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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 속리악(俗離岳)으로 일컫고, 중사(中祀)로 하였다. ‘속리산’

  • 기사입력 2018.12.21 13:03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 : 속리산 법주사 일원 (명승 제61호)
소재지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번지 등


속리산은 불교와 관련된 문화재와 조선 왕실과 관련 된 문화재를 함께 품고 있는 명산이다. 산 자체만으로도 갖출 것을 모두 갖추어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산이다. 옛 선비들은 산을 찾아 유람기를 남기고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불교관련 석조물을 비롯한 목재 건축물이 남아 있다.

▲ 속리산


속리산은 충북 보은군의 속리면과 경북 상주시의 화북면에 걸쳐있으며, 태백산맥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나오는 소백산맥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한국의 8경 중의 명산이다. 화강암을 기반으로 변성퇴적암이 어우러져 높고 낮은 산의 형상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화강암부분은 날카롭게 솟아 있고 변성퇴적암 부분은 깊게 패여 전체적인 모습이 깊은 봉우리와 계곡이 웅장한 절경을 이루고 있다. 해발 1,057m의 속리산은 법주사를 중심으로 천왕봉과 관음봉을 연결하는 일대로 9개의 봉우리가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러왔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면서 광명산(光明山), 지명산(智明山), 형제산(兄弟山), 자하산(紫霞山), 미지산(彌智山), 소금강산(小金剛山) 등으로 다양하게 불러왔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명산은 속리산이다. 신라 때에는 속리악(俗離岳)으로 일컫고, 중사(中祀)로 하였다."라는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리산은 고을 동쪽 44리에 있다. 아홉 봉우리가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이라고 한다.” 『문헌비고』에는 “산세가 웅대하여 기묘한 석봉들이 구름 위로 솟아 마치 옥부용(玉芙蓉, 아름다운 연꽃을 의미하며 눈(설(雪)) 같아 보이므로 속칭 소금강산이라 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한국지명총람』에도 "속리산은 쑥돌(화강암)로 되었는데, 문장대, 천황봉, 비로봉, 관음봉, 묘봉 등 기이한 봉우리와 수목이 많아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므로 소금강(小金剛)이라 하며, 법주사(法住寺)와 고적이 많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예로부터 유명한 산으로 알려져 왔다.

속리산은 여러 이름으로 불러온 만큼 8개의 봉우리를 가졌다. 천황봉,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이 있으며, 내석문, 외석문, 상환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추래석문, 상고내석문, 상고외석문 등 8개의 문과 문장대, 입석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신선대, 봉황대, 산호대 등 8개의 대가 있다. 주위에는 도장산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묘봉에서 부터 남동방향으로 관음봉, 문장대, 입석대, 비로봉, 형제봉이 이어져 있으며, 서쪽으로 수정봉과 태봉이 천황봉과 이어져 있다.

▲ 속리산 관음봉


속리산의 봉우리, 석문, 대는 불교에서 불리는 이름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관음봉>의 관음은 관세음보살을 의미한다. 보살은 천수천안과 대자대비하여 중생이 고난 중에 열심히 그 이름을 외면 구제하여 주는 보살이다. 그 모습이 관음보살을 닮았다 하여 붙어진 이름이다. 법주사 대웅보전의 주봉이 되며, 법주사의 중생들을 품어 안아주는 형상을 띈다.

▲ 속리산 문장대


<문장대>는 정상에 구름과 안개가 가려져 있어 운장대라고 불렸으나, 세조가 이곳에 오르니 박석 위에 책 한 권이 있어 이를 보니 오륜과 삼강을 명시한 것으로 세조가 크게 감동하고 종일 신하들과 강론을 하였다 하여 문장대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산마루에 문장대가 있는데, 층이 자연적으로 쌓여 높이 공중에 솟았고, 그 높이가 몇 길인지 알지 못한다. 넓이는 3000명이 앉을 만하고, 대(臺) 위에 큰 구멍이 가마솥만 하게 뚫려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내려도 더 많아지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뉘어서 반공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에 가서 달천이 되어 금천(한강)으로 들어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속리산 입석대


<입석대>는 조선 인조 때 임경업장군이 이곳에서 6년 동안 몸과 마음을 단련하던 곳으로 전해오는데, 어느 날 석굴에 앉아 정신을 통일하고 있는데 뇌리로 스쳐가는 목소리를 들었는데 “마주 바라다 보이는 석벽에 올라가 그 옆에 누워있는 돌을 비석처럼 세워놓으면 그 단련된 힘을 측정할 수 있으리라”하는 소리였다. 임경업장군은 곧 마주 바라다 보이는 곳에 올라가 돌을 일으켜 세우려 하였으나 아직 힘이 부족하였다. 1년 동안 더 단련하여 7년째가 되는 해 반석 위에 돌을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그 이후부터 이곳을 입석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경업대>는 임경업장군이 독보대사를 모시고 무술연마를 한 수련도장으로 삼았으므로 그의 이름을 따서 경업대라 부르게 되었다. <청법대>는 문장대 왼쪽으로 신선대와 사이에 있는 봉우리로, 옛날 어느 고승이 속리산 절경에 영혼을 잃고 방황하던 중 이 봉우리에서 어디선가 불경외우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고 하여 청법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속리산 신선대


