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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사학의 몸통들아, 공개토론장으로 나와라!”

동북아역사재단, 상고사 쟁점 학술대회를 보고

  • 기사입력 2015.12.24 11:30
  • 기자명 민족NGO편집장
[한국NGO신문] 박정학 기자 = 12월 17일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최하는 ‘한국상고사의 쟁점’이라는 학술회의가 홍은동 그랜드 힐튼호텔에서 열렸다.

역기서는 사실상 상고사가 아닌 고대사 쟁점에 대한 제도권 학자와 민족사학자들 간에 토론이 있을 것으로 보도가 되어 상당힌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학술회의 제목이 ‘한국상고사의 쟁점’이었던 점에 비추어 가장 주요 쟁점이 되었어야 할 선사시대 역사 복원방향에 대해서는 박정학 치우학회 회장의 발표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없다’는 언급 외에 일체의 언급이 없었고, 고대사 부분에서 단군사화, 패수,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 제도권 학자 3명과 민족사학자 2명이 발표를 하고, 각 1명이 토론을 했다.

120여명의 방청자들은 동북아역사재단이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는 데 대해 크게 환영했다. 반면, 너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게 역사의병대 등 민족 운동 인사들의 반응이었다. 특히 노태돈, 서영수, 송호정 등 이병도와 이기백 등에 이어 패수와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서울대학 출신들로서 매국사학의 몸통들이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은 데 대한 불만이 컸으며, 제도권 학자들의 별 논리도 안 되는 내용으로 길게 설명하는 데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말이 짧다. 논리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며 그 수준이 한심하다는 중론이었다.

진지한 토론을 하는 자리 대환영


▲ 축사하는 이종찬 ⓒ 민족NGO편집장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환영사를 통해 “논쟁이 많은 상고사의 올바른 연구를 위해서는 서로 한 자리에 모여 각자의 의견을 나누는 진지한 학술적 토론의 과정이 필요하다. 앞으로도 이런 자리를 만들겠다.”고 새해에도 이런 토론의 자리가 이어질 것을 예고했다. 그러나 과연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매국사학의 몸통들을 불러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처음으로 축사를 한 이종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은 ‘통일을 앞두고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강한 자긍심과 역사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에 찬성한다’면서 “선열들이 독립을 위해 내세웠던 역사인식을 그대로 적용해야 마땅한데, 그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부족한 역사관 때문에 몇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그런 역사관에 대한 국민들의 질타를 바탕으로 되짚어보면서 오늘과 같은 의미 있는 모임을 대환영한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我朝鮮舊疆不戰自歷(우리 조선의 땅이 전쟁이 아닌 못난 선비들의 역사의식으로 스스로 줄어들었다)’는 의 말처럼 다시는 이런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자.”고 호소했다.

국회 동북아역사왜곡특위 위원인 새누리당 경기 이천 지역의 유승우, 전국구 최봉홍 두 의원도 축사를 통해 ‘그간 동북아역사재단의 잘못들을 이런 행사를 통해 씻어내라’고 주문했으며, 특히 유 의원은 마지막까지 남아 토론내용을 경청하고 마무리 식사 자리에까지 참석하여 민족사학자들이 더욱 연구를 강화하여 우리 역사가 제대로 복원되기를 당부하여 참석자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신화라고 해도 ‘단군신화’여서는 안 된다!

