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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黃龍)’과 ‘여마(驪馬)가 다투었던 여강변의 신륵사 문화재 1

  • 기사입력 2019.05.31 10:29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가

문화재 :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천송리)

남한강이 흐르다 신륵사 앞에 이르면 흐르던 물이 잠시 쉬었다 가는 것 같이 잔잔해진다. 옛 뗏목꾼들이 이 앞을 지나면서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강이다. 그래서 이곳을 여주 사람들은 여강이라 부른다. 남한강변에 자리 잡아 한 때는 번성했던 거돈사와 법천사, 흥법사, 고달사는 옛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러나 신륵사는 지금까지 오랜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많은 사람이 찾는 사찰이면서 관광지가 되었다. 옛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어 오고 있지만, 현대의 물결에 사찰도 조금씩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여강은 더욱 더 넓어 보이고 더욱 더 잔잔한 호수로 변한다. 일찍이 여주를 ‘황려(黃驪)’라고 불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여주 남한강에 ‘황룡(黃龍)’과 ‘여마(驪馬)’가 살고 있어 서로 다투었다고 한다. 황룡은 홍수를 의미하고, 홍수의 피해를 막아주는 여마는 마암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래서 여주 남한강을 여강(驪江)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신륵사 극락보전    

최근에 세운 일주문은 사찰의 경계를 일컫는 문이다. 두 개의 원형 장초석을 놓고 그 위에 공포를 짜 지붕을 얹었다. 이 문을 경계로 하여 문 밖을 속계(俗界)라 하고 문 안을 진계(眞界)라 하며, 이 문을 들어설 때 오직 일심(一心)에 귀의한다는 결심을 갖도록 마음을 촉진 시키는데 그 뜻을 두었다. 누구든지 이 일주문에 들어오면 이 진리를 깨닫고 잃었던 본바탕을 되찾으라는 뜻으로 일주문을 세웠다. 일주문 공포 아래 평방에는 ‘鳳尾山神勒寺(봉미산 신륵사)’라는 현판을 달았다. 여주의 봉미산은 그렇게 높은 산이 아니다. 해발 156m의 낮은 산으로 북내면 신남리와 여주시 오학동, 청송동에 걸쳐있는 산이다. 산의 형태가 봉황의 꼬리와 같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산의 남쪽 남한강 변에 신륵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일주문에서 다시 불이문을 만난다. 오래전에는 없었던 건물로 최근에 모습을 드러낸 불이문은 부처님 전에 드는 마지막 문에 해당한다. 이제 또다시 더는 ‘둘이 아닌’ 세계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전에 다다랐다는 의미이다. 크나큰 근본 진리는 오직 하나이고 둘이 아니며 하나를 깨달으면 백 가지에 통할 수 있다(一通百通). 잘 생각해보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며, 만남과 이별이 둘이 아니며. 시작과 끝이 둘이 아니며, 생(生)과 사(死)가 둘이 아니며,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다. 그 나타난 작용과 현상은 달리 보여도 본체와 근원을 찾아가면 모두가 하나일 뿐이다. 하나의 이치를 깨닫는 순간 일체 번뇌 속박에서 풀려난다 하여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 신륵사 극락보전    

불이문으로 들어서면서 신륵사의 경내가 시작된다. 아름드리 은행나무, 세심정, 다층전탑, 삼층석탑, 송덕비, 구룡루, 범종각, 극락전, 다층석탑, 향나무, 명부전, 조사당, 보제존자석종, 탑비, 석등, 승탑 등이 가득한 문화재가 있다. 천천히 문화재를 둘러보다 보면 다양한 문화재 앞에서 불교문화의 흐름을 읽어 내릴 수 있다.

여주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내려오고 있으나, 확실한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다. 고려 말 우왕 2년(1376) 나옹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전한다.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으나, 1858년 헌종의 조모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에게 명하여 절을 크게 중수토록 하였는데, 이때부터 영릉의 원찰로서 의미가 약해지면서 다시 ‘신륵사’라 부르게 되었다.

▲ 신륵사 극락보전    

신륵사의 중심건물은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이다. 절 이름을 '신륵'이라 한 것은 미륵 또는 나옹이 신기한 굴레로 말을 막았다는 설과 고려 시대에 마을에 나타난 사나운 말을 인당 대사가 신의 힘으로 제압했다 하여 마을 사람들이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박절[寺]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 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塼]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신륵사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경내에서 가장 중심부에 있다. 숙종 4년(1678)에 지어진 후 정조 21년(1797)에 수리되기 시작해서 정조 24년에 완공되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왕실의 원찰답게 부연을 달아 겹처마 지붕을 만들었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공간포를 올린 다포계 구조의 화려한 건물이다. 공포는 내4출목 외3출목 구성으로 집 규모와 비교하면 과도할 정도이고, 쇠서 위에 연꽃봉오리들을 조각하는 등 화려한 모습이다.

