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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 숨결 남아있는'석파정(石坡亭)'

국왕이 거처한 곳을 신하가 감히 거처할 수 없다. 석파정(石坡亭)

  • 기사입력 2015.12.26 04:20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 전문위원
문화재 : 석파정(石坡亭)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6호)
소재지 : 서울 종로구 부암동 산16-1, 201


[한국NGO신문] 정진해 문화재 전문위원 = 창의문을 나서면 부암동일대는 북한산이 앞을 막고 그 사이로 빼곡히 들어선 높고 낮은 현대식 건물이 서로 어깨를 비집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옛날 부암동일대는 경치가 아름다워 고관들의 별장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 무계정사와 석파정, 부암동계곡의 이항복 별장 등이 현재 알려져 있으며 가까운 세검정의 아름다운 풍경도 한몫을 했다고 전해진다.


▲ 행랑채와 감나무 © 정진해

옛 정자 중 석파정은 오랫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문화재였다. 북악산으로 뻗어 있는 도성을 따라 오르며 뒤를 돌아 석파정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석파정 앞에는 채석장이 있어서 그 일부가 깎아나간 자리에 서울미술관이 들어서면서 일대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 되었다. 서울미술관과 함께 세워진 대문에는 삼계동(三溪洞)의 편액이 걸려 있으나 굳게 잠겨 있다. 대문은 출입의 문이 아니고 장식의 문이다. 대문으로 출입할 수 없고 서울미술관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었다. 문을 열고 밖을 나서는 순간 앞에는 자연의 숨소리가 느끼는 듯하다.

석파정은 철종과 고종 연간에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의 별서 이었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집권하면서 몰수하여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곳은 수려한 자연 산수와 계곡을 배경으로 거대한 바위와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아 도성의 경승지로 꼽혔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 소수운련암 각자 © 정진해

황현의 <매천야록> 권1에 의하면, 고종이 즉위하자 김흥근은 흥선 대원군이 정치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곧 대권을 손에 넣은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삼계동에 있는 김흥근의 별장이 한성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이었다고 알려졌다. 어느 날 흥선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 것을 간청하였으나 김흥근은 팔려고 하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에게 하루만 빌려 놀게 해달라고 하였다. 옛 풍습에 따라 정원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빌려주지 않을 수 없어 김흥근이 억지 승낙하였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행차하도록 권하고 자신도 따라갔다. 그 후 국왕이 거처한 곳을 신하가 감히 거처할 수 없다고 하여 김흥근이 삼계동 별장에 가지 못하게 되자 결국 이 별장은 운현궁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후손인 이희(李熹), 이준(李埈), 이우(李鍝)의 별장으로 세습되며 사용되어오다가 6·25 전쟁 후에는 천주교가 경영하는 코롬바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망원정터에서 본 석파정 전경 © 정진해

미술관에서 석파정 입구를 들어서면 왼편에 인왕산 기차바위의 자연 암석을 타고 흐르는 계곡이 있다. 암반의 절개면에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 물 속에 깃들여 있으면서 구름으로 발을 친 암자)'이라고 쓴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위쪽으로 오르면 석파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아서 넓은 암반위로 흘러내리면 그 물은 어느 길을 따라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실오라기 같은 개울은 가뭄으로 인해 물줄기를 거두어 들였다. 물이 흐르지 않는 개울은 개울이 아니다. 산이 만든 계곡이다.

계곡도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고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이 있다.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에는 물이 숨바꼭질을 한다. 언젠가는 물이 흐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라는 예측도 있다. 석파정의 계곡은 가뭄으로 물의 자취를 감추었다. 비가 내리면 빗물과 함께 계곡의 물이 넘쳐날 것이다. 처음부터 계곡에 물이 없었더라면 이곳에 작은 정자인 석파정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물길을 따라 걷는 길은 ‘물을 품은 길‘이라 명명 하였다. 개울에서 남쪽에 있는 언덕 같은 곳에 가느다란 오솔길이 나 있다. 물의 흐름 따라 밟고 밟힌 오솔길에는 누군가에 의해 싸리비로 낙엽을 쓸었다.


▲ 사랑채 © 정진해


별서를 둘러보고 물을 품은 길을 걷는다. 억새풀이 가을 색으로 살아있다. 하얗게 피어나는 억새의 꽃은 가을을 떠나 겨울에도 가을을 남기려한다. 그 위에 높은 가지에 홍시는 까치밥으로는 너무 많이 달려있다. 빨갛게 익은 홍시는 곧 떨어질듯 하지만 겨울이 왔음에도 나무에 매달려 농익어 가고 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홍시는 조금씩 까치와 작은 새들의 양식이 되고 있다. 별서와 억새, 감나무, 모과나무, 소나무의 어우러짐은 깊어가는 겨울을 화폭에 담아 놓은 듯하다.

석파정에는 전면 오른쪽인 동쪽에는 안채, 서쪽에는 사랑채, 안채 뒤 언덕 위에는 별채, 안채 앞쪽으로 행랑채가 있다. 행랑채는 긴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았다. 다듬고 또 다듬어 땅을 고르고 그 위에 몸을 눕혔다. 세 단을 쌓고 또 다시 형태가 다양하고 크기도 서로 다른 돌을 납작한 부분을 밖으로 하고 사이사이에 회를 채웠다.

