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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 선생의 예학정신이 담겨 있는 ‘논산 돈암서원’ 2

  • 기사입력 2020.02.22 10:36
  • 기자명 정진해/문화재 전문위원

문화재 : 논산 돈암서원(사적 제383호)
소재지 :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번지 외 5필지

돈암서원 숭례사 삼문  © 정진해

전학후묘의 구조로, 가장 뒤에 있는 숭례사(崇禮祠, 충남유형문화재 제155호)를 들어서기 위해 내삼문을 통해야 한다. 이곳의 내삼문은 각각 독립된 3개의 문이 담장으로 서로 이어져 있다. 내삼문은 지형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바깥쪽에는 잘 다듬은 돌을 3단으로 가지런히 기단을 쌓고 그 위에 3개의 문을 두고 각 문으로 통하는 기단의 앞에는 2단의 계단을 각각 두었다.

가운데 문은 3개의 문중에 가장 높고 정면 1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운데 기둥에 두 짝의 판문을 달고, 판문 위에는 홍살을 설치하였다. 두 짝의 문에는 태극문을 그렸으며 창방과 평방에는 연화초의 단층을 그렸다. 막새를 쓰지 않는 기와지붕을 얹었으며 홑처마로 짜인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좌우의 문은 중앙의 문보다 낮은 협문 형태의 일주문으로 추녀를 받치는 활주를 받쳤다. 우측의 문과 가운데 문 사이에는 ‘博文(박문)’의 글이 수놓아진 담장이 채워지고, 좌측의 문은 ‘約禮(약례)’의 글이 수놓아진 담으로 채웠다. ‘박문약례(博文約禮)’는 ‘널리 학문을 닦아 사리에 밝고 예절을 잘 지키라’는 의미의 내용으로 사계 김장생 선생과 그의 후손들의 예학정신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마찬가지로 높은 기단 위에 세운 사우인 숭례사가 자리한다. 숭례사에는 김장생 선생을 주벽으로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의 위패가 배향되었다. 지형에 따라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잘 다듬은 장대석 4벌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세운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익공양식에 주심포 양식이 가미된 건물로 원형의 주초석과 둥근 기둥을 세웠다. 1고주 5량가 가구로 측면 중 전면 한 칸은 통칸의 퇴칸으로 예전할 수 있도록 하고 두 번째 칸부터 띠살문의 사분합문이 전면 3칸 모두 달렸다.

창방 위에는 장혀를 받치는 화반 형태의 초각반을 올려 장식하였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에 풍판을 달았다. 정면의 칸 칸 문 앞에는 디딤돌을 두었으며, 띠살문은 아래에 궁판을 달았으며 안쪽에 여의두문이 변형된 구름문을 배치하였다. 공포 부분은 모로단청을 하고 창방과 장혀에는 연화문초를 장식하고 기둥의 머리에는 주의로 장식하였다. 또한 초각반은 2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아랫단은 연잎을 덮고 그 위에 당초문이 덮은 위에 파련화 한 송이가 피어 있는 단청으로 장식하였다. 숭례사 기단 좌우에는 계단을 두고 계단 앞에 불을 피우기 위해 설치된 정료대를 두었다.

 숭례사 좌우 앞 배롱나무 © 정진해

숭례사의 건물 좌우 앞에는 배롱나무가 한 그루씩 자라고 있다. 왜 사우에 좌우로 배롱나무를 심었을까 한다. 배롱나무는 조선 시대 선비들이 사랑했다고 기록이 많은데 배롱나무 줄기가 벗겨지고 매끄러워 여인의 나신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양반집 안채에는 심지 않았다. 그러나 청렴을 상징한다고 하여 선비들이 기거하는 앞마당에 많이 심었다고 한다.

사육신 중의 한 분이신 성삼문은 ‘昨夕一花衰(작석일화쇠) 今朝一花開(금조일화개) 相看一百日(상간일백일) 對爾好銜杯(대이호함배)’ “어제저녁 꽃 한 송이 지고, 오늘 아침 꽃 한 송이 피어, 서로 일 백일을 바라보니, 내 네가 좋아 한 잔 하리라”는 시를 남겼다.

우리 선조 선비들은 배롱나무에 깊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었다. 옛 선비들은 살거나 드나들던 곳에는 반드시 배롱나무가 심겨 있었다. 전국 대부분의 서원에는 배롱나무를 빼놓지 않고 심었었다. 안동의 병산서원이나 논산의 명재고택, 강릉의 오죽헌 등에도 오래된 나무를 볼 수 있다.

숭례사의 배롱나무를 보고 있으면, 꽃이 피는 계절에 다시 발걸음을 해야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 또한 전사청과 마주한 담장 옆에는 3가닥의 줄기가 뻗어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배롱나무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아 보이지만, 소나무는 서원이 이곳으로 옮긴 후에 심어 오늘에 이르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나이가 든 소나무이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소나무는 두 가지의 상징성을 지녔다고 하였다. 첫째는 수명이 길어 장생을 상징한다고 했다. 소나무는 십장생 가운데 일하게 등장하는 나무이자 장생의 대표적인 식물이다.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천 년이 지난 소나무는 그 정기가 청우(靑牛)가 되고 복귀(伏龜)가 된다.”고 하였듯이 수명이 오래된 소나무는 신령한 기운을 지녔다고 여겼다.

