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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가 있는 황제의 절 분황사 ‘모전석탑’

  • 기사입력 2019.05.24 12:53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분황사 (구황동)

불교는 석가 생전에 이미 교단이 조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이것이 발전하게 된 것은 그가 인도 쿠시니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B.C544) 후이며, 인도·스리랑카 등지로 전파되었고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다. 다비를 하여 연고가 있는 나라와 부족들이 사리를 나누어 각각 탑을 세우니 이를 일러 ‘팔분사리탑’이라 부른 것이 탑의 시원이 되었다. 한국 초기의 탑은 삼국 말기의 시기를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탑은 소재에 따라 목탑, 석탑, 전탑으로 분류하며, 대체로 중국의 전탑, 일본은 목탑, 한국은 석탑을 조성한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라고 한다. 현존하는 탑 대부분이 화강석을 재료로 한 석탑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탑의 발생과 그 계보의 과정은 목탑, 목탑의 양식을 본받은 전탑, 목탑과 전탑의 두 양식을 갖춘 석탑의 순서로 양식이 정립되었다.

우리나라 초기 탑은 목조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세기 말부터 건립되기 시작한 목탑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은 물론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조까지 계속되었다. 고구려의 목탑 자리로는 평양 청암리 등 4곳이, 백제 때는 부여 금강사 절터 등 5곳이, 신라 때에는 동양 최대 규모였다는 황룡사 목탑 등 4곳에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목탑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법주사의 팔상전이 유일하다.

▲ 분황사 모전석탑

『삼국유사』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전탑을 봉안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전탑의 특징은 중국 전탑의 영향을 받아 감실을 설치하였고, 화강암을 재료로 혼용한 것은 중국의 전탑이 벽돌만으로 축조된 것과 다르다. 현재 완전하게 남아 있는 전탑은 안동 법흥사지 7층 전탑(국보 16호)과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226호), 칠곡 송림사 5층전탑(보물 189호), 안동 조탑리 5층전탑(보물 57호), 안동 운흥동 5층전탑(보물 56호) 등 모두 5기가 있다.

전탑의 형식을 모방한 석탑으로, 석재를 벽돌처럼 작게 가공해 전탑 모양으로 쌓아 올린 유형과 일반적인 석탑과 동일한 형태를 취하면서 표면을 전탑처럼 가공해 축조한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 유형으로는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30호),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국보 제187호), 제천 장락동 칠층 모전석탑(보물 459호) 등이 있으며, 두 번째 유형으로는 의성 탑리리 5층 석탑(국보 제77호),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보물 제327호) 등이 남아있다.
모든 불탑에는 석가의 진신 사리를 모셔야 하지만, 사리가 없을 경우에도 탑을 세웠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새긴 경전을 법신사리라 하고 작은 구슬이나 반짝이는 광물질 등을 넣어 변신사리라 부르며 이것들을 탑의 중심에 넣어 탑을 쌓게 된다. 더불어 우리나라 황복사지 탑이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수종사 오층석탑처럼 아예 불상을 만들어 봉안한 예도 있는데, 이는 부처 속에 부처가 있는 독특한 구성방식을 보여준다.

▲ 분황사 모전석탑

경주의 유적지를 돌다 보면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던 황룡사 터를 만난다. 서기 632년, 신라에 최초로 여성이 지배하는 시대가 열렸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이다. 성은 김,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 김 씨의 딸이며, 진평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선덕여왕은 재위 초반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천문대인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진흥왕 때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고, 뒤이어 선덕여왕은 향기가 있는 황제의 절인 분황사와 영묘사 등의 사찰을 건립하였다.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해에 왕의 명에 의해 세워진 사찰이다. 지금은 보광전과 모전석탑만 남아 있지만, 신라 때만 하여도 웅장한 모습의 사찰이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모전석탑 하나를 3채의 금당이 둘러싸고 있는 1탑 3금당식 가람형식임이 밝혀졌다. 분황사는 황룡사와 더불어 신라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신라 승려의 계율을 정한 자장율사가 분황사에서 주석하였고, 원효는 분황사에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저술하였고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짓던 중 제40회향품에 이르러 집필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 분황사화쟁국사비부

원효가 입적하고 나서 아들 설총(薛聰)이 유해로 상을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으며, 설총이 나가려 하자 그 나가는 것을 돌아보는 듯 움직였다는 일화가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원효와의 인연으로 고려 숙종은 원효의 행적을 기록한 《화쟁국사비》를 세울 것을 명하기도 했다. 이 화쟁국사비는 이후 사라지고 비석을 받쳤던 비부만 남았는데, 조선 후기의 고증학자이자 금석학자 김정희가 분황사를 방문했을 때 비부에 적은 글이 남아 있다.

