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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DNA를 찾아서(20회) 한 북방사학자가 찾아낸 북방제국과 한민족의 놀라운 연결고리

  • 기사입력 2021.03.02 08:12
  • 기자명 김석동
▲ 필자 김석동  

이 장에서는 한민족과 북방민족의 연결고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찾아볼 수 있도록 북방민족사학자 전원철 박사의 연구 내용을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전 박사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아이오와대JD, 뉴욕주립대LLM에서 수학한 미국 변호사로 UN난민판무관실 체첸전쟁 현장 주재관으로 일했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도 근무했다. 그는 29개국의 언어를 구사하는 발군의 언어 능력으로 수많은 고대 및 중세 사서들을 해독하여 한민족과 북방민족과의 관계를 밝히는 데 기여했다.2015년 6월에 그는 《고구려 - 발해인 칭기스 칸 1, 2》을 출간했다.

그는 1240년경에 출간된 현존하는 최고의 몽골역사서 《몽골비사》, 몽골 제국의 칸국인 일 칸국의 재상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이 1310년경 저술한 《집사集史》, 몽골 제국의 후예 티무르 제국의 4대 칸

‘울룩벡’이 15세기 전반에 저술한 《사국사四國史》, 히바 칸국의 ‘아불가지 바하디르칸’이 17세기에 지은 《투르크의 계보》, 그리고 동양 사서 등 수많은 기록들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대몽골 제국의 창시자 칭기즈칸을 비롯한 몽골 제국 후예들이 건설한 나라들의 왕가 계보를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돌궐이 몽골 고원에서 물러나 서진하면서 건설한 수많은 투르크 국가의 왕가 계보, 여진이 세운 발해의 후예 금나라와 청나라의 왕가 계보를 일목요연하게 밝혀냈다. 그는 서방 사서에 기록된 칭기

즈칸의 선조의 ‘계보’를 동방 및 우리 사서들과 교차 체크하고 그 인물들의 이름 소리, 그들이 살았던 곳의 지명, 활동 시기와 연도, 행적, 족보상의 계보까지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사서에서 확인하여 칭기즈칸의 계보를 추적했다. 그 결과 사서들의 내용이 서로 정확히 일치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그동안 필자가 연구해온 ‘흉노 - 선비 - 돌궐 - 몽골 - 여진’ 등 2500년간 세계사를 써온 북방 기마군단이 고조선과 연결되고 고조선의 후예인 한민족과도 깊은 관계에 있다는 내용에 대한 문

헌학적인 고증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현재 전원철 박사는 울룩벡이 쓴 《사국사》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필자가 출간을 지원하고 있다. 이 사서는 중세 페르시아어로 쓰였고 그 원본은 하버드대와 옥스퍼드대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1994년에 세계 최초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우즈벡어로 번역된 바 있다.

현재 하버드대 도서관으로부터 받은 페르시아어 원본과 우즈벡어 본을 대조하면서 번역을 진행 중이다. 다음은 앞서 언급한 사서들을 통해 전원철 박사가 밝혀낸 사실을 필자가 종합한 내용이다.

기원전 1세기에서 시작하여 700년간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서방 세계에는 ‘무크리Mukri’ 혹은 ‘코라이Koorai’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668년 멸망했다. 마지막 왕 고장高藏과 직계 가족은 모두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갔다. 이때 고구려 땅 백산白山과 속말粟末의 ‘말 - 고을靺鞨’, 즉 ‘말 키우는 고을’의 지방통치자 대조영 일가도 포로로 잡혀 당나라 영주(현재 차오양)에서 포로생활을 했다.

거란 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 틈을 타 대조영 일가는 동쪽으로 탈출했고 698년 동모 산에서 진국고려震國高麗(후에 발해)를 세웠다. 대조영은 고구려 왕족의 후예인데 서자 가문이기 때문에 고씨高氏(커씨) 대신 걸씨乞氏(클씨), 곧 대씨大氏를 성으로 사용했다.

