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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黃龍)과 여마(驪馬)가 다투었던 여강변의 신륵사(2)

  • 기사입력 2019.06.14 12:51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 :여주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소재지 :경기 여주시 천송동 282 신륵사

▲ 신륵사 조사당    

신륵사 극락보전 서쪽 편에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을 한 건물 한 채가 있다. 이 건물은 역대 신륵사에서 덕이 높은 나옹, 지공, 무학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 조사당이다. 무학은 1353년에 원(元)에 가서 인도의 승려 지공(?~1363)과 나옹으로부터 사사했다. 1356년에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머물러 있었다. 1364년 나옹은 양주 회암사를 중건하고 원효암에 머물고 있던 무학을 불러 수좌승을 삼았다. 나옹이 사망한 뒤에는 무학은 전국을 도는 수행 길에 나섰다. 이때 이성계를 만나 꿈을 해몽하여 석왕사를 창건하였다. 1392년(조선 태조 1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고 묘엄존자의 호를 받았으며 회암사에 있었다. 개국 직후부터 태조는 도읍지를 옮기려 했다. 수도를 옮기려는 태조 이성계를 따라 계룡산 및 한양을 돌아다니며 땅의 모양을 보고 도읍을 정하는 것에 의견을 내었다.

▲ 신륵사 조사당    

조사당은 평지 위에 장대석을 짜 맞추어 한 벌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워 지붕을 올렸다. 내부의 지붕 가구는 5량으로 구성했고 대들보 위에 가로 재가 ’井‘자형으로 놓이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마루 도리를 받게 한 구조이다.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정면의 뒤쪽으로 불단을 설치하였다. 뒤쪽에 나옹, 지공, 무학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앞면은 가운데에 댓돌을 놓아 출입에 불편함을 들었고, 청판을 댄 띠 살창의 문을 좌우 3짝씩 달아 모두 6짝의 분합문을 달아 모두 열 수 있도록 하였으며, 좌우 측면에는 2단의 청판을 한 띠살창을 한 문 한 짝씩 달았다.

▲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조사당 뒤 계단을 오르면 종이 얹어져 있는 듯한 석조물이 있는데, 나옹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으로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228호)이다. 나옹화상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진 인물로 혜근이라고도 한다. 그는 1347년에 원나라로 건너가 연공 법원사에서 승려 지공에게 배우고, 다시 자선사에서 처림의 법을 받았다. 1358년(공민왕 7) 귀국하여 오대산 상두암에 은거했으나, 공민왕의 간곡한 청으로 1361년에 신광사의 주지가 되었다.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왕사에 봉해지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 풍복국우세보제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의 호를 받았다. 1376년(우왕 2) 왕명에 의해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고려 말 조선 초, 붓다의 후신으로 존숭 받은 나옹이 남긴 한국 선불교의 올바른 이해와 마음속 청정을 찾는 선시가 있다.

“靑山兮要我以無語 蒼空兮要我以無垢 聊無愛而無憎兮 如水如風而終我 靑山兮要我以無語 蒼空兮要我以無垢 聊無怒而無惜兮 如水如風而終我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꽃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이 석종은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웠다. 또 하나의 승탑은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 탑(보물 제358호)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으며, 또 한기의 승탑은 양주 회암사지 나옹선사 승탑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이 있다. 또한 이곳에 선각 왕사 비(보물 제386호)가 있는데 이 비는 나옹화상을 추모하기 이하여 세운 비이다.

