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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중기 석탑의 멋 백제계 ‘월남사지 삼층석탑’

  • 기사입력 2019.11.05 21:14
  • 기자명 정진해(문화재 전문위원)

문화재 :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보물 제298호),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보물 제313호) 
소재지 :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1길 100 (월남리), 월남사 

절터(寺地)란 법등이 끊긴 사찰의 터를 일컫는다. 신행 활동이 지속되다가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중지되면서 그와 관련된 건조물 등이 사라지고 흔적만 남게 된 공간이다. 사지는 ‘절이 있었던 터’라는 유형의 의미와 역사, 문화, 사상, 신앙이 함께 담겨 있는 물질적이고 정신적 산물이다.

▲ 강진 월남사지    © 정진해

약 1700년 동안 불교는 종교적 신앙 체계의 기능을 뛰어넘어 우리 문화의 큰 축이 되고 있다. 사지에는 연화대, 석탑, 석등, 사적비, 고승 비, 승탑 등 다양한 유형물이 공존하고 있으며, 지표면을 걷어내면 당시 사용하였던 수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있다. 그래서 사지는 그 지하에 수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문화 부존자원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각종 역사적 사건이 직접 발생했던 장소였다는 점이나 설화 등 구비문학을 포함하여 국민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민속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복합역사문화유적에 해당한다. 또한 음악, 무용, 의식, 기술 등 무형문화재가 집약되어 있다는 점, 명승지에 해당할 정도로 유적의 범위 및 입지환경이 다양하다는 점 등도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 볼 수 있는 요소이다.

사찰이 터로 남게 된 원인은 다양하다.

먼저 전쟁으로 인해 폐사되었다. 경주의 황룡사가 폐사된 것은 고려 시대 몽고의 침입이 원인이었고,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남원 만복사가 폐사되었다. 6.25 한국전쟁으로 금강산 유점사와 장안사. 신계사가 소실되었다.

둘째는 국가이념의 변화 등 내부적인 요인을 들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선교 통합이나 도성 내 사찰 해체 등을 들 수 있는데, 기존 왕조의 사상적 이념을 부정했던 내부적 요인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조선 후기 자행된 관원과 유생들에 의한 정신적·경제적 수탈도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인재 및 자연재해로 인한 폐사를 들 수 있다. 사람의 실수로 인해 사찰의 모두 불타버리거나 폭우 또는 자연 발생의 산불 등으로 폐사되는 등의 원인을 들 수 있다.

▲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 정진해

강진의 월남마을 중심에 자리 잡은 월남사지도 어떤 이유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도 그 자리에는 사찰이 있었음을 대변하는 석탑이 남아 있고 진각국사비가 남아 있다. 창건을 밝히는 확실한 문헌은 전해오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지지류(地誌類)에 의하면 ‘고려승 진각초창 유이규보비(高麗僧眞覺初創有李奎報碑)’라 하여 송광사 제2세인 진각국사(眞覺國師, 1178∼1234)가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폐사지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의 규모나 양식으로 보면 그 이전일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폐사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이 일대의 절이 정유재란 당사 병화로 소실되고 ‘무위사’만 남아 있다는 「무위사사적(無爲寺事蹟)」의 기록이 있어 월남사도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임백호집(林白湖集)』권1 「과월남사유지(過月南寺遺址)」(16세기), 『고산유고(孤山遺稿)』권1 「남귀기행(南歸記行)」신해조(1611년), 이하곤의 『남유록(南遊錄)』1722년 12월 27일조의 관련 내용을 보면 이후 탑과 비만이 남겨져 명맥을 유지하다 18세기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월출산 남쪽 평지에 위치한 폐사지 내는 현재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그 중심부에 남아 있는 폐사 진에는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건물의 기단부와 초석이 남아 있어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가람배치를 짐작해보면 전체적으로 완만한 경사지를 4개의 단으로 나누고 그 단부에 축대를 쌓아 점차 오르면서 각각의 단에 평평한 대지를 조성하여 건물을 배치했다.

좌·우측에는 5개의 단을 두어 각각의 단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축선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건물과 다르게 배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지의 전체 규모는 외곽 담장의 흔적이 남아 있어 알 수 있다. 동서 방향의 전면의 길이는 175m에 이르고, 남북방향인 측면은 185m로 총면적은 1만여 평에 이른다.

▲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상륜부    © 정진해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양쪽 편으로 백제계 모전 석탑인 삼층석탑과 진각국사 혜심(慧諶)의 비가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삼층석탑 서측 민가 장독대에서 또 다른 석탑의 지붕돌이 발견되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원래 월광사지에는 두 기의 석탑이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는데, 이것이 두 기의 석탑 중 또 하나의 석탑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수습된 지붕돌이 백제 양식의 석탑재가 아닌 신라계의 석탑 양식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한 절터에서 백제계와 신라계가 함께 배치되었다는 것은 더 구체적인 조사가 있어야 할 것 같다.

