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 난다.(2)

  • 기사입력 2019.07.26 10:48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가

문화재 : 문경새재(명승 제32호), 문경조령 관문(사적 제147호)
소재지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 1156, 등 (상초리)

제1관에서 제3관까지 이어지는 문경새재의 옛길은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넘나들던 길로, ‘문경(聞慶)’의 지명과 옛 지명인 ‘문희(聞喜)’에서 드러나듯 ‘경사로운 소식,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는 의미에서 급제를 바라는 많은 선비가 선호했던 고갯길이었다. 《택리지》에도 “조선 선비의 반이 영남에서 배출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음을 볼 때 참으로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이곳을 왕래하였음을 헤아릴 수 있다.

▲ 문경새재길    

옛날 선비들이 다니던 길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새재길은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길에는 다양한 문화를 읽을 수 있는 요소가 있어 늘 선비 이야기, 봇짐장수 이야기, 관군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주흘관의 성문을 들어서면 동쪽에는 새재 성황신을 모신 성황당이다. 상량문에 의하면 숙종 26년(1700)에 세웠고, 헌종 10년(1844)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여신상이 모셔져 있는데, 조선 인조 대의 명신 최명길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 문경새재길 비    

주흘관을 지나 몇 걸음 걷다 보면 비석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조선 시대에 지방관이 임기를 마쳤을 때 지방민들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하여 세운 선정비이다. 선정을 베풀 정도로 고을을 잘 이끌어 갔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곳의 많은 비에는 관찰사, 현감, 그리고 오위장까지 한몫 끼어있는 것은 참 이상하게 느껴진다. 석비 사이에 철비가 하나 있다. 매우 보기 드문 비이다. 이 철비는 1824년에서 1827까지 문경 현감을 역임한 홍로영의 비석으로 순조 26년(1826)에 건립한 비이다. 비좌 위에 비몸과 지붕을 함께 주물 기법으로 제작하였으며, 도드라진 글씨로 ‘縣監洪候魯榮永世不忘碑’라 새겼다. 대부분의 비는 석재를 이용하는데, 무쇠를 이용하여 만든 것은 보기 드물다. 많은 선정비, 송덕비, 불망비 중에 전나무 비도 있다. 이 비는 1978년에 600년 된 전나무가 쓰러졌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비문에 의하면 “원래 이곳에는 수령 600여 년의 전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어 예로부터 새재길을 오가던 길손들의 벗이 되어 오더니 1978년 9월 11일 수명을 더하였기에 20년생 전나무를 다시 심어 오랜 전통을 잇게 한다.”라고 하였다.

▲ 문경새재길 조산    

길을 걷다 하나둘씩 모은 돌이 조그마한 산을 이루듯 쌓은 탑이 조령관까지 가는 동안에 종종 볼 수 있다. 주흘관을 지나 모퉁이에 ‘조산(造山)’이라 명명된 돌탑이 있다. 말 그대로 인위적으로 조성한 작은 산을 일컫는다. 이곳의 조산은 조령 방향으로 꺾어진 부분에 있다. 이러한 조산은 풍수 지리적으로 공허하거나 취약한 지점에 조산을 만듦으로써 그곳을 보강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곳의 조산은 조령을 오르는 입구에 세워 안녕과 풍요를 기원한 곳으로 보인다.

▲ 문경새재길 지름틀바위    

걷는 길에는 기이한 바위도 있다. ‘지름틀바위’라고 명명된 바위이다. 기름을 짜는 도구를 닮았다고 하여 붙어진 이름이다. 지름틀이란 기름틀의 경상도 사투리이다. 기름을 짤 수 있는 농산물 등을 볶아 보자기에 싼 떡밥을 지렛대의 힘으로 눌러서 짠다. 계곡에도 기이한 바위가 있는가 하면 계곡과 바위, 나무가 어우러져 새재길은 사계절마다 다른 모습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 문경새재길 돌담    

새재를 넘었던 선비와 봇짐장수 등은 하루 이틀 만에 한양에 당도하지 못한다. 날이 저물면 어딘가에서 하룻밤을 머물러야 하는데 그곳이 문경새재의 조령원과 동화원, 신혜원, 그리고 주막이 있었다. 원(院)은 조선 시대에 공무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시설이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의 새재에 있는 첫 번째 숙소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조령원은 일반인도 이용을 했으며,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시장 역할도 했던 곳이다. 직사각형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으며 돌담과 석축, 4개의 건물지의 초석이 남아 있어 전체의 규모를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돌담 서쪽의 가운데에 석문틀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돌담은 바깥쪽은 정교하게 수직 벽을 쌓고 안쪽으로는 계단 형태로 쌓았는데 담장이라기보다는 성벽과 같은 형태로 축조되었다. 유사시 성벽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바깥쪽의 축조는 다양한 자연석을 한 면을 맞추어 쌓았는데 그 크기가 같은 것이 없고 모두 다른 크기로 쌓았다. 모자이크를 보는 듯하다. 돌의 생김새에 따라 옆의 돌도 그 면에 맞추는 공법으로 축조하여 아름답고 정교함을 보여주는 돌담이다. 돌담의 대칭되는 변의 길이가 모두 다르다. 동 측은 57.6m, 서 측은 53.0m, 남측은 38.9m, 북측은 37.7m이다. 오랜 세월 풍우를 견디지 못 해 무너져 있는 것을 1995년부터 1996년에 걸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7년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원 터는 고려 초기 또는 신라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우리나라 최고의 온돌지로 밝혀졌다.

