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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 난다.(3)

  • 기사입력 2019.08.09 13:06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가

문화재 : 문경새재(명승 제32호), 문경조령 관문(사적 제147호)
소재지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 1156, 등 (상초리)

꾸구리 바위를 지나면 새재길은 우측으로 휘어지면서 동화원으로 가는 옛 과거길 이정표가 방향을 가리킨다. 지금의 새재길은 새롭게 조성한 길이지만, 옛길이 조금씩 남아 있어 그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 문경새재길    

조금 더 오르면 소원성취탑이 무리 지어 있다. 길손들이 쌓아 올린 돌은 하나 같이 소원이 빌었던 흔적이다. 높게 쌓은 돌탑도 있지만, 산맥의 형상을 한 탑도 있다. 무너지면 또 다른 길손이 뒤를 따라 또 쌓았다. 이곳에 쌓은 크고 작은 돌은 늘 그 숫자만큼이나 그 자리에서 소원성취를 위한 돌로 남는다.

▲ 문경새재길 산불조심 비석    

다시 길은 우측으로 한 번 더 휘어지면서 소나무를 비켜 가는 길에는 붉은 글씨로 ‘산불됴심’ 표지석(경북 문화재자료 제226호)이 세워져 있다. 주흘산의 숲이 울창하고 사람의 왕래가 잦고 주변의 풍경이 아름다워 이를 보호하자는 데 일찍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인다. 언제 이곳에 세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순수 한글 비석이다. 현재 국내에 있는 한글 고비는 전체가 4점이나, 이 표지석 외는 모두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다.

▲ 문경새재길 물레방아    

문경새재길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볼거리가 가득한 곳이다. 자연이든 인공이든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도 쉽다. 그러나 이 길을 걷는 동안 자연의 경치만 감상한다는 것은 어딘가 허전함을 느낄 때도 있다. 이곳에 물레방아가 있었다는 것에는 누구도 수긍하지 않는다. 최근에 이곳에 물레방아를 만들고 높은 암벽을 타고 내려오는 폭포도 만들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더위를 식혀줄 여유도 갖게 하였다. 물레방아는 긴 나무에 홈을 파서 흘러내리도록 하여 물레방아를 돌리게 하였다. 높이 25m의 3단으로 이뤄진 폭포수가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다. 길손들의 마음마저 시원하게 적셔주고 있다.

▲ 문경새재길 약수터    

조곡관을 지나면 소나무 숲 사이로 둘러앉아 시원한 약수 한 잔으로 쉬어 갈 수 쉼터가 있고, 쉼터 옆 계곡에는 ‘조곡약수’라고 부르는 약수터가 있다.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청산 계곡 사이로 흐르는 용천수는 물이 맑으며 맛이 좋아, 이곳에서 길손들의 갈증과 피로를 풀어주는 영약수로 오랜 세월 동안 변하지 않고 넘쳐흐르고 있다.

약수터를 지나서부터는 조선 시대 선현들의 주옥같은 한시를 바위에 새겨, 이곳을 지나면서 감상할 수 있는 여유를 갖도록 하였다.

▲ 문경새재길 시 바위    

조선의 문학가인 김만중(1637~1692)의 '새재(鳥嶺)',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의 ‘겨울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 문신인 이언적(1491~1553)의 ’새재에서 아우에게‘, 문신인 소세양(1486~1562)의 ’새재‘, 조선 중기의 문신 임억령(1498~1568)의 ’새재에서 이별하며 주다”, 문신인 박승임(1517~1586)의 “새재에서”, 학자인 조임도(1585~1664)의 “새재 길에서 문득 노래하다.”, 학자인 이황(1501~1579)의  “새재로 가는 길” 등의 시가 있다.

▲ 문경새재길 소나무    

시 밭을 지나면 많은 아름드리 소나무에 ‘V’ 모양의 상처가 있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하면서도 버티고 서있는 소나무는 과거의 아픔을 품고 있을 것이다. 이 상처는 일제 말기(1934~1945)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 동원하여, 전쟁물자인 송유탄을 만들기 위해 송진을 채취한 자국이다. 잊을 수 없는 역사의 아픈 흔적을 소나무는 그대로 몸에 지닌 체 그들이 볼 수 있게 해 반성할 기회를 주고 있다.

소나무 숲을 지나 걷다 보면 ‘문경새재 아리랑비’가 있다. 이곳에는 쉼터도 있고 아리랑을 불러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문경새재아리랑은 문경지역에서 구비 전승되고 있는 민요이다.

‘문경새재아리랑’
“문경새재 물 박달나무/홍두깨 방아이로 다 나간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큰아기 손질에 놀아난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문경 새재 넘어 갈 제/굽이야 굽이야 눈물 난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새재아리랑을 최초로 서양 악보에 채보하여 세상에 알리게 한 사람은 호머 헐버트(1863~1949)이다. 이 악보에 ‘문경새재 물 박달나무/홍두깨 방아이로 다 나간다“라는 사설이 영문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는 미국인 선교사이자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1886년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1889년)를 저술하였고, 을사늑약을 저지하고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는 특사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 문경새재길 바위굴    