첫 발표에 나선 인하대학 서영대 교수는 ‘단군, 신화인가? 역사인가?’를 통해 “단군신화라는 말이 일본인들에 의해 조작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을 확인해본 결과 일본인들은 1930년대까지 ‘단군전설’ 등 전설이란 용어를 사용했으며, 처음 이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신화라는 말은 허구라는 뜻이 아니라 긴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와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므로 ‘단군신화냐 아니냐’는 소모적 논란을 중단하고 신화에 반영된 역사적 사실을 탐구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 교과서 선사시대 역사의 문제점 ⓒ 민족NGO편집장

이에 대해 두 번째 발표를 한 이도상 한배달 학술원장이 “문제는 일본인들이 말한 신화라는 의미와 역사적인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발표자의 말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단군의 건국을 신화로 몰아간 것은 단군조선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의 단군신화라는 용어 대신 단군사화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반박을 했으며, 이에 대해 서영대 교수도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역사의병대 박정학 총참모장은 “일본인들이 처음 만들었든 아니든 간에 우리나라 고대 국가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데 활용되었던 용어라면 그 말을 우리가 계속 사용해야 할 이유는 없다. 특히 신화적 요소는 ‘단군’ 부분이 아니라 환인-환웅 부분에 있으므로 신화라고 하더라도 환인신화라고 하는 게 적절하지 ‘단군신화’라는 말은 쓰지 않는 게 좋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환웅까지는 신화, 단군 부분은 역사, 단군이 1908세를 살고 산신이 되었다는 부분은 설화’라고 한다. 신화라고 해도 단군신화는 아니다.”면서 용어상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짚었다.

고대 한중 국경선 패수는 난하다

두 번째 발표자 이도상 원장은 “조선총독부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한중 국경선인 패수를 한반도로 끌어들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야 기자국, 위만국, 한사군을 남북한 지역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에 윤내현 교수가 구체적 사료를 근거로 ‘패수는 한반도가 아닌 중국 하북성의 난하’임을 밝혔는데 아직도 우리 국내학자들에 의해 패수=청천강 등 조선총독부 학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문제다. 우리 사료에서는 찾기 어렵지만, 중국 사료에 근거가 많다.”

“『수경』과 『설문해자』에는 ‘패수는 낙랑 루방현을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루방현은 난하 유역에 있고,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은 한반도 지역이 아닌 중국 발해 연안에서 찾아야 한다.”

“『회남자』에 ‘요수는 갈석산을 나와 요새의 북에서 동으로 흘러 곧바로 바다로 들어간다’고 되어 있는데 이 조건에 맞는 강은 난하밖에 없다. 특히 『염철론』에서 ‘연나라는 갈석산을 국경의 요새로 삼고 사곡에 의해 끊기었으며 요수에 의해 둘러싸였다’고 하여 갈석산 지역을 요동으로 보았으니 이 요동은 지금의 요동과 다른 고대 요동이다.”

“현 교과서에서는 ‘위만이 고대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워 고대조선을 승계했다’고 하는데 이는 기자와 위만이 고대조선의 법통을 이은 것으로 위장시킨 매우 잘못된 역사인식이다. 특히 『위략(魏略)』(『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한전의 주석)에 ‘노관이 한나라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들어감에 이르러 연인 이만이 망명을 하였는데…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가서 항복하고 준을 설득하여 서족 경계에 살게 해주기를 요구하면서 중국망명객들을 모아 조선의 울타리가 되겠다고 하였다’는 기록에서도 위만이 건넌 패수가 동에서 서로 흐르는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이 아님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상으로 중국의 여러 기록상으로 패수는 한반도가 아닌 중국 하북성에 있는 난하임이 분명하므로 이를 교과서에 반영하고, 패수 및 조선과 관련된 기자-위만-한사군이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고대조선의 서쪽 변방이었던 난하 유역에 있었다고 기록하며, 이들은 고대조선의 법통과 무관함을 분명히 기술하여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세 번째 발표자였던 공석구와 마지막 종합토론에 나온 윤용구는 ‘패수가 한반도에 있어야 한다는 사료는 하나도 대지 않은 채, 중국 사료가 본문이 아닌 주석이므로 그대로 민들 수 없다’ ‘이는 윤내현의 주장이고 윤내현은 북한 리지린의 주장을 이은 것인데 이 설이 성립되기는 쉽지 않다’면서 중언부언하며 긴 시간 설명했으나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대학 교수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반응이었다.