건국한 지 채 30년이 못되어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대부분 수복하자 당 현종은 발해를 약화시키기 위해 흑수말갈(오늘날 아무르강 저편의 러시아하바롭스크 주)을 발해로부터 분리시켜 당이 직접 통치하려 하였다. 이에 발해 무왕(대무예)은 동생 대문예로 하여금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으나 친당파인 대문예는 전쟁에 반대하다가 당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이후 대무예의 맏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대도리행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갑자기 사망하는 등으로 두 나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드디어 732년 9월 발해무왕 대무예는 당나라에 전쟁을 선포하고 선제 공격에 나섰다. 압록강 하구에서 출발한 발해군은 장문휴의 지휘하에 당나라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이듬해인 733년 당 현종은 당나라로 귀부한 대문예를 앞세워 발해 본토를 공격하게 하고 신라로 하여금 발해 남쪽 국경을 공격하게 하는 등 대반격에 나섰다. 개소문의 증손자인 개복순이 이끄는 당 - 신라의 연합군과 무왕 대무예의 사촌 대일하(일한)가 이끄는 발해군이 발해의 남쪽 접경 지역에서 맞서게 되는데 전세의 반전으로 대일하가 전사하고 말갈군(발해군)도 전투에서 대패하여 ‘일한(일하)’ 일족이 전멸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키얀(간)’과 ‘네쿠즈(님금)’ 두 사람이 살아남아 ‘아르가나 쿤(압록강의 군, “발해서경 압록군”)’으로 도망가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키얀과 네쿠즈의 자손이 불어나자 ‘아르가나 쿤’에서 빠져나와 모골(몰골, 말갈, 후에 몽골)의 고향으로 돌아가 칭기즈칸의 선조의 부락이 되었다 한다. 이때 키얀의 후손인 ‘콩그라트(큰고려씨)’ 종족이 먼저 ‘아르가나 쿤’에서 나왔고 이어 나머지 모골(몽골) 종족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콩그라트 종족의 전설적인 시조는 페르시아어로는 ‘황금 항아리’라는 인물인데 투르크어로는 “알툰 칸(황금 칸)”이고, 그는 바로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금행金幸’이다. 금행은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今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키얀澗의 손자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금행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아고래’, ‘함보’, ‘보활리’이다. 이 세 아들이 《고려사》에 나오는 금행의 세 아들이자, 《금사》에 나오는 금金나라 시조 삼형제다.

맏아들 아고래(하고라이, 고구려)는 콩그라트 종족의 시조가 되었고 가장 먼저 ‘아르가나 쿤’을 나온 콩그라트 종족은 발해의 남쪽 국토 회복을 위해 발해가 신라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 참여했다. 칭기즈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부여 대 부인’의 몽골식 소리) 도 이 종족 출신이다.

둘째 아들 함보는 예키라스役拏氏 종족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발해 반안군(길주)으로 들어가 반안군왕이 되었는데 바로 이 함보의 7대손이 후일 금나라를 세우는 ‘완안 아골타’이다.

셋째 아들 보활리는 함보와 함께 고향 평주를 떠나 함흥으로 들어갔다. 보활리의 3대손이 ‘코를라스(고려나씨)’인데 이때부터 이 가계는 코를라스족으로 불리게 된다. 이 코를라스 지파에서 ‘모든 몽골인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몽골인의 조상 ‘알란고와’가 나왔는데 코를라스의 딸이다.

바로 이 알란고와의 10대손이 세계의 정복자 칭기즈칸이다. 그러므로 칭기즈칸은 대조영의 19대손이 되며 고구려 - 발해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놀라운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전원철 박사에 의하면 몽골이 고구려 - 발해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이름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몽골은 칭기즈칸 선조의 나라인 ‘말갈(= 물길)’, 즉 ‘말 고을’의 옛 소리인 ‘몰 - 고을’, 곧 ‘말馬 - 고을邑, 城’에서 생긴 말이다. 고구려는 여러 개의 고을(구려)과 ‘일곱 개의 말골(말갈)’로 이루어져 커진高 나라 ‘커구려(고구려)’였고, 결국 ‘말갈’, 곧 옛 소리로 ‘몰골’이 몽골의 어원이라 한다. 전 박사는 “칭기즈칸은 당시까지 돌궐 - 투르키스탄으로 불리던 땅의 여러 종족들을 통일한 뒤 자신의 나라 이름으로 ‘고구려 - 말갈’ 가운데 후자를 선택하여 ‘말골(몽골, 모골)’이라고 했다”며, “그 이유는 자신의 선조가 바로 말갈(발해) 왕족이었고, 또 그가 나라를 세울 당시에 동쪽에서는 자신과 같은 선조에서 나와 혈통을 나누는 왕건의 ‘고려(고구려)’가 이미 존재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려’라는 국명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몰골(말갈)’의 전음인 ‘몽골’을 자기 국명으로 택했다는 것이다.