신륵사의 보제존자 석종은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을 따르지 않고 라마탑 양식으로 조성하였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완성된 이 승탑은 그 모양이 종과 같은 모형이라고 하여 석종이라 불린다. 방형의 네모난 넓고 높은 기단에 사방 가운데에 2단의 계단을 마련하였다. 각 면의 모서리에는 세로줄을 간략히 새겼다.  기단 위에는 박석을 깔고 그 중앙부에 2단의 받침대를 놓은 뒤 탑신을 올렸다. 탑신은 완만한 종의 형상을 본떠 타원형을 이루고 어깨 부분에서 수평으로 꺾이고 상부의 한 가운데에 불꽃 무늬를 새긴 단면 4각의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승탑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고려 말기에 새롭게 수용된 사리탑 양식으로 이는 멀리는 인도의 복발형 불탑에 뿌리를 두고 있다. 훗날 티벳을 중심으로 유행한 라마탑에서 새로운 양식으로 진전되고 이러한 양식이 좀 더 간소화되어 고려 말기에 우리나라에 수용되었다.
석종형 승탑은 양산 통도사의 금강계단, 김제 금산사의 금강계단, 달성 용연사 금강계단 등에도 자리하고 있다. 이 승탑은 통도사와 금산사의 석종형 승탑과 함께 계단탑 양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보제존자 석종 앞에는 8각 석등(보물 제231호)이 자리하고 있다.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상륜부를 갖추었다. 8각의 지대석을 갖추고 그 위에 8각의 하대에는 상다리 모양의 영기문을 새겼고, 그 위에 복엽복판의 연화문을 새겨 장식하였다. 간주석은 짧으며 팔각의 모서리마다 난간형을 장식하였고, 그 사이 면에는 국화문을 새겼다.

▲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상대는 복엽 앙련을 새겼고, 그 위에 낮은 층급 2단을 새기고 다시 턱이 높은 층급을 두어 화사석을 받쳤다. 받침의 표면에는 꽃무늬를 가득 새겼다. 화사석은 재질이 화강석이 아니고 납석제를 사용하였다. 화사석의 각 모서리에는 돌출된 원형 기둥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였고, 화사석 상부에는 창방과 평방을 새겼으며, 그 아래 기둥 사이 면마다 내려오는 듯한 비천상을 장식하였다. 8면의 면마다 상부를 꽃 모양으로 장식한 화창을 무지개 모양으로 냈다.
지붕돌은 상륜부와 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은 기왓골을 생략하고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 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 상륜부는 2단의 층급을 두고 연봉형의 보주를 올려놓았다. 조성연대는 고려 우왕 5년(1379) 보제존자 석종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 신륵사 보제존자 석비    

보제존자 석종 동쪽에 있는 비(보물 제229호)는 보제존자 나옹의 묘탑과 영정을 조성한 진당을 조성한 내력을 기록한 비이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 부분의 측면에는 구름무늬를 새겼고 윗면에는 복련을 새기고 가운데 면은 2구역을 나누어 사자가 서로 마주 보는 무늬를 새겼다. 위쪽에는 앙련을 세기고 그 위에 비좌를 얹어 비신을 세웠다. 비신 양옆에 기둥을 새긴 뒤 그 위에 우진각 지붕 모양의 개석을 얹었는데 막새기와와 기옷골을 표현하였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李穡)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韓脩)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뒷면에는 건립에 참여한 제자와 시주자의 명단, 중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 신륵사 삼층석탑    

나옹과 관련된 또 하나의 유물이 있는데 그것은 여강을 바라보는 강월헌 앞 암반에 자리 잡은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이다. 이 석탑은 고려 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기단부는 한 장의 넓은 돌 위에 사각형의 석재를 올려놓고 그 위에 상대석을 덮었다. 기단부 위에 놓인 탑신은 우주가 모각되어 있으나 많이 마모되어 희미하게 보인다. 몸돌 위에 기울기가 완만한 지붕돌을 덮었다. 지붕돌 받침은 3단 또는 4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현재 3층 몸돌은 결실된 상태이다. 탑의 상륜부는 모두 없어서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다.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나옹을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신륵사 강월헌    

석탑을 세우면서 옆에 정자를 세우고 나옹 생전의 당호인 강월헌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본래 정자는 삼층석탑과 거의 붙어 있었으나 1972년 홍수로 옛 건물은 소실되고 1974년에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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