가지런히 마감을 하고 다시 전돌을 쌓고 그 위에 평기와를 눕혀 화방벽을 완성하였다, 화방벽의 아름다움은 암반 위에 크고 작은 돌이 흩어지고 그 위에 물이 흐르는 개울이 있고 다시 물이 흘러내리는 표현은 자연과의 융합을 이루었다. 화방벽 위 5칸에는 벼락닫이 같은 두 짝의 세살문을 달고, 다시 여섯 기단을 쌓고 대문을 달았다. 굳게 잠겨 있어 속까지 들어다 볼 수 없어 아쉽다.

▲ 삼계동 각서 © 정진해


남향을 하고 있는 안채는 ‘ㅁ’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었다. 건물 서남쪽 모퉁이에 낸 대문간을 통해 동북쪽으로 한번 꺾여 안마당으로 진입하게 된다. 안채는 동서방향으로 5칸, 남북 방향으로 4칸 규모이고 안마당 동남쪽에는 동쪽 밖으로 통하는 널 판문이 나 있다. 별채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난 문을 통해 왼편으로 담을 끼고 계단에 오르다가 별채 문을 지나면 그 오른쪽 앞에 자리 잡고 있다. 기단 위에 정면 6칸, 측면 2칸의 홑처마를 한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이곳에서 앞을 보면 인왕산과 북악산의 경치가 한눈에 조망된다. 사랑채는 안채 서쪽에 역 ‘ㄱ’자형 평면의 구조이며, 세벌대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로 지은 홑처마를 한 팔작지붕 건물이다. 왼쪽 끝 칸 전면에 누마루 1칸이 돌출시켰으며, 뒤로 이어지는 2칸 반 모두 누마루이며 아래 부분은 귀갑문의 벽을 막고 문을 내어 광으로 쓰고 있다.

사랑채 옆에는 홍송 한 그루가 푸른 자태로 변치 않고 있다. 홍송은 왕이 아닌 일반인이 필요에 의해 집안에 심을 수 없었다. 옆으로 가지가 펼쳐져 있어 마치 차일을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홍송 뒤쪽 바위 앞면에 '三溪洞'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있다. 원래 사랑채와 '三溪洞'이 새겨진 바위 사이에 건물 한 채가 있었는데, 이 건물을 소전 손재형이 1958년에 종로구 자하문로 309(홍지동) 옮겨 ‘대원군별장’이라 부르고 있다.

▲ 소나무(홍송) © 정진해


사랑채에서 서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사방 3칸 규모의 사모지붕 건물이 있다. '삼계동정자(三溪洞亭子)'라고도 불렸다가 훗날 흥선대원군의 소유가 되면서 ‘석파정’이라 부르는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風樓)가 자리하고 있다. 정자로 가는 길은 3번 꺾인 장대석을 이용하여 ‘之’자 형태로 계곡 위에 설치하였다.

건물 아래에는 전돌을 이용하여 홍예를 만들고 그 위에 석판을 덮었다. 다시 한 단의 기단을 올리고 사방 1칸의 정자를 완성 하였다. 가운데 칸은 개방되었으나 툇간은 모두 창호격자살창무늬처럼 꾸며 형식적인 벽을 만들었다. 기둥 위에는 자그마한 익공을 결구하여 건물 전체가 중국 청나라 풍을 느끼게 한다. 지붕은 기와를 씌우지 않고 동판을 얹었다. 계곡과 석파정 주변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조릿대가 자라고 있어 전통적인 산수정원에 정자를 둠으로써 정원의 격식을 갖추도록 하였다.

▲ 석파정 © 정진해

석파정에서 북쪽방향에는 너럭바위가 있다. 형상이 마치 코끼리를 닮았다고 하여 코끼리바위라고도 부른다. 생김새 때문에 영험한 기운이 있다고 하여 소원을 빌면 이뤄주는 바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구전에, 아이가 없던 노부부가 이 바위에서 자식을 갖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이 바위 앞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또한 아들이 과거시험을 며칠 남겨두고 이곳을 찾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결국 과거급제를 하여 출세의 길이 열렸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 너럭바위 © 정진해


안채 맞은편 개울건너 언덕에는 노송이 자라고 그 앞에 망원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터가 남아 있다. 바위에 기둥을 박았던 홈이 파져 있고 주위에 8각의 정자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터가 남아 있다. 정자 터 아래에는 ‘신라시대석탑’이라 명명된 삼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경주 근처의 개인소유 경작지에서 수습해 현재의 모습으로 2012년 6월에 현 위치에 이전 복원하였고 한다.

2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올린 일반형 3층석탑이다. 4장의 돌로 짠 기단부중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탱주를 세우고 각 모서리에는 우주를 새겼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다른 돌로, 각 지붕의 받침은 5단으로 하였다. 3층 위의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 있고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원래 수습된 자리에 복원 되었더라면 석탑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지만 이곳으로 옮겨진 상태에서 삼층석탑은 조형물에 불과하다.

권력 앞에 힘없는 백성은 자신의 소유이면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 채 송두리째 빼앗겨야 했던 그 현장, 석파정은 힘 있는 자의 권력으로 보면 아름다움을 찾지 못한다. 아름다운 인왕산의 풍경을 생각하며 나무, 바위, 물, 하늘의 어울림에 한옥을 추가하여 넣었으므로 우리의 전통한옥은 또 다른 문화를 생산케 한다. 홍시의 붉은 색과 모과의 노란 빛은 석파정의 정오에 추녀 아래로 끌어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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