▲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지붕돌과 2층 몸돌   © 정진해

신라의 석탑과 백제의 석탑은 완전히 다르다. 미감이 다르고, 결구가 다르고, 체감이 다르다. 백제계 석탑이 신라계 석탑의 원초적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찾기 힘들다. 백제의 미를 ‘선의 우아함’에 둔다면 신라의 미는 ‘균형 잡힌 비례와 안정된 구조’에 둔다. 백제 양식의 모전 석탑 양식을 띠고 있는 3층 석탑은 과거 법당이 있던 정면에 있다.

탑 주위에는 측면과 윗면은 다듬어져 있으나 내부는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지대석과 기단 하대석은 두꺼운 대형 판석 하나로 이루어져 졌고 위에는 기단 면석이 놓이는 곳에 낮은 턱을 마련하였다. 이 턱에 여러 돌로 이루어진 면석을 받고 있으며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기단 갑석은 다소 얇은 편평한 판석을 여러 개 결구하였다. 하대석도 갑석과 같이 거의 동일한 폭으로 결구하였다. 윗면에는 낮은 턱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기단부와 1층 몸돌   © 정진해
▲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지대석과 기단부     © 정진해

탑신부는 2층까지 판석형 부재를 쌓고 모서리 한쪽은 다른 면의 측면이 우주로 표현되고 다른 쪽은 우주를 모각하는 방식을 취했다. 2층은 이러한 짜임이 4매로 이루어져 좀 더 규칙적이다. 3층은 한 돌로 조성되었다. 지붕돌과 함께 일정한 체감을 보여주나, 초층 탑신부의 높이는 2, 3층 탑신부의 감축률이 낮아 길어 보인다.

특히 2층 탑신의 경우도 모본이 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에서 비롯한 일반형 석탑들의 급격한 변화보다는 높은 편이며, 3층은 2층과 거의 동일하다. 지붕돌은 1, 2층 받침이 호(弧), 모를 죽인 직각, 호로 이루어진 3단으로 각 단은 두껍고 여러 개의 부재로 결구되어 있다. 3층은 각, 호로 이루어진 2단으로 되어 있다. 위로는 하부 층급과 대칭된 크기와 모습으로 3단의 층급이 마련되어 상층 옥신을 받고 있다.

역시 여러 부재로 구성되었으며 3층 옥개석은 2층으로 조성되었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로 추정되는 부재가 남아 있으며, 노반은 우주가 표현된 몸체와 하부를 지붕 형식으로 다듬은 갑석 부분이 별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위로 일반적인 복발과 보상화문이 새겨진 앙화가 놓여 있다.

▲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진각국사비 귀부 머리-1   © 정진해

이러한 형태의 백제계 모전 석탑은 목조 건축과 같이 초층 지붕돌 폭이 기단보다 넓은 점, 공포 구조를 간략히 표현한 듯한 호, 각, 호로 중첩된 지붕돌 층단 모습, 기단을 덮는 짧은 추녀와 이에 맞춘 작은 단층 기단과 탑구 등을 지적할 수 있다. 모전 석탑적인 요소는 지붕돌 상, 하층 받침들이 각각 작은 석재로 짜 맞추어져 3단으로 중첩되어 있고, 합각부에서 위로 살짝 들어 올려진 것 외에는 판석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지붕돌 등이다.

▲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진각국사비 귀부머리-2   © 정진해

월남사지 삼층석탑의 주요한 양식적 특징은 고려 시대에 조성된 백제계의 석탑임을 알려 준다. 모전 석탑에서 떨어진 곳에는 비각 내에 월남사를 창건한 고려 중기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마을 입구에 세워진 비이다. 비에 새겨진 글씨는 거의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로 누구의 비인지 알 수 없어 한때는 ‘월남사지비’라고 불렀었다. 그 후 조사 결과 ‘진각국사비’로 2002년에 밝혀지게 되었다.

진각국사의 성은 최 씨고 이름은 혜심(慧諶)으로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출가하게 되었다. 출가 후 보조선사 밑에서 수도를 하였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송광사 16 국사 중 제2대 조이다. 고종 21년(1234)에 57세로 입적하였다.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석비는 풍상에 마멸되고 훼손되어 비신 일부와 귀부만 남아있고 이수는 없는 상태이다. 마멸로 인해 전면에는 전혀 판독이 불가능하고 옆면은 비어 있으나 비음에 지금 3.3cm 정도의 글자 30행 600여 자가 남아 있어 당시의 명신 최항(崔沆)의 이름이 확인되며,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 이규보가 지었다고 전한다.

▲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귀부 목   © 정진해

대석과 귀부는 한 돌이며, 귀부는 입에 구슬을 문 상태로 긴 목을 빼 들고 네 발의 발톱이 단단히 짚고 있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등에는 귀갑문이 새겨져 있고 머리, 목 등 세부의 생동감 있는 표현과 전체적인 균형이 잘 어우러져 한층 강렬한 사실적 조각기법을 보인다. 비몸은 원래 매우 컸다고 하나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아랫부분만 남아 있다. 비의 전체 높이 3.58m, 비신 높이 2.6m, 너비 2.3m이다.

발굴에서 드러난 유구가 고려 시대의 건물지와 부속 시설로 확인되었으나 유물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유행한 백제 와당과 평기와를 비롯하여 통일신라 기와류, 고려 시대의 기와류와 다양한 고려청자, 금동 풍탁, 조선 시대의 기와류와 자기류가 일부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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