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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조화를 우선시한 선각의 마애불

  • 기사입력 2019.04.26 10:47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 : 가산리 마애여래입상(경남유형문화재 제49호), 호계리 마애불(경남유형문화재 제96호), 원효암 마애아미타삼존불입상(경남유형문화재 제431호)
소재지 :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산3-2, 양산시 호계동 산55,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산 6-1

우리나라에 마애불은 600년경 백제에서 산둥 지방의 마애석굴 양식을 수집하여 일정의 석굴사원인 서산의 운산면 용현리 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호)과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국보 제307호)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애불은 이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입체적 원각상보다는 조각적인 면에서 뒤떨어지지만 얕은 돋을새김이거나 선각으로 함으로써 조각이 용이하다는데 큰 이점이 있다. 바위 면을 평평하게 다듬은 뒤 깊이 파는 음각의 형태와 대상 불상을 외형은 그대로 둔 채 주위 바위 면을 제거함으로써 불상의 형태가 두드러지게 하는 양각의 불상도 남아 있다.

한국의 마애불은 불교 수용 이후 자연환경에 바탕을 두고 그곳에 전통신앙을 더해진 고유문화에 불교미술의 보편성을 보유한 석굴불교 문화의 변용이라 보면 된다. 우리보다 앞서 인도는 기원전 1세기부터 석굴 사원 축조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동안 다양한 환경과 문화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특히 인도는 아잔타 석굴에 수십 개의 석굴을 보유하고 있으며, 중국은 둔황의 막고굴, 투루판의 천불동 사암지대에 석굴을 만들었다. 한국은 대부분의 지질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석굴을 조성할 만한 자질이 없어 석굴 문화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석조를 다듬어 돔을 세우고 그 위에 흙을 덮은 새로운 형태의 석굴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신라의 경주 토함산 석굴암이다.

▲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상

우리 선조들은 생활에서 산을 안 보면 하루 일과가 시작되지 않을 정도로 국토의 대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져 산에는 산을 관장하는 산신이 있다고 믿어왔다. 산에서 기이하게 생긴 바위를 대상으로 치성을 드리기도 하였고, 그 바위에 감실을 파고 안에 마애불을 새겨 넣은 것이 한국 마애불의 시초가 되지 않았나 한다. 초기 작품으로 보는 서산의 용현리 마애삼존상(국보 제84호)은 한국 마애불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간결한 조각 수법이 부조의 예술미를 넘치게 한다. 또한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국보 제307호)은 불상이 중국의 북제 불상 내지 수 불상의 장대한 양식 계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

현재 200여점의 바위에 새긴 마애불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한국 문화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많은 마애불 중에 우수작으로 평가를 받는 작품이라도 명문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마애불의 성립과 변화된 단계를 알 수 없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그러나 마애불이 시작될 무렵에는 은밀한 공간에서 시작되었지만, 신라 통일을 전후한 시기부터는 경주 시내가 보이는 산마루의 크고 작은 바위에 새기면서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은밀한 공간에서 길목인 마을 어귀에도 다수의 마애불이 만들어지면서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고려 시대로 넘어오면서 마애불이 곳곳에 조성되면서 모습도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추상화된 표정이 냉랭하고 기형적으로 거대화한 신체 세부를 통해 정신적으로 위압감을 주는 것을 특색으로 한다.

▲ 안기동 석불좌상

북한산 구기동 승가사의 석가여래좌상에서 볼 수 있듯이 방형의 평평한 얼굴에 길게 옆으로 그어진 눈과 굳게 다문 입 등 강한 의지가 보이나 높은 불교 정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왜구의 침입에 대하여 국가의 위기를 구하려는 국민적인 소박한 신앙의 총화로 봄이 타당하다.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과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논산 계룡산 마애불입상 등에서 인체 균형을 무시하면서까지 거대하게 추상화하는 것은 고려 초기에 나타나는 조성 상 특징이라 하겠다.

▲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원나라의 영향으로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고위 관료들이 쓴 원정모 같은 보개를 쓴 마애불이 조성되었고, 고려 시대 대불보다는 아담하고 훌륭하게 조성되었다.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를 억압하였으나 세종, 세조, 중종 때의 왕실이나 사대부들의 개인적인 신앙이나 민중들의 믿음에 힘입어 불사나 불상 조각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과 더불어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과 불교의 발언권이 신장되었고 숭유억불 정책으로 폐사된 사찰과 전쟁으로 소실된 사찰을 복원하는 불사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사상적으로는 조선 초 왕실에서 미륵과 아미타 신앙을 바탕으로 제작했는가 하면, 후기에 들어서면서 마애불은 차츰 회화적 경향으로 조성이 되었다. 불화의 구도와 표현을 따라 묘사한 선각이 두드러져 있는 것이 특징화되었다.

