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민족 DNA를 찾아서(11회) ‘팍스 몽골리카’를 실현한 칭기즈칸의 ‘대몽골 제국’

  • 기사입력 2020.12.05 18:54
  • 기자명 김석동
▲ 필자 김석동  

기마유목군단의 발원지 몽골 고원
몽골 고원은 면적 272만 km2(남한의 약 27배), 해발고도 1.5km의 고원 지대이다. 동쪽으로는 대싱안링 산맥을 경계로 만주, 서쪽으로는 알타이산맥 넘어 중앙아시아와 고비 사막, 남쪽으로는 중국과 바이칼 호수,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각각 접하고 있다. 오늘날의 몽골(156만 km2)과 중국내몽골 자치구(118만 km2)에 대부분 속한다.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준평원 지역으로, 남부에는 고비 사막 지대가 100만 km2를 넘고, 중앙과 동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강수량이 많아 넓은 초원을 이루고 있다. 바로 이 몽골 고원이 북방 기마유목민이 유라시아 대초원의 역사를 써내려간 출발지이자 동시에 한민족 성장 DNA 탐구 여행의 길라잡이다.

몽골 고원에서 펼쳐진 역사를 개관하기 위해 몽골 중등 국사 교과서를 살펴보자. 기원전 3세기 이후 6세기 중엽까지 몽골 고원에서 일어난 고대 국가로 흉노(BC 209~AD 93), 선비(1~3세기), 유연(330~555년) 등을 소개하고 있다. 6세기 중반 이후부터 몽골 제국 건국 전인 12세기 초반까지 활약했던 국가로 투르크(돌궐, 552~745년), 위구르(745~840년), 키르기스(840~923년), 거란(901~1125년) 등을 기술하고 있다. 이후 몽골 제국이 등장하였고, 북원을 거쳐 청나라의 지배하에 있다가 1921년 몽골인민정부가 독립을 선포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외몽골은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내몽골은 중국의 자치국으로 각각 운명이 나뉘었다.

대몽골 제국의 건설과 흥망
흉노가 쇠락하여 떠나버린 몽골 고원에서는 선비족이 선비 제국을 건설했고, 이후 그들의 후예가 유연·북위·전연·후연 등을 각각 세웠다. 6세기 중엽 이후 돌궐·위구르·키르기스 등 투르크족이 몽골 고원을 장악하면서 선비족은 몽골 고원 외곽으로 밀려났으나, 투르크 세력이 약화되는 8세기 중반부터 다시 점차 고원 중심부로 돌아왔다. 10세기에 들어서는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이 몽골 고원을 완전히 차지했다.

10~11세기 고비 사막 남북 초원에 많은 몽골계 부족연합체가 형성되었고, 11~12세기에는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 홍기라트, 옹기라트, 전몽골 등의 부족이 몽골 고원의 큰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전 몽골족은 몽골 고원 동부의 ‘에르구네 쿤’의 몽골인, 유연의 후예인 ‘타타르 소칸국’의 몽골인, 선비계 ‘실위인’ 등 다양한 집단에서 유래했다.

바로 이 전몽골족에서 ‘테무친 보르지긴’이란 영걸이 나타나 케레이트의 지지를 받아 메르키드를 정복하고, 이후 타타르, 홍기라트, 케레이트, 옹기라트, 나이만을 차례로 격파하여 몽골 초원을 통일했다. 테무친은 1206년 44세의 나이로 몽골의 대칸에 올라 칭기즈칸이라 불렸고, 이로써 대몽골국이 출범했다. 서른두 차례에 걸친 전쟁과 전투의 결과였다. 이상이 몽골의 역사 교과서가 소개하는 몽골 제국의 성립 과정이다.