<신선대>는 입석대와 청법대 중간에 위치한 봉우리로, 청법대에서 남쪽 능선을 바라보니 백학이 춤을 추고 있는 곳을 보고 고승이 이곳으로 갔으나 당도해보니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고승은 실망스런 마음으로 다시 청법대로 가서 그곳을 보니 여전히 백학이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고 아직 깨달음이 부족하여 신선들과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그곳에 가려는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신선들이 놀던 봉우리를 “신선봉 또는 신선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속리산 비로봉


<비로봉>은 속리산에서 가장 넓은 평원으로 천황봉에서 문장대쪽으로 가다보면 만난다. 이 비로봉의 유래는 진표율사가 법주사에 들어와 한 해가 지난 날 새벽에 좌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밝은 햇살이 방문 가득히 비춰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밖을 나가보니 맞은 편 산봉우리에서 오색무지개 걸리고 햇살이 사방으로 비치고 있었다. 대사는 비로자나불이 무지개를 타고 왔다 갔음을 알고 합장배례를 하였다. 그 후 대사는 비로자나불이 머물다 간 상봉을 비로나자불의 이름을 따서 비로봉이라 했다고 한다.

<천황봉>은 속리산에서 최고 높은 봉우리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낙동강의 근원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금강의 근원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한강의 근원이 된다고 하여 ‘삼파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천황봉 산마루에 ‘대자재천왕사’라는 대자재천왕 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신은 매년 음력 10월 인일(人日)에 법주사로 내려오는데, 산중 사람들이 풍악을 울리면서 그 신령을 맞아 제사를 지냈다. 그러면 신령은 45일 동안 사당에 머무르다가 돌아간다고 한다. 대자재천왕은 본래 인도 바라문교의 창조신인 시바신을 일컫는데, 불교에 수용되어 육계마왕으로 불리어진다. 이 제사를 지낼 때 만드는 남근은 이 마왕의 상징물 가운데 한 가지로, 부처가 도를 이루려 할 때 이 마왕이 방해를 놓았다고 한다. 법주사는 그 마력 때문에 대자재천왕을 천황봉에 모시고 때에 따라 제사를 지낸 것이다. 조선말까지만 해도 법주사의 대중은 섣달그믐날 나무방망이를 다듬어 남자 성기를 만들고 거기에 붉은 칠을 하여 한바탕 놀이를 벌임으로써 이 신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절에 재난이 생긴다고 믿었기에 반드시 그 신사를 행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초기에 와서 음사(淫祠)라 하여 폐지되고 말았다.

▲ 속리산 천황봉


천황봉은 대동여지도를 비롯하여 일본 육군이 한국 침략에 이용할 목적으로 12년 간 측량과 지명을 비밀리에 조사하여 1911년에 “한국지형도”라는 군사지도를 발행했는데 여기에 속리산 주봉을 천왕봉으로 명기하였다. 1918년 조선총독부의 소유권 아래 육지측량부가 발행한 지도에는 천황봉으로 표기됨으로써 일제 강점기에 국내 유명산 지명이 일본식으로 바뀐 것이다. <배석대>는 천황봉에서 상고암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있는 바위로, 마치 사람이 절을 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어진 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왕비 마야부인과 공주 덕만이 왕자 법승과 함께 속리산에 왔다. 국원의 번창과 왕실의 평온을 위한 기도를 매일 아침마다 이 바위 위에서 아버지인 진평왕이 계신 경주 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어느 날 덕만공주가 절을 하고 있는 옆의 바위가 이를 지켜보더니 함께 고개를 넙죽 숙인 후 다시는 고개를 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 후부터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고 하여 배석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보현봉>은 문수봉과 함께 있고, 보현보살은 항상 코끼리를 타고 있다하여 보현봉을 코끼리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 속리산 목욕소


<학소대>는 태봉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이다. 이 바위가 있는 맑은 계곡에는 창공에 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을 볼 수 있다. 이 기암괴석은 청의동자와 백의동자가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이 괴석을 발견하고는 청의동자가 이곳에 안식처를 마련하겠다고 하니 백의동자가 “살기에는 좋으나 영구히 안식처가 될 수 없는 곳이다”라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청의동자는 심산유곡에 자리 잡은 기암절벽인데 누가 이곳을 침범할 수 있겠는가 하며 그 곳에 집을 마련하고 종족을 번창시키니 그 곳이 곧 청학군이다. 백의동자는 그 곳을 지나 경북 상주 땅에 들어가 둥지를 트니 그 곳이 곧 백학군(白鶴郡)이었다. 세월이 흘러 조선 초 태조가 이곳에 들려 기도를 드리다가 청학 떼로 말미암아 맑은 계곡이 더렵혀지는 것을 보자 그것을 막기 위해서 암벽에 있는 청학서식처를 헐고 막아버림으로서 청학이 딴 곳으로 옮겨가게 되어 백의동자의 말이 적중되었다고 전한다.

속리산에는 천연기념물 제 207호인 망개나무를 비롯하여 627종의 식물과 천연기념물 제 242호인 까막딱따구리 외 344종의 동물이 서식한다. 이와 같이 속리산에는 많은 봉우리, 석문, 대, 기암괴석이 있어 천혜의 명승으로 자리매김한 산이다. 1970년 3월 24일 주변 일대와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1984년 인근의 화양동구곡, 선유동구곡, 쌍곡구곡이 국립공원에 편입되었다. 일찍 이곳에 절을 짓고 기도처로 이용되어 온 법주사는 속리산의 대표적 사찰이며, 많은 불자들과 등산객이 찾는 명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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