선덕여왕의 분황사에 대한 관심은 모전석탑에서 약 60m 거리에 세워진 당간지주이다.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당간을 세워 그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두었던 당간을 세울 수 있는 지주이다. 대개 절 입구에 세운 것을 감안하면 분황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된다. 선덕여왕은 황룡사를 두고 왜 분황사를 창건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그 당시 선덕여왕의 정치적 입지는 평탄치 않았다. 밖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가 있었고 안으로는 여왕을 불신하는 민심을 달래야 했다. 한 일화로, 당 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모란꽃 그림을 선물했다. 이를 본 여왕은 “이 꽃은 향기가 없다.”라고 했다. 꽃의 비밀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당 태종의 의중은 바로 여왕의 허약함을 조롱한 것이다. 이에 선덕여왕은 향기 나는 황제의 절, 분황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분황사의 건립은 국가의 구심점을 불교에 두고 많은 사찰을 지어 백성들을 위로하고 큰 절을 지어 강력한 왕권을 천명하려고 한 것이다.

▲ 분황사 모전석탑인왕상

선덕여왕은 분황사를 창건하면서 석탑을 세웠다. 돌을 벽돌처럼 하나하나 다듬어 쌓은 석탑이다. 높이 9.3m로,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탑이다. 원래는 9층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면서 현재 3층만 남아 있다. 기단은 한 변이 약 13m, 높이 약 1.06m의 자연석을 쌓은 토축 단층 기단으로 밑에는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 밑이 약 36cm 높아져 경사를 이룬다. 기단 위 네 모서리 위에는 사자 한 마리씩 배치하였는데, 두 마리는 수컷이고 2마리는 암컷이다. 동해 쪽으로 고개를 든 두 마리 사자상은 사자라기보다 물개에 더 가깝다. 바다로부터 오는 왜적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해석이다.

▲ 분황사 모전석탑인왕상

3층까지 남아 있는 탑신부는 회흑색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서 쌓아 올린 탑이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폭이 줄어드는 모양을 하고 있다. 1층 몸돌 4면에는 입구가 뚫려 있는 감실을 개설하였다. 1300여 년 간 듬직하게 지켜오고 있는 인왕상은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존재로, 대개는 사찰이나 불상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 위협적인 자세로 있는 얼굴들, 입구 좌우에 거의 원각에 가까운 인왕상을 배치하였고, 두 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다.

▲ 분황사 모전석탑 인왕상

8구의 인왕상은 얼굴이나 신체 등에서 불균형한 면을 보이는 등 추상화된 면이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왕의 왕성한 힘을 느끼게 하므로 7세기의 조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감실 내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이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2층과 3층 몸돌은 초층에 비해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서 장중한 느낌을 준다. 지붕돌은 벽돌 1장의 두께로 처마를 하고 아래위에 몸돌을 향하여 감축되는 받침과 낙수면의 층단을 두었다. 지붕돌 받침은 초충부터 6단, 6단, 5단이고 낙수면 층단은 초층과 2층이 10단이고, 3층 상면은 층단으로 방추형을 만들었으며, 그 정상에는 화강암으로 활짝 핀 연꽃 장식인 앙화만이 남아 있다.

▲ 분황사 모전석탑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때의 현상대로 복원한 것이다. 이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석함 속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그 속에는 각종 옥류(玉類)와 패류(貝類), 금·은제의 바늘, 침통(針筒)·가위 등과 함께 숭녕통보(崇寧通寶)·상평오수(常平五銖) 등 옛 화폐가 발견되어 고려 숙종 내지 예종 연간에 탑이 조성되었음을 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 분황사 보광전

모전석탑 옆에는 화쟁국사비 받침석이 남아 있다. 고려 시대에 이르면 분황사를 중심으로 원효의 법통을 계승한 원효종의 성립과 아울러 그를 기리는 비문이 건립된다. 숙종 6년(1101) 8월에는 동생이었던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권유에 의해 조서를 내려,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비와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로 하여금 연고지에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이 비는 곧바로 건립되지 못하고 70여년이 지난 명종(1171~1197) 때에 와서 분황사 경내에 건립되었다. 그 후 화쟁국사비는 정유재란 당시 분황사가 병화로 전소될 때 파손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오랜 세월 방치돼 있던 원효대사의 비석을 발견 한 사람은 조선 시대의 서예가 추사 김정희였다. 받침돌에는 원효대사의 비임을 확인한 추사의 글이 남아 있지만, 그마저 세월이 흘러 비석은 사라지고 없다. 숙종 6년(1680)에 한 차례 보광전을 중수하였는데, 상량문은 이때 작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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