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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종형 부도 백양사 소요대사탑

문화재 : 장성 백양사 소요대사탑(보물 제1346호)
소재지 : 전남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20번지

  • 기사입력 2016.03.19 06:00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 전문위원
▲ 소요대사부도     ©정진해

[한국NGO신문] 정진해 문화재 전문위원 =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노령산맥에 해발 741m의 백학봉은 동쪽에 백양사를 품고있다. 백학봉 일대는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하여 옛부터 경승지로 조선 팔경의 하나로 알려져 오다가 1971년 내장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백양사로 향하는 길은 아름드리 참나무와 단풍나무가 서로 어우러져 사계절 아름다운 풍경에 관광객의 발길이 멈추지 않는 곳이다. 계곡의 풍부한 물줄기는 주변의 수목을 풍성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겨울이면 온화한 체감을 느끼게 하고 여름이면 서늘한 체온을 느끼게 한다. 매표소 전부터 시작된 숲은 백양사를 둘러싸고 백학봉 일대를 가득 채운다.

백양사 박물관을 시작으로 부도전, 약천소, 쌍계루, 백양사 대웅전에 이르기까지 숲과 약수천이 함께한다.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백학봉은 좌우로 계곡을 만들고 그 계곡으로 산이 내뱉는 물이 백양사로 향해 흐른다. 약천소는 백양사 쌍계루를 끌어들여 물빛에 또 하나의 쌍계루를 짓는다. 지나칠 수 없는 풍경은 발길을 징검다리로 끌어드리고 약천소와 쌍계루(雙溪樓), 백학봉을 배경으로 한 폭의 사진을 남긴다. 쌍계루는 좌우의 계곡이 끝나는 지점에 세운 누각이다. 이 누각은 고려말에 홍수로 약천소의 제방과 함께 무너져 없어지자 다시 중창하였으나 1950년에 다시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가 1985년에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각 내부에는 포은 선생의 ‘기제쌍계루(寄題 雙溪樓)“편액이 걸려 있다. 

<寄題 雙溪樓(기제 쌍계루 : 쌍계루에 부쳐)> ’求詩今見白巖僧(구시금견백암승)/把筆吟愧未能(파필침음괴미능)/淸起樓名始重(청수기루명시중)/牧翁作記價還增(목옹작기가환증)/烟光暮山紫(연광표묘모산자)/月影徘徊秋水澄(월영배회추수징)/久向人間煩熱惱(구향인간번열뇌)/拂衣何日共君登(불의하일공군등) 지금 시를 써달라 청하는 백암의 스님을 만나니,/붓을 잡고 생각에 잠기니 재주없음이 부끄럽네./청수가 누각 세워 이제 그 이름이 무겁고,/목옹이 기문을 지어 더욱 값지네./안개빛 어슴프레 저무는 산이 붉고,/달빛이 배회하니 가을 물이 맑구나./오랫동안 인간사의 번뇌에 시달렸는데,/어느 날 옷을 떨치고 그대와 함께 올라볼까.‘

이 외에도 많은 편액이 걸려있는데, 모두 포은 선생의 시를 차운한 것들이다.

▲ 소요대사부도 소요당     © 정진해

사천왕문을 들어서서 대웅전, 극락전, 정류암, 관음전을 둘러보았다. 백양사는 1400여년전 백제시대의 고찰로 주변의 빼어난 경관으로 잘 알려진 사찰이다. 산내 10여개의 암자가 있으며, 고려시대부터 정진도량으로 이름난 운문암이 있기도 하다. 백암사, 정토사 등의 이름으로 전해졌던 백양사는 신라 때의 어떤 이승(異僧)이 처음으로 절을 짓고 살면서 이름을 백암사(白巖寺)로 하였다. 정도전의 ’백암산정토사교류기(白巖山淨土寺橋樓記)'에 장선군 북쪽 30리에 있는데, 그 이름을 백암이라 하였으며 암석이 모두 흰색깔이라서 이름하였다.”라고 하였다.

주변은 백학봉을 중심축으로 하여 쌍계루를 끝점으로 퍼져있는 비자나무숲과 많은 참나무와 단풍나무는 사계절 한시도 쉴틈없이 새로운 풍경을 연출해 낸다.

소요대사 부도를 찾기 위해 부도전을 향했다. 부도전은 백양사 경내로 향하는 길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석으로 만든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부도전으로 들어가는 원형문을 들어서면 많은 탑비와 부도가 줄지어 자리하고 있다. 다양한 모양의 부도는 시대를 내려오면서 변화되는 과정을 보는 듯 하다. 옛 고승의 부도와 같은 모양의 부도를 답습한 것도 있지만 매우 특이한 문양으로 장식한 부도가 있어 눈길을 끈다. 이곳에 소요대사부도가 있다고 하여 한 기씩 둘러보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소요대사부도와 같은 형태의 문양으로 만든 또 하나의 부도가 있는데, 원래의 소요대사 부도가 아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같은 모양의 부도를 소요대사 부도로 알고 인터넷상에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려놓는데, 좀더 신중을 기해야할 것 같다. 소요대사부도는 백양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담양 용추사와 연곡사에도 분사리 되어 부도탑을 세웠다. 특히 연곡사서부도의 탑신면에는 ‘逍遙大師之塔 順治六年庚寅(소요대사지탑 순치육년경인)’이라 명문이 새겨졌는데, 1650년(조선 효종 17)에 건립되어, 소요대사 입적 1년 후에 건립되었다.

