는 것이었다. 백선엽 장군의 국가적 헌신봉사를 기리고자 2009년에 추대방안을 검토했던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역사상 원수는 미국의 맥아더 장군, 브래들리 장군, 영국의 몽고메리 원수 등이 있고, 북한은 3대 수령을 원수라 칭한다. 따라서 한국군이 명예원수를 탄생시키는 것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자연스러운 군의 명예(honour)와 자부심(pride)이 될 수 있다.

셋째로 백선엽 장군이 6.25전쟁의 과오를 감추고 친일파 전력이 드러나 구국의 영웅이 허구로 비난받기 전에 명예원수로 추대를 하려했다는 것도 왜곡된 추정이다. 고 백선엽 장군은 망국조선의 청년으로서 군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지 친일파로 민족을 배신한 적도 없다고 분명히 해명을 했다. 조선일보(2020. 5.28)에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한 1943년 초엔 항일 독립군도, 김일성 부대도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간도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고 없을 때"라며 "독립군과 전투행위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물론 후방 주둔지의 보급장교 직책을 수행한 바가 반증이다. 박경석옹은 그 주장의 허구성에서 모순과 왜곡 그리고 궤변을 재발견할 수 있다. 

고 백선엽 장군이 생전에 분명히 간도특설대에서 위관시절 일개 참모장교(보급장교)였던 행적을 해명했음에도 계속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특히 10여년 전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를 방해한 것이 무슨 큰 공적을 세운 것처럼 자랑하는 것은 후안무치한 짓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박경석옹의 왜곡된 주장에 일부 군원로들이 부회뇌동하여 백선엽 장군의 군 최초 명예원수 추대계획을 무산시킨 것은 부러움에 질시는 아니겠지만 희대의 하극상(下剋上)이다. 이러한 작태(作態)에 대하여 역사적 도덕적 책임론에서 ‘박경석’이라는 이름은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한다. 

<궤변#5>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잡는데 앞장선 사람이다. 내가 백선엽 가족이라면 현충원에 안장하지 않겠다.”라는 주장에 대하여.

박경석옹의 이 발언의 시점은 2020년 6월 9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나왔다. 백선엽 장군이 서거하신 날이 그 후 한 달이 지난 7월 10일이므로 장군의 생전에 그야말로 예의상으로도 사후발언을 삼가는 것이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망언을 일삼는 것은 박경석옹의 교양수준을 의심케하는 매우 부적절한 망언이었다고 사료된다.

재론하지만 백선엽 소위가 장교로서 근무했던 1943년 이후에는 만주지역에 독립군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1910년 한일합방이후 <독립전쟁론>이라는 항일투쟁노선에 입각하여 전 독립군부대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만주에서 무력을 양성한 후 국내로 진공하여 일제 침략세력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결의가 있었다. 그러나 1913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 등 일본의 대륙침략 전쟁기도에 저항이 불가했던 당시 독립군의 한계를 노출하였으며, 1940년 이후에는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기지를 중국 본토로 옮겨서 임시정부 예하의 ‘광복군’이라는 정규군을 창설하여 투쟁을 이어갔다는 것은 정설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17일 광복군(光復軍)을 중경(中京)에서 창설하였다. 즉 만주지역에 독립군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일보>와의 인터뷰(2020년 5월 28일)에서 백선엽은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한 1943년 초엔 항일 독립군도, 김일성 부대도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간도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고 없을 때"라며 "독립군과 전투행위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했다. 따라서 거듭 강조하거니와 백선엽 중위는 일본군의 군복을 입었으나 독립군을 토벌한 작전과는 관련한 반민족행위는 없었다는 점을 역사적으로 검증했다. 

따라서 백선엽 장군은 독립군을 토벌한 바가 없으며, 국립 현충원에 모시기에 하자가 없는 애국자가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경석옹의 억지주장은 백선엽 장군에 대한 인신공격에 목적을 두고 근거도 없는 불명확한 지식으로 더 이상 해서는 안된다.

■ 박경석옹은 고 백선엽 명예원수의 영전에 참회하라

고 백선엽 장군은 애국시민단체 《백선엽 장군 기념사업회》에서 지난 2021년 8월 11일 명예원수의 추대와 함께 5성 장군패가 영전에 헌정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무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해도 태양을 가릴 수는 없다는 말처럼 백선엽 장군의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일생의 업적은 애국국민들의 가슴에 영원히 기억된다는 진실을 보여준 것이다. 