연ㆍ진 장성의 동단을 평양까지 그린 것은 우리 주장 반영?

세 번째 발표는 한밭대학 공석구 교수의 ‘연ㆍ진 장성의 동단과 관련된 논의’로서 미의회조사국에서 발간한 조사보고서에 담긴 중국 고대 왕조의 장성이 한반도 중북부 지역가지 연결되어 있는 데 대한 반론 제기였다.

공 교수는 중국에서 이런 지도가 나오게 된 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하면서 『중국역사지도집』은 1954년부터 시작되었으나 문화대혁명 등으로 지연되다가 1975년부터 발간되기 시작하였다가 논란이 생겨 보완한 후 1982년부터 공식 간행되었는데, 그 중 연 장성과 진 장성 지도의 동단을 한반도의 청천강(연 장성), 대동강(진 장성) 입구까지 그려놓은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 중국역사지도집의 장성지도(좌-연 장성, 우-진 장성) ⓒ 민족NGO편집장

그는 이 지도가 나오게 된 중국학계의 연구 동정을 장황하게 설명한 후, 이와 관련된 문헌사료들을 분석하면서 『태강지리지』의 秦築長成起自碣石와 樂浪遂城縣有碣石山이라는 기록이 『晉書』 지리지에 와서 ‘갈석’을 배제하고 ‘遂城秦築長成之所起’라 기술한 것임을 적시하고 ‘연ㆍ진 장성의 동단이 한반도 평양지역까지 이어진다는 중국 학계의 통설이 틀렸다’면서 장성의 동단은 갈석산이 소재한 요서지역(연 요녕성 진황도시 서쪽 지역)에 소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해 이덕일은 ‘중국의 많은 학자들은 이미 장성의 동단을 한반도까지 가져다놓은 것은 잘못이라는 연구를 해왔는데 그들의 얘기가 한 마디도 없어서 중국의 통설처럼 보이게 했다’고 지적하면서, ‘미의회 조사국의 지도는 작년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보낸 당시의 국경선 지도와도 관련이 있으므로 사실상 우리 제도권 사학계의 책임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며 일침을 놓았다.

오전에는 이렇게 발표를 마치고 오후1시 30분부터 오후 발표가 이어졌다.

왕검성과 낙랑군 조선현은 하북성에 있었다

오후 첫 발표는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의 ‘위만조선의 왕검성과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였다. 이 소장은 동북아역사재단의 2009년 홈페이지의 “위만조선은 그 왕성인 왕험성이 현재의 평양시 대동강 북안에 있었는데, 이는 위만조선과 한의 경계 역할을 한 패수가 지금의 압록강이라는 점,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는 점, 왕험성 및 조선현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열수(列水)가 지금의 대동강으로 비정되고 있다든지 하는 점을 통해서 입증된다.”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일본인 이나바 이와기치 등 식민사학자들은 패수를 대동강으로 보고 『사기』 조선열전 등에 ‘위만이 패수를 건너 왕험성에 도읍했다’고 했으므로 조선현을 대동강 남쪽에 갖다 놓은 것인데, 지금 제도권에서는 패수를 압록강이나 청천강으로 보면서도 식민사학의 이유 없이 일본인을 따라 위만조선의 왕험성은 대동강 북쪽의 평양, 낙량랑 치소인 조선현은 대동강 남쪽의 토성동으로 나누어 보고 있음을 지적하고, 실제의 왕검성과 조선현은 하북성에 있음을 사료를 들어 구체적으로 밝혔다.


▲ 오후 발표조 자체 토론회 ⓒ 민족NGO편집장

이에 대해 윤용구는 토론을 통해 이덕일이 인용한 『사기 색은』이 ‘원래의 원 주석과 달라졌기에 믿기 어려운 내용이라는 것을 길게 설명하고, 이런 설명은 사실과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는 지적을 했다. 명확하게 오류라고도 지적하지 않고, 그들이 얘기하는 낙랑군이 평양이라는 사료는 제시하지 않았다. 이런 내용을 설명하는 데 매우 긴 시간을 중언부언한 데 대해 참석자들은 매우 지루해했다.