아리랑 비를 지나면 작은 계곡 건너편 숲속에 바위굴이 나타난다. ‘바위굴과 새재우‘라 부르는 이 바위굴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소낙비를 피해 바위굴로 뛰어 들어가 비를 피할 수 있는 넓은 굴이다. 옛날 새재를 오르고 있는 남녀가 비를 피해 저 굴로 들어갔는데 깊은 정을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 남자는 떠나가고 처녀는 아비 없이 아이를 낳아 기르다가 아이가 성장하자 자초지종을 아이한테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아이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아비를 찾아 나섰다가 산중 주막에서 선비를 만났는데, 그때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새재우 같다“고 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아이는 ”새재우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는데, 이야기의 내용이 어머니와 같았다. 두 사람은 부자의 연을 확인하고 그 후 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지금도 청춘남녀가 이곳에 들어가면 사랑과 인연이 깊어져 평생을 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 문경새재길 귀틀집    

바위굴을 지나면 귀틀집 한 채가 있다. 위에서 보면 ’井‘자 모양으로 통나무를 사방으로 엮어서 지은 집이다. 귀틀집은 주로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산림이 풍부한 지역에서 볼 수 있으며, 남부지역에서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소백산맥 일부 지역과 울릉도에서 지어졌다. 새재의 귀틀집은 벽만 귀틀을 짜고 지붕은 짚으로 이었다. 이곳의 귀틀집은 1970년대 말까지 화전민의 귀틀집이 주흘산 등산로변에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이곳에 귀틀집을 전시용으로 마련하였다.

조령관 방향으로 계속 걷다 보면 계곡은 점점 좁아지고 흐르는 물도 점점 줄어든다. 주변의 계곡에서 모여드는 물줄기도 가느다란 실개천으로 흐르고 있다. 조령산 줄기와 숲에 가려져 새색시의 수줍은 듯한 모습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겨울이면 빙폭이 되어 장관을 이루는 폭포를 색시폭포라 일컫는다. 한발 뒤 물러 서서 보면 3단의 큰 폭포와 여러 단의 작은 폭포로 어우러져 흐르는 물줄기이다. 정상에는 평평한 구릉이고 양쪽에는 큰 암벽이 병풍처럼 둘려 있다. 그 끝에는 자그마한 동혈이 있고, 건너 쪽에는 또 하나의 바위가 마주 보고 있다.

다시 길은 소나무가 터널을 이룬 숲속을 지난다. 경사진 길가에는 나무뿌리가 덩그러니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래도 소나무는 몇 가닥의 뿌리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픈 상처를 그대로 몸에 담은 소나무를 지켜보면 일제의 잔악성이 가슴에 와 닿게 된다.

▲ 문경새재길 초점 낙동강 발원지    

낙동강 발원지에 이르면 둥근 바위에 ‘문경 초점 낙동강 발원지’ 표지석을 만난다. 낙동강 발원지라 하면 강원도 태백의 ’황지못’을 일컫는데, 이곳에 또 하나의 낙동강 발원지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낙동강 발원지로 태백의 황지못과 영주 순흥, 문경의 초점이 소개되고 있다. 3곳의 물줄기가 상주에서 만나 낙동강을 이루게 된다.  자연석으로 둥글게 못을 만들고 그곳에 물이 고이면 좁은 개울을 따라 상주로 떠난다. 이곳 문경 초점은 문경새재의 옛 지명으로서 낙동강과 한강의 분수령이며, 낙동강의 역사적 발원지로서 의미가 있는 곳이다.

발원지를 지나 조령산성 동암문과 북암문이 소개된 안내판 주변에는 잠시 쉬었다 가는 쉼터가 있다. 조령산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조선 후기 국방상의 요충지로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산성이라고 하였다. 암문은 평소에 닫아 두었다가 유사시 성내에 필요한 물자를 운반하고 구원 요청 및 기습용 비상구로 사용되는 곳이다. 동암문은 관음리를 지나 예천과 단양 쪽으로 탄향봉수와 하늘재로 연결하고, 북암문은 미륵리를 지나 충주, 제천 쪽으로 3관문, 깃대봉, 조령산으로 연결된다.

▲ 문경새재길 소원성취탑    

낙동강 발원지를 지나 소원성취탑에 이른다. 백두대간이 이어지는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마패봉, 동쪽으로는 시루봉, 향로봉, 촛대봉, 신선봉과 어우러져 있다. 이 소원탑을 책바위라고도 부른다. 오래전 어느 부잣집에 자식이 없어 어렵게 아들을 얻었는데 몸이 허약했다. 이에 어머니가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하여 이름난 도인을 찾았다. 도인은 집터를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직접 담을 헐게 하여 그 돌을 문경새재 책바위에 쌓아놓고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라고 하였다. 이 말에 따르자 아들은 어느새 몸이 건강해지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장원급제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조선 시대 과거 길에 오르던 선비들도 이 책바위 앞에서 장원급제를 빌었다고 전해진다.

▲ 문경새재길 조령비    

전나무 숲을 지나면 문경새재의 마지막 관문인 조령관이 한양길을 가리킨다.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길을 넘나들 때 갈증을 해소 시켜주던 역사 속의 명약수인 조령약수가 지금도 길손의 목마름을 해소하고 있다. 예부터 이 물을 즐겨 마시면 장수한다고 하여 백수령천(百壽靈泉)이라고 하였다. 조령관을 나서기 전 소나무 아래 쉼터에서 조선 초기 영조 때의 학자 김성탁(1684~1747)의  ’조령관에 올라‘라는 시와 조선 중기 문신인 정희량(1469~1502)의 ’새재에 올라(登鳥嶺)‘의 시를 읊어보는 여유를 가져보면 선조들의 감흥과 애환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 되고, 새재를 걷는 것이 매우 깊은 감동과 울림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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