몽골 제국이 사라진 후 몽골 제국의 재건을 기치로 중앙아시아에서 티무르 제국을 세운 ‘티무르’와 인도에서 무굴 제국을 세운 ‘바부르’ 또한 칭기즈칸의 가계이다. 티무르는 칭기즈칸의 3대조 ‘카불칸’의 형제인 ‘카촐리 바하두르’의 8대손이다. 따라서 티무르는 칭기즈칸의 방계 5대손이 된다. 바부르는 티무르의 직계 5대손이며 바부르의 모계 또한 칭기즈칸 가문이다. 이렇게 고구려 - 발해 왕가는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무굴 제국으로 이어진다.

고려 또한 고구려 - 발해의 가문이다. 금행에는 금시조 함보 등 세 아들 외에 ‘용녀’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작제건’과 결혼했고 그 손자가 고구려를 건국한 왕건이다. 따라서 왕건 또한 고구려 - 발해의 후손이다.

그래서 왕건은 “발해는 내 친척의 나라”라고 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북방의 강력한 신흥마군단 세력인 거란이 보낸 사신을 귀양 보내고 공물로 보내온 낙타는 만부교 다리 아래 묶어 굶겨 죽이면서까지 거란과의 통교를 거부했다. 그는 거란과 통교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훈요십조에도 포함시켰다. 망명해온 발해 세자 대광현 일행을 자신의 왕씨 족보에 올린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다.

금나라를 건국한 함보의 7대손 ‘아골타’뿐 아니라 후금(후에 청나라)을 건국한 ‘아이신교로愛新覺羅 누르하치’도 고구려 - 발해의 후손이다. 누르하치는 아골타 가문의 약 20세손이 된다. 청나라 건륭제의 명으로 지은《만주원류고》에서 청나라 황실은 발해 말갈의 대씨와 금나라 왕가인 완안씨(곧 고려말로 왕씨)의 후손이라고 자처하고 있는데 이는 금의 건국자 아골타가 발해 후손이며 동시에 누르하치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한편 아골타의 7대조 함보에 대해서는 일부 학자가 신라 왕족이라 하는데 함보와 그 부친 금행은 대야발의 5대손 및 4대손으로 신라가 멸망할 시점인 936년대 인물이 아니며 발해가 존재할 당시인 840~850년대의 발해 왕족이라고 한다. 이러한 분석을 종합하면 동아시아에서 나라를세운 ‘고구려 - 발해’, ‘고려’, ‘금나라’, ‘대몽골 제국(원나라를 포함하여 4칸국)’ 그리고 ‘청나라’가 모두 한 가계에서 나왔다는 의미가 된다.

한편 고구려 - 발해의 후손들은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세력을 규합하여 여러 제국을 건설했다. 돌궐 제국은 서쪽으로 이동해가면서 수많은 투르크 국가들을 건설했는데 이들 중 고구려 - 발해 가계가 리더가 되어 왕조를 세운 나라가 다수 있다. 대조영, 대야발의 4대조는 ‘오구즈칸’이라는 인물인데 그의 사촌형제들의 후손이 세운 나라가 ‘위구르 제국’이다. 그리고 오구즈칸의 직계 후손들이 투르크인들을 지휘하여 서진하면서 세운 나라들이 ‘카를룩’, ‘셀주크 제국’, ‘호라즘샤 제국’, ‘카라한 제국’, ‘가즈나 제국’, ‘맘루크 왕조’, ‘악 코윤루’, ‘카라 코윤루’, 그리고 ‘오스만 제국’ 등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셀주크 제국은 960년경 ‘셀주크 베이’가 오구즈족 일파를 지휘하여 중앙아시아 일대로 진출했고 ‘토그릴’이 중동 지역까지 영토를 확대하여 1037년 대셀주크 제국을 출범시켰다. 셀주크는 오구즈칸의 손자인 크닉의 후손이며 토그릴은 셀주크의 손자이다. 이렇게 셀주크 제국은 고구려 - 투르크계 기마유목민 세력이 중앙아시아와 중동 일대를 지배한 수니파 무슬림 왕조라 한다.