▲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경남 양산 금정산 9부 능선에는 가산리 마애여래 입상(경남 유형문화재 제49호)이 자리하고 있다. 해발 727m 고지의 화강암에 음각으로 조성된 마애불은 높이가 12m, 폭 2.5m나 되는 영남에서 가장 큰 대불이다. 가는 선으로 조성되어 오랜 세월 동안 풍우로 마모가 심하다. 이 마애불은 편단우견 차림으로 오른손은 오른쪽 가슴 앞에서 정면을 향해 살짝 틀어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왼손은 무릎 근처까지 내려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전통적인 시무외·여원인의 수인이 조선 시대 영산회괘불도의 항마촉지인형 수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에 이 가산리 마애불입상이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는 자연 암반의 튀어나온 부분을 활용한 듯 상투 모양의 묶음이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지그시 감은 눈에 비해 크고 넓적한 코와 윤곽선이 또렷한 입술이 강조되어 있다. 신체의 양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목둘레로 삼도가 있고, 편단우견으로 드러난 오른쪽 어깨와 팔뚝은 유려한 볼륨감이 드러나 있다. 얼굴은 네모진 형태이며 활모양의 눈썹, 가늘게 감은 눈, 콧 망울이 아주 크며, 높이 덕분에 코가 온전히 보전된 모습이다. 입은 꽉 다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손가락은 선각 마애불의 특성답게 미묘한 손의 움직임을 회화적 필선으로 정교하게 묘사했다.

▲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이 마애불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며, 바위기둥이 병풍처럼 둘린 금정산 높은 절벽의 가장 끝단에 새겨져 있다. 산 아래에 있는 범어사와 같은 절에서 큰 행사를 할 때 이곳을 방문해 야외법회를 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의 불상은 통일신라 이래의 전통적인 양식을 계승한 것과 지역적 특색을 발전시킨 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마애불은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조선시대의 새로운 도상과 양식으로 변해가는 중간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 양산 호계리 마애불

양산의 산막공단을 지나 산 방향으로 가다 보면 ‘마애불 석굴암’이라는 이정표를 만난다. 마애불로 오르는 골짜기를 호계골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 ‘호계리 마애불(경남 유형문화재 제96호)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의 석굴암은 원효대사가 수행한 반고사지로 전해지는 곳이다. 마애불은 직사각형의 커다란 바위 중앙에 돋을새김으로 조성된 불상으로 높이가 2.2m, 폭이 3.2m이며 단판을 중첩하여 선각하였는데 대형 연꽃대좌 위에 앉아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오른쪽 어깨가 떨어져 나갔으며 오른손과 무릎, 발 역시 심하게 마모되어 세부적인 선각은 명확히 알 수 없다. 광배는 온 마애불을 감싸는 거신광 형태로 나타냈다. 머리는 굵은 나발로 표현되었으며 앞쪽에 두 줄 정도만 남아 있고 그 위로는 마모되어 희미하게 흔적만 보인다. 육계는 두건을 쓴 듯 분명하지 않으며, 백호공에는 감입한 흔적이 남아 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귀, 두툼한 무릎, 얼굴 윤곽은 뚜렷하다. 뭉툭한 코와 지그시 감은 눈, 입은 작으며 뾰족한 입술 모양이 독특하게 표현하였는데 전체적인 얼굴은 잔잔한 미소가 감돌고 있다. 왼손을 내려서 오른쪽 발에 합장하듯 포개져 있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손가락이 매우 길며 손톱까지도 표현해 놓았다. 왼손은 무릎 위에 얹어 땅을 가리키고 있는 촉지인을 결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 부근까지 들어 올리고 있다. 분명하지 않으나 약함을 받쳐 들고 있는 듯이 보여 약사여래좌상일 가능성도 있다. 넓은 어깨에는 통견의 법의를 걸쳤다. U형으로 길게 트인 옷깃 사이에는 엄액의(掩腋衣)가 드러나 있다. 전체적으로 선각의 깊이가 일정하지 않고 대좌는 3차원의 공간감을 살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넓은 어깨에 무릎 폭이 넓고 안정된 자세에 신체 비례가 적절한 점 등으로 보아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말이나 신라의 조각 양식을 반영한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 마애아미타삼존불입상

천성산 내 원효암에는 법당 동쪽 서벽에 3구의 마애삼존불(경남 유형문화재 제431호)이 새겨져 있는데 1906년에 조성되었다는 연대가 확인되는 마애불이다. 높이 1.3m의 마애불상은 삼존불 입상 형태이며 상단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음각되어 있어 본존불이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다.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중앙에 배치하고 왼쪽에는 관음보살이,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을 배치하였다.

본존불인 아미타여래는 상반신과 비교하면 하반신이 훨씬 길어 보여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머리는 나발이며, 육계가 산형으로 솟아 있고, 얼굴도 매우 원만한 편이다. 이마에 백호공이 있고 근엄하면서도 인자한 인상을 보여 준다. 통견의 법의는 양쪽 팔을 걸쳐 발등까지 유려하게 흘러내리고 양발 아래 연화를 밟고 있다. 본존불의 좌우의 협시불에는 본존불을 향해 합장인을 하고 원형두광을 표현했다. 좌측의 관음보살상은 보관을 쓰고 온화하면서도 여성적인 보살상의 이미지를 잘 살리고 있다. 우측의 대세지보살은 음각선이 얇아 둔탁한 느낌을 준다. 마애불 오른쪽에는 세존 응화 이천 구백 삼십 삼년 사월일(世尊應化 二千九百三十三年四月日)이라는 명문이 세로로 새겨져 있어 대한제국(1906) 때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마애불상은 전반적으로 법의의 문양이나 옷의 윤곽선 처리, 화려한 보관 등에서 조선 후기 괘불 삼존탱의 형식이 엿보이며, 한 폭의 불화를 연상시킬 만큼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 수법으로 조선 후기 불상 양식의 마지막 수법을 살필 수 있어 한국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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