백선엽 장군은 40세가 되던 1960년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끝으로 군에서 전역하였으며, 이후 약 10년간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등을 비롯한 스페인, 포르투칼,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구라파 6개국과 아프리카 13개국 대사를 겸임하는 등 외교관으로서 국익을 위해 세계를 누빈 위대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1969년에는 교통부장관으로 임명되어 최초의 지하철 1호선을 건설하는 역사적 업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전쟁기념관 건립후원회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 육군협회 명예이사장 등 서거하는 그날까지 조국 대한민국의 구국의 영웅으로서 현역으로 헌신봉사를 하신 위대한 군인이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일생을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받친 위대한 장군을 6.25전쟁의 전우들이 영면하고 있는 동작동 현충원으로 모시지 못하고, 반애국세력의 난동으로 대전 현충원에 모신 것은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패륜행위라고 생각한다. 특히 위에 거론한 <궤변 #1~#5>에는 박경석옹이라는 후안무치한 자가 주동하여 역사와 진실을 왜곡하고 고인을 폄훼하는 만행을 저질러 왔다는 점을 논박하여 이후로 준동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고자 한다.

박경석옹은 살아생전에 고 백선엽 명예원수님께 해서는 안될 모욕과 명예훼손 그리고 진실왜곡 등에 대하여 진심으로 참회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고인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자신의 삶에 진실과 용기를 남겨야하지 않을까? 고 백선엽장군은 1950년 6.25전쟁 당시 하늘이 이 민족에게 보낸 ‘제2의 이순신 장군’이었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시겠는가?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사자성어처럼 악연의 하극상(下剋上)을 박경석옹 자신이 스스로 풀기를 기대하고자 한다. 박경석옹이 고 백선엽 명예원수에 대한 진실한 화해의 시간이 결코 많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장군의 도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애국국민과 후배 장교들이 예의주시하고 있다.

▲ 고, 백선엽 장군 1주기 추모시를 낭독하고 있는 장 순 휘 (정치학 박사, 한마음문인협회 회장) 

                                         <구국의 명장 고 백선엽 장군 제1주기 추모시>

                                                더 찬란한 오성장군의 빛으로 

                             

                                                                                    장 순 휘(시인, 한마음문인협회 회장)

그날은 하늘도 땅도 애국국민도 함께 울었습니다

그날은 눈물도 비와 함께 광화문을 적셨습니다

그렇게 떠나보낸 장군님을 오늘은 그리움에 추모합니다

비록 나라도 군대도 없어 일제 군복을 입어야 했지만 

국군 창군의 운명적 소임을 짊어진 선견지명이었고

동족상잔의 비극에서 나라를 구할 경륜이 되었습니다

전운이 감도는 남과 북의 먹구름 속에서도

서울의 북방을 방어하는 제1사단을 지휘하여

언제라도 싸워 이길 천하제일사단을 만드셨습니다

6월 25일 새벽 4시, 탱크를 몰고 남침하는 북괴군을

맨주먹 육탄공격으로 곳곳에서 격파했던 용기는

수도 서울을 지켜내려는 장군님의 결사투혼이셨습니다

그해 8월 낙동강전선은 국가의 존망을 가름하는 결전장

“지금 나라의 운명이 이 전투에 달렸다”고 외쳤던 장군님!

퇴각하는 부하들에게 “사단장이 물러나면 나를 쏴라”고 명령했던 장군님!

그렇게 싸워서 이겼던 다부동 전투는 구국의 신화가 되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수도 서울을 탈환했고

38도선을 넘어서 북으로 북으로 진격하면서

평양을 선봉으로 점령한 장군님의 1사단은 천하무적이었습니다.

통일의 최선봉에서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그러나 중공 오랑캐의 개입으로 통일의 꿈이 무너져버린

그 천추의 한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제1군단장, 제2군단장, 참모총장으로 전장을 누비며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대장이 되신 위대한 군인

미군 장성들도 경의를 표하는 대한민국의 전쟁영웅

그분이 바로 육군 대장 백선엽 장군님 이셨습니다

함께 싸웠던 미 육군 대장들이 고백하기를 

“백선엽 장군은 한국 육군에서 가장 뛰어난 작전지휘관 이었다”

“동족상잔의 전쟁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쉬지 못했던 남자였다”

“당시 한국육군이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나의 오판을 백장군 덕분에 고쳤다”라고

생전에는 미 대사가 무릎을 꿇어 인사했던 유일한 한국전의 영웅이셨습니다

100세의 병석에서도 나라를 걱정하신 장군님!

“중국은 믿을 수 없다. 미국과 함께 가야한다”라는 유훈을 받들어야 함에도

종북굴중(從北屈中)의 비겁한 나라꼴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자유와 평화는 절대로 공짜가 없다”고 하신

안보의 교훈을 잊지 않고 우리가 꼬옥 지키겠습니다

아! 구국의 명장 고 백선엽 장군님이시여!

비로소 오늘 국민들이 정성을 모아 추대합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오성 장군, 명예원수님으로!

백선엽 명예원수님! 백선엽 명예원수님 듣고 계십니까?

더 찬란한 오성장군의 빛으로 조국 대한민국을 지켜주소서!

오늘은 위대한 군인 백선엽 명예원수님의 1주기 추모식입니다

오늘도 하늘과 땅이 애국국민이 울었습니다

오늘도 눈물이 비와 함께 대전현충원을 적셨습니다

그러나 백선엽 명예원수님을 오늘은 기쁨으로 추대합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오성장군, 고 백선엽 명예원수님! 영면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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