낙랑토성이 낙량군의 치소였다는 증거는 없다!

오후 두 번째 발표자는 낙랑군의 위치 비정 문제와 관련되는 유적으로서 현장을 점검한 영남대학 정인성 교수로서 ‘토성리토성(낙랑토성)의 발굴조사와 출토유물의 성격’에 대해 발표를 했다.

정 교수는 “일본인들이 한 것이라고 무조건 허위나 왜곡된 것이라는 선입견 없이 고고학적으로 접근해본 것이다. 이 토성에 대한 발굴은 일본이 1921년에 굴착을 시작하여 1935, 1937년에야 정식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쿄대학 문학부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발굴보고가 지연되다가 1964년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북한에서는 광복 후 일본인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1968년 조사해본 결과 일본인이 제시했던 유물(봉니 등) 들이 사실과 다르다는 등 발굴조사 결과를 공개되지 않고, 일제강점기의 조사연구 성과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비난하는 일색으로 흘렀다.”

“1999년 일본이 가져갔으나 밀봉을 뜯지도 않은 채 있는 유물 등 많은 유물을 접해서 정리했는데, 토기, 기와와 벽동, 청동기, 철기, 유리, 석제 및 골각기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중국식으로 이해했던 청동기들이 토성리토성에서 직접 생산했음도 알았다. 이곳에서 발견된 철기에는 전한 초기나 그 이전으로 소급되는 자료가 없고 연나라 계통의 철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토성 내부에서 출토된 다수의 맷돌, 변소 유구, 우물 등은 중원지역과 대부분 흡사했으며 무기고나 수공업생산 공방도 중원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재 이 지역은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는 등 추가 발굴이 어렵게 되어 1930년대 일본이 발굴하여 가져간 유물을 분석할 수밖에 없어져 안타깝다.”

“이상의 고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낙랑군 평양설을 지지하지만, 그렇다고 위만조선을 포함한 고조선의 강역과 왕검성이 평양이라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토성리성과 그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분명히 군현 설치 이전으로 소급되는 자료가 있고, 왕검성을 증명할 고고자료는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토성리에서도 왕검성을 시사하는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앞으로 선입견 없이 이 주변의 고고학 발굴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할 것 같다.”

이에 대해 이덕일은 “이미 북한에서도 봉니 등 일본인들에 제시했던 자료들이 가짜라는 것을 밝힌 것으로 알며, 손보기 교수도 이미 80년대에 점제현비가 가짜라는 것을 말했으며 북한에서도 여기에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인들이 제시한 자료들을 무조건 안 믿는 것도 문제지만 무조건 믿는 것도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이병도도 말했지만, 고대사와 관련해서는 1차적으로 사료가 중요하고 고고학 발굴성과는 그것을 보완하는 자료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사료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다보니 이 지역 유적을 발굴한 것처럼 꾸민 부분도 무시할 수 없다. 대부분 우연히 발견하였다는데, 어떻게 그 동안 전혀 보이지 않던 유물이 갑자기 그렇게도 많이, 우연히 그 사람 눈에만 보였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것을 믿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질문을 했다.


