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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모습 잃은 세검정에 홍제천은 흐른다.

  • 기사입력 2018.07.27 10:26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 : 세검정(洗劍亭)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 4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번지 6호


홍제천을 따라 거슬러 오르다보면 좌우의 산기슭은 암석으로 담을 쌓은 듯하다. 암석을 파고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고가도로를 놓았는가 하면 개천을 메워 자동차도로를 만들어 통행하도록 하였다. 낮은 암반 위에는 다시 사찰을 짓고 가정집을 지어 자그마한 마을을 이루었다. 1950년대만 하여도 서울의 종로 및 청계천 주변에서 살던 사람들이 땅 한 평 없이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해 왔든가 처음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있든 곳이었으나 삶의 형편이 나아지면서 이곳은 새로운 주인으로 바뀌면서 살기 좋은 마을이 형성되고 ‘자연과 더불어’ 라는 슬로건이 이곳에 먹혔다. 홍제천은 그렇게 넓지 않지만 북한산 어느 봉우리에서 흘러내려온 샘물이 실개천을 만들고 다시 모여 홍제천을 이루었다.

▲ 보도각백불


거슬러 오르다 보면 개천 건너 우측에 서대문 끝자락에 위치한 보물 제1820호인 ‘보도각백불’이 자리하고 있다. 맑은 물과 공기, 아름다운 정취를 느끼는 곳에 자리 잡은 보도각백불은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에는 물을 바라보는 완벽한 배산임수를 갖춘 곳이라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백불이란 의미는 불상의 전면에 흰색 호분으로 칠해져 있어 부르게 된 것이다.

▲ 보도각백불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옥천암이란 사찰이 있는데 예전에는 ‘불암(佛巖)’이라 불리었던 고찰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이곳의 백불은 조선 전기의 유학자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처음으로 백불(마애불상)의 존재가 확인된다. “장의사 앞 시내… 물줄기를 따라 몇 리를 내려가면 불암(佛巖)이 있는데, 바위에 불상을 새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18세기 이후 ‘불암(佛巖)’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실록(英祖實錄)』 등의 기록에 남아 있고, 19세기 이후의 기록인 『동국여도(東國輿圖)』, 『한경식략(漢京識略)』, 『청우일록(靑又日錄)』(1881년 4월 19일자), 『조선명승실기(朝鮮名勝實記)』(1914년 간행), 권상로의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 등에 마애보살상과 함께 보도각에 대한 기록이 언급되어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옥천암이라는 명칭이 등장했고, 19세기 이후로는 ‘해수관음(海水觀音)’, ‘백의관음(白衣觀音)’ 또는 ‘백불(白佛)’로 불리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68년(고종 5)에는 명성황후가 해수관음 곁에 관음전을 지었다는 기록과 함께 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모친인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옥천암에서 기도를 하며 호분을 발랐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 오간수교


백불에서 홍제천은 위쪽으로 계속 이어지다가 개천을 가로지른 오간대수문이 놓이고 옆에는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하여 숙종 41년(1715)에 탕춘대성을 쌓고 홍지문(弘智門)을 내었다. 지금의 성문과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은 1921년 대홍수로 허물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본래의 성문은 산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한북문(漢北門)’이라 불렀으나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걸면서 공식 명칭이 되었다. 지금의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홍제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조한 산성이다.

▲ 홍지문


조선은 왜란과 호란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효종에서 숙종에 이르기까지 수도 방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숙종 재위 기간인 1704년부터 도성 수축 공사를 시작으로 6년 후인 숙종 36년(1710)에 왜란과 호란 속에서 서울이 함락되며 갖은 고초를 겪은 조선왕조는 전쟁이 끝난 후 국방은 물론 유사시에는 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효종(1649∼1659 재위), 현종(1659∼1674 재위)을 거쳐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방위에 더욱 치중하였다. 숙종은 재위 30년(1704) 3월부터 도성 수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공사는 6년 후인 숙종 36년(1710)까지 계속되었고, 북한산성을 37년(1711)에 축성하고 1718년 윤 8월 26일 시작하여 40일간 약 반을 축성하고 일단 중지하였다가 다음해 2월부터 다시 축성하여 약 40일 후에 완성하였다. 약 4km의 탕춘대성이 완성 되면서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현 서울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고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 홍지문과 탕춘대성


홍지문에서 위쪽으로 400여m 더 올라가면 바위 위에 정자각 형태의 정자가 홍제천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위치에 서 있다. 종로구 신영동 168-6에 자리 잡은 ‘세검정(洗劍亭)’이다. 지금은 주위가 많은 집으로 가득 채워져 아름다운 옛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이곳에 집이 없고 물이 흘러내리는 암반과 맑은 물, 주변의 크고 작은 숲을 생각하면 천하의 풍경을 가진 곳이 아닌가 한다. 여기에 큰 바위 위에 우뚝 솟아 있는 T자형의 정자에 선비가 기둥에 기대 시 한수를 읊는다면 흐르는 물도 숨죽여 흐르지 않을까 한다.