▲ 신륵사 극락보전    

건물을 받치고 있는 장대석 3벌로 기단을 쌓고, 길게 뻗은 지붕 네 귀퉁이의 추녀에 활주로 받치도록 하였다. 내부에는 불단 위에 나무로 만든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위에 화려한 닫집이 꾸며져 있다.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이고, 건릉 38년(영조 49년, 1773년)의 명문이 새겨진 범종이 있다. 또한 영조 49년(1773)에 제작한 범종과 후불탱화가 있다. 극락보전의 정문 위에는 나옹이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오는 '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입체감 있게 쓰여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신륵사 극락보전은 조선 후기에 대대적으로 수리되었으나 부분적으로 조선 중기의 수법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 신륵사 극락보전    

정면 각 칸에는 2단의 청판을 단 정자살 4 분합문을 각각 달았다. 각 칸의 앞에는 장대석으로 댓돌을 놓아 오르내리기 편리하도록 하였다. 기둥 4개에는 주련을 ‘阿彌陀佛在何方(아미타불재하방)’, ‘着得心頭切莫忘(착득심두절막망)’, ‘念到念窮無念處(염도염궁무념처)’, ‘六門常放紫金光(육문상방자금광)’ “아미타불 계신 곳이 그 어디 일까 잊지 않고 마음속 깊이 간직하라.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무념한 곳에 이르면 온몸에서 항상 자색 광명이 나오리라” 라고 걸었다.

▲ 신륵사 다층석탑    

극락보전 앞에는 고려시대의 다층석탑(보물 제225호)이 자리하고 있다. 2단의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여러 층의 탑신을 올린 석탑으로, 일반적인 석탑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세부적인 면에서는 전혀 달리하고 있다. 특히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을 다듬어 올렸으며, 바닥돌 윗면에는 연화문을 돌려 새겼다. 연꽃은 진흙 곧 사바사계에 뿌리를 두되 거기에 물들지 않고 깨달음의 세계를 향해 피어나는 불성에 비유되며, 나아가 불교의 이상향인 불국토(佛國土) 그 자체로 상징되기도 한다.

▲ 신륵사 다층석탑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 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면마다 구름 속에서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능숙한 석공의 솜씨로 새겼다. 불교에서의 용은 한나라 시기에 만들어졌다.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한 여러 동물의 형태를 모아서 만든 집성체이다.

▲ 신륵사 다층석탑    

용의 비늘은 81개이며, 울음소리는 구리로 만든 쟁반을 울리는 것 같고 입 주위는 긴 수염이, 턱 밑에는 명주(明珠)가 있으며, 목 아래는 거꾸로 박힌 비늘(逆鱗)이, 머리 위는 박산이 있다. 사찰의 용이 가지는 다양한 의미 가운데 가장 뚜렷한 상징성은 무소불위의 절대적인 권위이다. 용은 신령스러운 동물 가운데서도 그 위상과 권위가 으뜸이라 절대적인 지배자의 상징으로 여겨졌기에 사찰에 이용된 용 문양은 불법이 갖고 있는 절대 존엄성을 의미한다. 용 문양에서 용은 5개의 발가락을 가졌다. 특히 석탑에 용과 구름, 파도 문양을 조각한 승려의 무덤인 승탑에서 볼 수 있는 수법인데, 특이하게도 이 석탑에서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에는 없던 문양의 특성을 보인다.

▲ 신륵사 다층석탑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 올려져 있다. 낙수면의 경사가 극히 완만하여 둔중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추녀 밑은 수평으로 전개되다가 모퉁이에 이르러 위로 들려 전각에 반전이 표현되었다.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함에 따라 지붕돌의 귀마루도 거의 수평이며 전각의 반전도 약해져서 경쾌한 느낌을 감하고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 신륵사 다층석탑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 말에 세워진 경천사지 십층석탑(국보 제86호)으로부터 계승된 것으로, 이 석탑은 고려 시대 말기에 새로이 등장한 석탑 양식이 조선 시대로 이어지면서 나타나는 한 단면을 보인다 하겠다. 특히 기단부에서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호)의 구조와 표면 장식기법을 모방하고 있다. 고려 시대의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 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 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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