▲ 방청석 동정 ⓒ 민족NGO편집장

정인성도 “나는 아직 그대로 믿지도 않고 학문적인 방법으로 재검토를 하고 있다. 점제현비도 손보기의 말이 다 맞지 않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고 진실이라고 밝힐 자료도 아직은 없다. 역사에서는 당연히 사료가 우선이지만 사료로서 논쟁이 생겼을 경우에는 이를 뒷받침할 자료로서 고고학 발굴 성과도 활용가치는 있다고 본다. 앞으로 더 종합적인 연구가 되어야 한다.”면서 결론을 맺었다. 결국 토성리토성이 낙랑군 치소였다는 결론은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민족저력의 뿌리 상고사를 제대로 복원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치우학회 회장 박정학이 ‘민족 저력의 뿌리 상고사 복원 방향’을 발표했다. 박 회장은 “우리 겨레가 지난 세기에 35년간의 일본식민 탄압을 받고, 6.25를 겪고는 세계 최하위의 경제국으로 전락하여 ‘회복 불가’라는 평을 받았으나 반세기만에 아시안게임, 올림픽, 월드컵, G20정상회의 등을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어 수많은 나라를 지원하고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저력을 국사에서 가르쳐야 하는데 현재의 교과서에서는 모두 누락되어 있다. 인류가 지구상에 태어난 후 99.9% 기간의 생활경험의 축약인 민족창세신화를 복원하여 교과서에 실어야 한다. 바로 민족 저력이 나오는 겨레 얼의 원형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라는 말은 없애고 단군사화라고 해야 하며, 삼국유사의 내용을 믿는다면, 홍익인간도 단군이 아닌 환웅의 건국이념으로 바로잡아야 하며, 환국과 신시도 살려야 하며, 치우천왕 역사도 복원하고 청동기 시대 편년도 수정해야 한다. 그 외에도 선사시대 구분을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로 구분하는 것은 그 후에 오는 국가사회나 씨족사회, 부족사회 등과도 연결이 되지 않으므로 서비스의 인류사회 발전단계설을 우리나라에 적용하여 무리사회, 마을사회, 고을나라, 국가사회 등으로 구분해야 한다.”

“경쟁과 투쟁으로 극단적 양극화가 되어 많은 나라가 부도위기에 빠진 현 세계를 구원하고 다가오는 통일조국과 인류사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할 우리 젊은이들에게 ‘어울림’이라고 하는 커다란 민족저력의 뿌리를 가르쳐주는 역사로 복원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의 제기는 물론 누구도 한 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 종합토론회 장면 ⓒ 민족NGO편집장



“매국사학의 몸통들아 공개토론회에 나와라!”

이렇게 모든 행사가 끝나고 주요 참석자들이 식사를 같이 했으며, 역사의병대는 다음날 모임에서 이날 행사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왔다.

첫째는 소위 식민사학자들이라고 비난 받는 매국사학의 몸통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 공개토론회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단정지었다. 원래 이 학술회의 초기 계획에는 교원대학의 송호정 교수가 참석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학생들을 인솔해서 해외에 가야 하니 못 나온다고 입장을 바꾸어 불참했다. 그래서 한사군이나 패수 위치 비정에 대해 조성총독부 사학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서영수 단국대 초빙교수나 노태돈 서울대 국사학 교수가 나오도록 섭외해 달라고 당부했으나 ‘일이 너무 바쁘다’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학생들과 해외에 나가는 것이 그렇게 갑자기 결정되는 일이 아니므로 핑계에 불과하며,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자신이 없으니 대신 매를 맞아도 될 만한 젊은 학자들을 총알받이를 내세우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중론이었다.

둘째는, 총알받이로 나온 젊은 제도권 학자들의 논리가 너무 편협되었고, 토론에서도 핵심을 간략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중언부언하면서 시간을 길게 끌고 가는 것으로 봐서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이 아니라서 이것저것 갖다 붙이려다보니 그런 것 같다는 데 이의가 없었다.

셋째, 동북아역사재단이 큰 수고를 했지만, 이런 식의 토론이라면 바른 역사 복원에 도움이 되지 않고 그냥 이런 행사를 했다는 자체 만족감이나 대외적인 시위 효과밖에 없다. 이슈가 되는 주제별로 구체적인 사료를 가장 우선적으로 제시하면서 토론을 해야 자료도 축적이 되고 바른 역사의 복원도 이루어질 수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에 이런 의견을 꼭 전달하고, 정부에도 공식 문서로 청원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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