▲ 세검정


세검정은 언제 누구에 의해 지어졌는지 분명치 않다. 백색 화강암 위에 자리 잡은 세검정은 비봉, 문수봉, 보현봉, 북악산, 구준봉 등 화강암봉과 거기에서 발원되는 차고 맑은 물줄기가 모여 홍제천을 이루면서 갖기지 이야기를 담았다. 신라 태종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죽어간 수많은 장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장의사(세검정초등학교 내 당간지주 남음)를 지었고, 장의사(壯義寺) 주변의 절경 때문에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부터 홍체천의 세검정 주변에는 풍류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연산군은 즉위 12년(1506)에 오랜 역사를 간직했던 장의사를 철거하고 풍류를 즐기기 위한 시설로 바꾸었다. 세검정 물길 바로 위에 이궁(離宮)을 짓고 석조(石槽)를 파 온당치 못한 왕의 권력을 욕되게 하였다고 전한다. 그곳이 탕춘대(蕩春臺)이다. 이때 이곳에 정자를 짓고 세검정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다른 주장은 인조반정 때인 1623년 이괄, 김자점, 이귀, 김유 등 반정군이 홍제원에 모여 세검입의(洗劍立義)의 맹세를 하고 창의문으로 진격, 반정을 성공시킨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검정을 세웠다는 설이다. 이뿐만 아니라 숙종 37년(1711)에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수비군의 연회장소로 세검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에 의하면 세검정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의 숙종 때까지 있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검정은 이전에 지은 것에 대한 정확한 고증보다 설에 의한 것이지만, 영조가 인조반정 2주갑(二周甲;120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743년 5월 7일 창의문을 친림하여 옛 일을 생각하고 감회를 감구시(感舊詩)를 지으며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써 문루에 걸게 하였다. 1747년 5월 6일 경기지역을 관할할 총융청을 탕춘대로 옮기고 북한산성까지 수비하게 한 뒤 영조 24년(1748)에 총융청 장졸들의 연회장소로 세검정을 짓게 했다.

▲ 세검정과 홍제천


세검정이 다 지은 뒤 겸재 정선(73세)이 영조에게 보이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영조는 겸재의 그림 제자로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지극히 애호했기 때문이다. 그림속의 세검정은 정자를 받친 초석이 높아 누각 형식의 건물이다. 지금의 도로 쪽에 나지막한 담장을 두르고 입구에 일각문을 두었다. 남쪽에서 본 건물의 측면에는 편문(便門)을 달아 홍제천이 흐르는 개물로 내려갈 수 있도록 묘사되었으며, 지붕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절병통을 세워 정자의 형태를 갖추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구조이지만, 현재 이런 시설은 없고 바위 위에 세검정은 큰 의미를 담지 않은 건물이 올려져있다.

▲ 겸재의 세검정도


그림속의 세금정은 1941년 부근의 종이공장 화재로 소실되고 장초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5월에 겸재의 <세검정도>를 통해 복원되었으나 너무 졸속으로 지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정자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 옛 풍광을 막아버렸다. 다만 홀로 우뚝 서 있는 정자가 있기에 옛날이 이 주변이 절승지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정자 바로 밑에는 홍제천이다. 홍제천(弘濟川)이란 지명은 이 근처에 홍제원이 있어서 유래된 것인데, 홍제원은 조선 시대 빈민 구제기구이자 중국 사신들이 묵어가던 곳이다. 홍제천은 ‘모래내’ 또는 ‘사천’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홍제원에 이르면 모래가 많이 퇴적되어 있어서 물이 늘 모래 사이로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의하면 "세검정은 창의문 밖 탕춘대 앞에 있으며, 차일암(遮日巖)이 있다. 열조(列朝)의 실록(實錄)이 이루어진 후에, 반드시 여기서 세초(洗草)하였다." 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에 가장 기본이 된 자료는 사초였다. 사초는 사관(史官)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참여하여 보고들은 내용과 자신이 판단한 논평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사초는 사관들이 일차로 작성한 초초(初草)와 이를 다시 교정하고 정리한 중초(中草), 실록에 최종적으로 수록하는 정초(正草)의 세 단계 수정작업을 거쳐 완성되는데, 이 과정에서 초초와 중초는 모두 모아서 글씨가 남아 있지 않게 물로 씻는 작업을 ‘세초(洗草’라고 한다. 세초 작업이 끝나면, 세검정 앞 홍제천의 차일암에 말렸고, 말린 종이는 관청 조지서(造紙署)에서 재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종이를 만들었다. 지금도 차일암에는 세초에 사용되었던 간이시설 흔적이 남아 있다.

옛 조상들은 산수가 수려한 곳에 정자나 누각을 지어 야사와 밀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세검정도 마찬가지로 자연 경관이 수려했던 곳이지만, 현대와 와서 다시 고칠 수 없는 주변의 난개발로 인해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를 지킨다고 했던 정자도 섭섭히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픈 심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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