▲ 문경새재길 주막    

원 터를 지나 주변의 풍경을 즐기며 걷다 보면 옛 주막 터가 나온다. 초가의 주막과 광채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막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오가던 선비들,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이 이 재를 오르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 잔의 술로써 여독을 풀며 서로의 정보를 나누며 쉬어 가던 곳이다.

주막의 시작은 고려 시대에는 술집의 형태였다가, 조선 성종 대에 개경에 처음으로 주점의 설치를 허가하고 숙종 때 민간주점이 처음으로 곳곳에 생기게 되었다. 주막의 형태는 임진왜란 후 원의 기능이 쇠퇴하고 참마다 참점을 설치하여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주막이 등장하게 되었다. 1604년에 편찬한 갑진만록(甲辰漫錄)에 의하면, 영남이나 삼남대로변에 있는 주막에도 술과 말을 먹이는 풀, 땔나무밖에 없어서 여행객들은 여행에 필요한 생필품을 두세 마리의 말에 나누어 싣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대동법이 시행되고 상품경제가 발달하여 화폐 유통량이 증가하면서 본격적인 주막의 형태가 된 것으로 본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만 해도 존재한 업종이었으나, 신작로가 뚫리고 자동차의 등장으로 걸어서 새재를 넘어가는 사람이 없어지면서 주막도 자연히 문을 닫고 말았다. 지금은 주막의 기능이 완전히 사라진 채 옛 모습을 재현한 초가집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 문경새재길 교귀정    

조선 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교인처인 교귀정이 새재길에 위치하고 있다. 교귀정은 1470년경에 문경 현감인 신승명이 건립하였다. 1896년 3월 의병 전쟁으로 불타버린 상태에서 방치해 두었다가 1999년 6월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새재길과 인접한 교귀정은 자연석을 다듬은 돌을 높게 단을 쌓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익공을 올린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을 올렸다. 건물 옆에는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아래 줄기는 비스듬히 정자를 향하고 위 줄기는 남쪽을 향해 자라고 있다. 이 소나무가 옛 교귀정이 건립될 때부터 이곳에 있지 않았나 한다. 이 건물은 신임 경상감사와 이임하는 경상감사가 관인을 인계인수하던 곳이다. '교귀'라는 건물명도 '거북이 모양의 관인을 주고받는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교귀정을 들어오는 입구에는 조선 중기 좌의정을 지냈던 용재 이행(1478~1534)이 교귀정이 건립되고 7년 뒤에 이곳에 들러 시를 남겼는데, 교귀정 뒤편에 시비가 있다.

‘交龜院(교귀원)’
交龜名有自 往跡世無傳 幽鳥眞堪慕 殘花只可憐 古今俱一態 愚智孰相懸 幸免前驅導

교귀란 이름은 그 유례 있어도/지난 자취는 전해짐이 없어라/어여쁜 새는 진정 마음 쏠리지만/시든 꽃은 다만 가련할 뿐이네/예와 이제가 한 가지 모습인데/지혜와 어리석음 무슨 차이 있으랴/아직은 견마 잡힐 신세 아니어도/산과 계곡이 반겨주는 것이리라.

▲ 문경새재길 꾸구리 바위    

교귀정 앞 계곡은 아름답기로 소문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아름다움으로 '용담'이라 부르고 이곳의 바위에서 샘솟고 있는 약수터를 '용추약수'라고 일컫는다. 용추 약수는 바닥 돌을 파고 깎아 샘을 만들고 반듯한 천정 석과 큰 바위를 층층이 쌓아 만들었다.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에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면곡 어변갑(1381~1435)이 용추(龍秋)에 대한 글 한 수를 바위에 새겼다.

龍動盤渦折 용이 꿈틀거리어 소용돌이 헤치니
涵天明日新 잠긴 하늘에 밝은 해가 새롭다.
晴雷白虹瀉 갠 날 우뢰소리에 흰 무지개 쏟아지니
恍惚孰窮神 황홀하구나! 누가 그 신비함을 알리.

용추약수 위쪽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계곡의 작은 소를 내려다보면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꾸구리 바위'라고 한다. 꾸구리 바위는 물속에 큰 꾸구리가 많이 살고 있어 바위에 앉아 있으면 물속 꾸구리가 꿈틀거릴 때마다 바위가 들썩인다고 하여 붙어진 이름이다. 이곳의 꾸구리는 송아지를 잡아먹을 만큼 크고, 이 주위로 아가씨나 새댁이 지나가면 희롱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맑은 물에는 작은 고기가 군무를 추듯 한가로이 놀고 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정사회
경제정의
정치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