칭기즈칸은 몽골의 기마군단을 이끌고 금나라, 호라즘, 탕구트를 궤멸시키는 등 공포의 정복 전쟁을 거듭하여 대몽골 제국을 건설하고, 1227년 6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1229년 칭기즈칸에 이어 셋째 아들 우구데이는 카라코룸으로 천도하고 금을 멸망시킨 후 서역 정복 전쟁을 전개했다. 몽골 통일 전 나이만족의 수도였던 오르혼 강변의 고대 도시 카라코룸은 이후 30년간 몽골 제국의 수도로 중국 원정의 본거지 역할을 했다. 우구데이는 킵차크,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등 유라시아 지역을 차례로 정복하여 태평양 연안에서 동유럽·시베리아·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세계 최대 제국을 건설했다.

1246년 우구데이의 큰아들이 제3대 대칸으로 옹립되나 원정 중에 사망하고, 1251년 칭기즈칸의 막내아들인 톨루이의 큰아들 뭉케가 제4대 대칸으로 등극했다. 뭉케의 동생 쿠빌라이와 훌라구는 형의 정복사업을 돕다가 뭉케가 죽은 뒤 1260년 쿠빌라이가 제5대 대칸에 올랐다.

쿠빌라이는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정하고 원元제국을 출범시켰다. 다음해 수도를 대도(오늘날 베이징北京)로 옮기고 남송을 멸망시켜 중국 전토를 장악했다. 쿠빌라이의 원나라는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했고, 4대 칸국까지 아우르는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4대칸국 중 러시아 지역의 킵차크 칸국은 칭기즈칸의 큰아들 주치와 그 아들 바투가, 페르시아 지역의 일 칸국은 뭉케의 동생 훌라구가, 중앙아시아 지역의 차가타이 칸국은 칭기즈칸 둘째 아들 차가타이가, 위구르 지역의 우구데이 칸국은 우구데이의 남은 일족들이 각각 지배하도록 분봉했던 땅이다.

원나라의 쿠빌라이는 몽골의 옛 제도에 중원 왕조의 전통 정치체제를 적절히 접합시켜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의 기틀을 확고히 했다. 이로써 칭기즈칸의 대몽골국은 100년 이상 융성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의 사후에는 황실의 후계 다툼이 지속되면서 14세기 중엽에는 국정이 극도로 해이해지고, 사회적 모순이 심화됐다. 이에 따라 지방에서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 폭동들은 한족에 의한 민족적 반란으로까지 이어져 주원장에 의한 명나라가 출현하게 됐다. 1368년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명나라에 빼앗기고 몽골 본토로 쫓겨나 북원北元으로 명맥을 잇다가 마침내 나라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몽골 제국 시대의 주변국 정세
1206년 칭기즈칸이 대칸으로 추대될 당시 남중국은 남송, 만주와 북중국은 금나라, 한반도는 고려, 일본은 가마쿠라 시대였다. 몽골 서남부는 탕구트, 서부는 호라즘 제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13세기 당시 몽골 인구는 약 200만 명에 불과한 반면, 최대 국가인 금나라는 5,000만 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칭기즈칸은 1211년 금나라와 천하를 다투는 23년간의 대전쟁을 시작하여 1215년 금의 수도와 주요 거점을 정복했다. 이어서 인구 2,000만 명의 호라즘과 탕구트(서하)마저 정복했다.

칭기즈칸이 금나라를 치고 황하 이북을 차지하면서 금나라는 황하 남부로 쫓기게 됐다. 게다가 내분까지 일어나 금나라가 차지했던 만주 지역에는 세력의 공백이 생기게 됐다. 과거 요나라를 세웠던 거란족은 이틈을 타서 여진과 연합하여 ‘대요국’을 세웠다. 이에 몽골은 거란을 공격하고, 쫓긴 거란은 고려의 평안도 지방인 강동 지역으로 들어오게 됐다.

당연히 고려군이 출병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을 격퇴했다. 이때 몽골군이 고려군과 협공하게 되었는데, 거란이 격퇴된 후 몽골 측에서 협력한 대가를 과도하게 요구하면서 두 나라 관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이 와중에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가 국경 지대에서 피살되면서 국교가 단절됐고, 마침내 여몽 전쟁이 시작됐다.