맘루크 왕조는 이집트에 맘루크국을 세워 1250년부터 1517년까지 약 270년간 지배했다. 맘루크국은 흔히 노예 왕조라고 불리는데 이슬람 세계에서는 싸움을 잘하고 용맹한 투르크 군인을 왕가의 노예로 사서 쓰는 관행이 있었다. 이들이 왕조까지 세운 사례가 이집트 이전에도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나 제국(977~1186년), 인도의 노예 왕조(1206~1290년) 등에도 있었다.

전투력을 자랑하는 아시아 기마군단 투르크가 서진하면서 이집트에서는 왕실을 경호하는 군인 용병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맘루크 군단의 ‘아이벡’이 이집트 술탄을 죽이고 그 자리에 올랐다. 투르크 노예 출신이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자 끊임없는 저항이 뒤따랐으나 맘루크 군이 공포의 몽골군단의 침략을 막아내자 왕조의 기반이 확고히 다져졌다.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일 칸국의 초대 칸인 훌라구는 이라크를 굴복시키고 연이어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기 위해1 260년 최강의 기마군단을 이끌고 남하해 왔다. 당시 몽골 제국 입장에서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는 것은 세계 정복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방으로 간 고구려 - 발해 왕가 일부가 투르크화한 가문인 호라즘샤 제국을 만든 후 몽골군에 망하자, 그 가문의 일원인 맘루크의 술탄 쿠투즈는 오히려 몽골군을 ‘아인 잘루트’로 유인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의 승리로 이슬람 세계는 몽골 제국의 파괴로부터 구원받았고 유럽에서 닥쳐온 십자군 전쟁도 끝내 카이로는 바그다드를 대신해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1299년에는 일 칸국의 카잔칸이 다시 맘루크국 정복에 나서지만 ‘나세르 무함마드’가 몽골의 침략을 다시 막아냈다.

전 박사가 분석한 이 왕가들의 ‘샤자라(족보)’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구려 - 발해 가문의 후예인 칭기즈칸이 대몽골 제국을 건설했고 이들 몽골군단이 이집트에까지 진출하려 했으나 또다른 고구려 가문의 후예인 맘루크가 이를 막아냈던 것이다. 지금도 이집트 최대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에 가면 지중해 해변에 ‘카이트 베이’라는 맘루크 왕조 시대에 세운 기념비적인 성채가 지중해의 파도를 막아내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오스만 제국은 1299년부터 1922년에 이르기까지 600년 이상 지속된 최강의 투르크 국가였다. 오스만 제국의 시조 오스만 1세는 오구즈칸의 아들 ‘카이’의 후손으로 오스만 제국 역시 고구려 후예인 오구즈 가문의 나라이다. 오스만 제국은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칭기즈칸의 후예 티무르에게 패배한 이후 약 50년간 극심한 침체기를 겪었으나 1453년 무하마드 2세가 동로마 제국을 정복했고, 이후 1517년에는 메카를 점령하여 칼리프의 지위에 올랐다. 술레이만 1세 때 세계 제국을 건설했지만, 18세기 말 이후 쇠락하면서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오스만 제국의 막이 내린다. 바로 이 오스만 제국의 후예가 1923년 건국된 오늘날의 터키이며 터키인들이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인식하는 것도 이와 같은 DNA의 배경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 방방곡곡에서 인류의 역사를 바꾼 제국들과 왕국들의 역사에서 놀라운 한국인 DNA 역사가 발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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