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문화와 종교 유적지 탐방<제7회>

신라의 혜초가 유학을 했던 불교대학 나란다

구장회 | 기사입력 2010/06/28 [11:39]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인도의 문화와 종교 유적지 탐방<제7회>
신라의 혜초가 유학을 했던 불교대학 나란다
 
구장회   기사입력  2010/06/28 [11:39]

인도사진7-3.
나란다 대학 절터를 불교 지도자들이 순례하고 있다


비하르 주의 불교 유적 중에 하나로 나란다가 있다. 이곳은 석가의 제자 사리불의 출생지이기도 하며, 석가도 생존 시에 여러번 방문하여 설법을 폈던 곳이다. 이곳에다 불교 대학을 건설했는데, 그것을 건설한 시기가 5세기 무렵이었다. 문헌에 의하면 7세기 무렵에 가장 번성하여 학생 수가 1만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신라의 고승 혜초가 인도에 왔을 때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는 말이 있다. 손오공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중국의 현장 법사도 그 무렵 이곳에서 머물며 배웠다.
1만 명이나 되는 많은 학승을 수용하려면 그 규모도 대단히 커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기대를 가지고 찾아가 보았다. 나란다 대학은 12세기 무렵에 이슬람교도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은 그 주춧돌과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잔해만 남았으나 그 규모의 광대함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동서 2천5백 미터, 남북으로 6백 미터에 이르는 터가 남아 있었고,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했음직한 방이 허물어진 돌의 잔해로도 알 수 있었다. 돌로 만든 거대한 수투우파는 어느 정도 원형을 지닌 채 그대로 있었다. 유적으로 확인된 것은 11개의 절터와 14개의 사원 터였다.
불교 유적들은 대부분이 북인도를 중심으로 퍼져 있다. 특히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주라고 하는 비하르주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불교 유적을 돌아보는 데는 교통편이며 도로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석가가 고행을 하면서 중생을 구하려고 했던 노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교통편과 숙소, 그리고 먹는 음식이었다. 물론, 그 세 가지는 어느 나라 여행이나 중요한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여행은 비행기, 기차, 버스, 그리고 택시를 이용했고, 멀지 않은 곳은 오토 릭사(오토바이 승합차)를 이용하기도 했다. 인도는 지방자치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주 정부를 넘어갈 때는 차를 세우고 통과세를 받았다.기차를 타러 역에 나가면 예정 시간보다 연착하는 것이 상례가 된다. 저녁에 출발하기로 했던 기차가 밤이 깊어 출발하는 것도 보았다. 밤이 되면 역 대합실을 비롯한 밖에서 걸어 다닐 때 조심을 해야 한다. 그것은 아무 곳에나 땅바닥에 누워서 잠을 자는 사람이 많아 사람을 밟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에 의해서 불교는 인도 전역에 퍼졌다. 불교 신도들은 석가모니를 대신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불사리를 봉납한 아름다운 불탑을 불교 성지뿐만이 아니라 인도 전역에 세웠고, 마투라에서는 1세기 무렵에 최초의 불상을 만들었다.

 

인도사진7-1.
비하르 주에 있는 인도의 최초 불교대학 나란다 유적, 7세기에 1만 명의 불교 학생이 있었고, 신라의 고승 혜초와 당나라의 현장법사도 이곳에서 수학했다.


서인도 쪽으로 가면 암벽을 뚫어서 염불장소(자아트야)와 사찰(위하라)을 합친 석굴 사원이 많다. 대표적인 석굴 사원이 아잔타, 엘로라, 아우랑가바드 등이다.
나는 북인도에서 항공편을 이용해서 서인도 아우랑가바드로 갔다. 서인도는 아라비아 해에 면해 있는 구자라트와 마하라슈트라의 2개 주로 이루어져 있다. 기후는 거의 몬순기후 지역이며, 서북부만이 건조 지대이다. 동부에서 서부에 걸친 비옥한 토양에서 면화와 쌀, 보리, 담배, 사탕수수 등이 많이 재배된다. 서인도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자이나교, 불교, 배화교, 크리스트교를 믿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인도의 독립을 이끈 국부 마하트마 간디도 서인도 출신이며 자이나교도이다.
아우랑가바드는 봄베이 북동쪽 3백50킬로미터 지점인 데칸 고원에 있는 오래된 시장 도시이다. 2세기에서 7세기 무렵에 건조된 불교 석굴 사원들과 무굴 제국 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곳은 무굴 제국 6대 황제인 아우랑제브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곳이다. 이름 난 유적으로는 황제의 비(妃) 무덤이 있다. 무덤이라지만 바로 궁궐과 다름없는 호화로운 규모이다.
아우랑제브 황제 첫째 마누라 베굼의 무덤은 아그리에 있는 타지마할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었는데, 타지마할에 비하여 크기라든지 건축학적인 예술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약간 촌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개 왕비의 무덤을 위해 이렇게 호화로운 궁을 짓는 것은 당시 군주의 과시욕이었다. 아우랑제브는 이슬람의 교육을 엄하게 받았는데, 그의 스승 무자파르의 무덤도 있다. 당시의 관개 기술이 대단해서 10킬로미터 떨어진 구릉에서 물을 끌어들여 폭포를 만들어 수력 제분기를 돌리고 분수를 만들었다.

 

인도사진7-2.
나란다 대학 안에 있었던 절터 자리

 

이렇게 왕비와 스승의 무덤은 화려하게 해놓고 진작 황제 자신의 무덤은 그렇게 초라할 수 없었다. 아우랑제브의 무덤은 서북쪽 24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 쿠르다바드에 있는데, 규모는 작으나 대리석으로 된 묘비가 아름다우며, 말끔하게 단장되어있다. 석굴 사원 엘로라로 가는 도중 통과하는 마을에 있다.
서인도의 마하라슈트라 주는 마라타인족이 많이 사는 주인데, 마라타는 지배계급이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하리잔(최하위계급)이 대다수였다. 많은 하리잔들이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해서 이 주의 불교 신도는 약 3백50만 명이라고 한다. 주의 전체 인구는 7천7백만 명이다. 인도는 역시 인간이 많은 나라이다. 한 주의 인구가 우리나라 전체 인구수보다 많다. 마하라슈트라 주는 간디가 믿었던 자이나교도가 인도에서 가장 많은 주로서 전 인도의 자이나교 중에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70만 명이 있다.

 

 

 <계속>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위 기사에 대한 모든 법적권한과 책임은 저작권자(c)(주)한국NGO신문에 있음>

카카오톡 카카오톡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네이버 네이버
기사입력: 2010/06/28 [11:39]   ⓒ 한국NGO신문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