고려에 승리한 원나라는 남송과 일본의 연합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일본의 가마쿠라 정권 또한 복속시키고자 했다. 일본이 복속을 거부하자 원나라는 1274년 고려와 연합군을 편성해 일본 정벌에 나섰지만 태풍으로 실패했다. 몽골은 기마군단이 진격하기 어려운 바다와 정글이 있는 일본과 베트남, 아시아 기마군단 맘루크가 지키던 이집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복에 성공했다. 쿠빌라이는 1279년 인구 3,000만의 남송까지 멸망시켜 마침내 세계 제국을 완성했다.

몽골 기마군단의 가공할 전투력
칭기즈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BC 4세기의 알렉산드로스, 18~19세기의 나폴레옹, 20세기의 히틀러가 다스렸던 제국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넓은 777만 km2의 땅을 정복해 세계 역사상 유일한 세계 제국을 건설했다.

로마가 제국을 건설하는 데 약 400년 가까이 걸렸지만, 몽골의 기마군단은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세계 제국, 대몽골국을 건설하는 데 불과 2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13세기 초 몽골 인구는 많아야 200만 명 안팎으로, 칭기즈칸이 지휘한 몽골군 전체 규모는 9만 5,000명 정도였다. 그런데도 몽골 기마군단은 가공할 전투력을 발휘하여 유라시아 대부분을 순식간에 정복했다.

그 비밀은 바로 뛰어난 기동성에 있었다. 작지만 초원에서의 전투에 능한 조랑말을 앞세운 민첩성, 활이라는 강력한 무기, 병사 스스로 해결한 식량 등의 병참 체제, 여기에 효율적인 군사편제와 탁월한 군사 전략 및 전술 등이 더해져 최강의 군사집단으로 등장했다.

이런 몽골 기마군단 앞에 동서를 막론하고 수많은 나라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몽골은 태풍으로 일본 정벌에, 열대밀림으로 베트남 정벌에 실패한 것 등 이외에는 대부분의 지역을 초단기간에 점령해 버렸다.

기마군단의 위력과 관련하여 북송사에 전설적인 기록이 남아있다. 1126년 송나라 보병 2,000명이 여진족의 금나라 기병 17명을 포위 공격하다가 처참하게 패배한 사건이 그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 경상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지휘하는 약 4만으로 추정되는 조선군이 인조를 구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진군했다. 1637년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인근의 쌍령에서 청나라 팔기병 300명과 전투를 벌인 끝에 조선군은 궤멸했다(쌍령 전투).

몽골군의 한반도 침공과 고려의 항쟁
1231년 칭기즈칸을 이은 우구데이칸 때 몽골은 고려를 침공했다. 칭기즈칸은 한때 맏아들 ‘주치(후엘룬이 메르키트에 납치되었다가 돌아와 낳은 아들)’를 후계자로 삼고자 했으나, 차남인 ‘차가타이’는 주치를 ‘메르키드의 잡놈’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차가타이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샀고, 타협책으로 삼남 우구데이가 대권을 이어받았다. 당시 고려는 무신정권으로, 최우가 집권하고 있었다.

고려는 몽골군의 침입에 대해 끈질기게 항전했다. 몽골 기병은 전쟁이없을 때는 하루 200km, 전쟁이 있을 때에도 40km 이상 진군할 정도로 놀라운 기동력을 발휘해서 전광석화처럼 전쟁과 전투를 끝냈다. 그러나 고려와는 화의를 맺는 1259년까지만 해도 28년, 개경에 환도한 1270년까지 계산하면 39년이라는 긴 기간이 필요했다. 1273년까지 이어진 삼별초 항쟁을 더하면 무려 42년에 이른다. 이는 몽골이 가장 어렵게 치른 전쟁이었다. 다른 나라와 달리 고려가 오랜 기간 항쟁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다음호 계속)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정사회
경제정의
정치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