다음으로 소나무는 사철 푸른 잎을 간직하고 있어 생명력과 절개를 상징한다고 했다.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 “집 주변에 송죽을 심으면 생기가 돌고 속기(俗氣)를 물리칠 수 있다.”라고 한 내용은 이러한 소나무의 상징성을 말해준다. 아울러 추위와 눈보라에도 변함없이 늘 푸른 소나무의 기상이 꿋꿋한 절개와 의지를 나타낸다고 보아 ‘초목의 군자’, ‘송죽과 같은 절개’ 등의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돈암서원 현판  © 정진해

수많은 선비가 소나무를 시의 소재로 읊으면서 그 기상을 본받고자 하였다. 숭례사의 소나무도 군자를 상징하듯 꿋꿋하게 자라고 있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응도당(보물 제1569호)은 고종 17년(1880) 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옛터에 남아 있던 것을 1971년 옮겨 지었다. 다른 서원과는 달리 강학 공간이 전면에 직각 방향으로 틀어서 배치되어 있다. 이곳의 건물배치와 규모는 김장생이 강경 죽립서원을 창건했던 규례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한다. 응도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누마루식 건물로 겹처마와 맞배지붕의 주심포 계통의 건물이다. 박공널 밑에 비바람을 막기 위해 풍판을 설치하고 풍판 아래에는 ‘영(榮)’을 퇴칸처럼 달았다.

현존 강당 건물로는 가장 크고 복잡한 건물로 측면 3칸 중 가장 뒤쪽으로 좌측 1칸, 1칸 반의 크기로 마루방을 꾸미고, 가장 우측 1칸 역시 마루방으로 구획하고 있다. 이건 당시에는 지금처럼 모두 마룻바닥이 아니고 양측에 온돌방이었는데, 지금은 뒷칸 좌우에 벽을 막아 마루방 같이 구성한 이상한 형태를 띠고 있다. 방으로 구획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외부로 개방되어있으며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이다. 그러나 본래는 중앙의 3칸(堂)을 제외한 좌우 협칸은 벽체로 구분된 방이었으며, 두 방을 각각 ‘거경(居敬)’과 ‘정의(精義)’라고 이름하였다.

건물은 낮은 장대석 기단과 원뿔형 초석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매우 높은 지붕을 이룬다. 이와 같은 건축은 고대 예서(禮書)에서 말하는 경·대부·사(卿大夫士)의 가옥인 하옥(廈屋)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다. 김장생은 생전에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저술하면서 고대 중국의 예서에서 전하는 이상적인 전각을 그림과 함께 설명한 바 있는데 사후에 송준길, 송시열 등 그의 제자들이 응도당을 건립하면서 하옥제도에 입각한 평면과 구조를 채택하였다.

그 특징은 평면구성에서 중당(中堂)과 동서상(東西廂), 중당 뒤에 실(室)과 좌우 방(房)과 동서 협실(夾室)을 두는 것이며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에 양 측면에 덧지붕인 ‘영(榮)’을 두는 것이다. 현재 응도당은 내부 바닥 일부 및 창호가 변형되었지만, 기본적인 평면구성이나 영 등이 잘 남아있다.

건물의 측면에는 띠살문을 각각 2짝씩 달았고 우측 1칸을 구획한 방의 벽은 없으며 모두 궁판을 단 띠살문으로 4분합문을 달았다. 앞면의 초각반은 2단으로 구성되고  아랫단은 연잎을 덮고 그 위에 당초문이 덮은 위에 파련화 한 송이가 피어 있게 투각 조각하였으나 뒤쪽의 초각반은 형태만 갖출 뿐 정교하게 연잎이나 파련화를 조각하지 않았다. 건물 좌우 풍판에 단 영은 각각 4개의 팔각의 활주를 세웠고 안쪽으로 대각선으로 버팀목을 세워 초석에 힘을 싣도록 하였다.

건물 정면 5칸의 6개 기둥 앞면과 양쪽 끝기둥의 측면에 하나씩 모두 8개의 주련을 걸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춘축이라 해서 대궐은 물론이고 사대부와 일반민가 및 상점에도 춘련을 붙여 송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복을 위한 춘첩자가 변하여 건물의 품격을 높여주고 이웃과는 수양의 뜻과 멋을 함께 나누는 장식물이 된 것이다. 응도당의 주련은 중국 송나라 난계(蘭溪) 범준(范浚)의 ‘심잠(心箴)’을 적어 주련을 걸었는데 전부를 쓰지 못하고 일부만 적어 걸었다.

茫茫堪輿俯仰無垠 (망망감여부앙무은) 망망한 천지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끝이 없다/人於其間渺然有身 (인어기간묘연유신) 사람이 그 사이에 있어 가물가물하게 몸을 두고 있다/是身之微太倉 米 (시신지미태창제미) 이 몸의 보잘것없음이 태창에 쌓인 한 톨의 쌀이로다/爲參三才曰惟心爾 (위참삼재왈유심이) 삼재에 참여하니 말하기를 오직 마음뿐이라고 한다/往古來今孰無此心 (왕고래금숙무차심) 예로부터 지금까지 누가 이 마음이 없겠느냐마는/心爲形役乃獸乃禽 (심위형역내수내금) 마음이 형체에 사역을 당하니 바로 금수로다/惟口耳目手足動靜 (유구이목수족동정) 오직 입·귀·눈·손·발의 동정이/投間抵隙爲厥心病 (두간저극위궐심병) 사이에 의탁하고 틈에 던지니 그 마음의 병이 된다.

전사청  © 정진해

숭례사 오른쪽에 별도로 안담을 두고 있는 전사청은 경희당 쪽에 삼문이 있고 사당 쪽으로 협문이 달려 있다. 건물은 ‘ㄱ’자형으로 본사 오른쪽에 3칸의 대청을 두고 왼쪽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익사 쪽은 온돌방과 부엌을 두어 제향하는데 필요한 여러 제수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본사는 홑처마의 팔작지붕이고 익사는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측면에 박공널 대신 흰 토벽으로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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