▲ 소요대사부도 상륜부(용두)     © 정진해

그러면 백양사의 소요대사부도는 어디에 있을까? 박물관에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작은 박물관 마당 가장자리에 ‘소요대사 부도’라고 쓰여 있는 안내판이 서 있다. 부도는 오래되어 갈라진 틈이 보이고 일부는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부도에 새긴 많은 문양은 생생하게 남아 있어 자연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낙원을 보는 듯 하다.

소요대사는 조선 중기의 고승 태능(太能 : 1562∼1649)이다. 대사는 담양에서 태어나 13세에 불도에 입문하여 부유당 선수로부터 경전을 배우고, 서산대사 휴정의 법제자가 되었다. 사명유정, 편양언기, 정관일선 등과 문파를 형성하여 조선 후기 불교계를 이끈 인물로 알려져 왔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서산대사와 함께 승군에 가담하였으며, 이후 지리산 연곡사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백양사 박물관내에 옮겨와 전시되고 있는 묘탑은 대사가 입적한 1649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석종형부도의 형태를 띠고 있다. 탑신부와 상륜부를 한 돌로 만들어졌으며, 8각의 기단부에는 8엽 복련을 새겼고 각 면에는 모란꽃과 국화꽃, 연잎에 앉은 개구리, 어미에 엎힌 자라 등이 새겨져 있다. 그 위에 1단의 받침을 마련하고 몸돌을 올렸다. 몸돌은 범종과 같이 상대와 하대로 구분하고 문양대를 둘렀다. 몸돌 가운데에 문패형액자를 갖추고 그 안에 逍遙堂(소요당)이라 음각했다.

▲ 소요대사부도 유두와 용문양     © 정진해

상대 밑으로는 네 군데에 유곽을 배치하고 목련꽃봉오리 모양의 9개 유두를 돋을새김하였다. 상대 위로는 두 줄의 횡대를 두르고 운문과 인동문을 조밀하게 장식하였다. 유곽아래에는 용을 배치하였으며, 하대 문양대에는 파수문을 뱀, 용, 귀면, 거북, 원숭이, 개구리, 게, 물고기 등의 사이에 새겨 강 또는 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8마리의 동물은 팔부신중을 대신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불교의 윤회설에서 8이란 수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의미한다.

불교경전에 등장하는 원숭이는 권선징악의 상징과 불법을 수호하기 위한 의리있는 조력자로 등장한다.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자지 않고 도를 닦으려는 뜻으로 목어를 만들거나 목탁을 만든다. 뱀은 주기적으로 허물을 벗는다고 하여 생명과 부활을 상징하며, 머리와 꼬리가 있어 태양과 달에 속하며 생과 사, 빛과 어둠, 선과 악, 영적 재생과 육체적 재성을 의미며 똬리를 튼 뱀은 현현의 순환을 나타낸다고 한다.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 중의 하나가 되어 불법을 옹호하는 존재로 받아들어지고 있다. 귀면은 악귀를 물리치고 청정도량으로 만드는 기능과 방일한 마음을 엄숙하게 만들고, 신성관념을 갖게하는 기능을 갖는다. 거북이는 장수, 복, 예언, 지혜 등의 상징을 갖는 동물로 여겨졌다. 또한 개구리는 불법의 신성함을 상징하며 다산성으로 상징화 한다. 게는 해인삼매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 왔다.

▲ 소요대사부도 귀면문양     ©정진해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뜻에서 문양을 새겼는지 아니면 죽은의 무덤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다양한 동물의 문양을 새겼는지는 만든 자 만이 알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부도에 새겨진 문양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부도의 문양은 사찰건물에서 화려한 단청을 보는 것과 같이 부재를 보호하기 위함과 위용을 위한 것도 있지만 문양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신성시되기 때문이다.

상대의 청판부분은 16판의 복련을 장식하여 상륜부를 받치고 있으며, 상륜부는 범종의 형태를 이루며 네 마리의 용이 머리를 내밀고 보주를 물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용두 사이에는 구름이 마치 나선형의 소라껍데기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며 정상부분에는 둥근 보주를 조각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부도는 고흥 능가사 추계당 부도(전남 유형문화재 제264호)에서 볼 수 있다. 몸돌에 상대와 하대로 구분하고 상대 위의 횡대에 인동문을 새겼고, 하대의 횡대에는 물고기와 게 등의 수중 동물, 상대의 청판부분의 16판의 복현 장식과 상륜부의 4마리 용이 머리를 내밀고 보주를 물고 있는 모습 등 매우 유사하다. 이 부도의 조성연대는 17세기 중반으로 보고 있어 소요당부도와 추계당부도의 조성 연대가 같은 것으로 추정되며 같은 시대의 석공에 의해 부도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 소요대사부도 게문양     © 정진해

소요당 묘탑의 아름다움은 조선시대의 범종의 형태를 모방한 전형적인 석종형부도로, 이러한 형태의 부도는 9세기 말에 조성된 태화사지 12지상부도에서 시작된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로 오면서 다양한 형태의 부도가 건립되었으나 그 중에서 석종형 형태의 부도를 선호하였다. 전체적인 모습이 범종과 같은 형태를 취하면서 세부양식을 보여주는 것은 없는데, 소요대사 묘탑은 범종형태를 충실히 따르면서 표면에 식물과 동물 문양을 새긴 것은 매우 특이하며,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원래의 위치에서 박물관 안뜰로 옮겨온 것은 보존과 관리에 대한 문제이지만 다른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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