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스포츠는 파트너와 함께 추는 춤이라 혼자 솜씨를 보여주기는 어렵다. 댄스대회는 파트너와 함께 나가지만, 대회 이외에 동행하는 일은 없다. 그래서 명색이 댄스스포츠 선수인데 혼자로는 솜씨를 제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점이 딜레마다.
그래도 공식 댄스스포츠대회에 선수로 참가한 것 말고도 몇 가지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댄스가 아니었으면 그저 그렇게 흘러갔을 추억인데 빛나는 추억이 된 것이다.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시절, 정동 TBC TV에서 ‘젊음의행진’이라는 당시 젊은이 대상으로 획기적인 프로그램이 있었다. 사이키델릭 사운드 밴드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인데 객석에 앉아 있던 내가 음악에 맞춰 앉아서 춤을 추자 카메라 맨이 나를 중점적으로 비췄다.
다음날 학교에 가자, 나는 영웅이 되었다. 그 후 몇 차례 그 프로그램에 갔다가 아예 무대까지 불려가 제대로 방송 덕을 톡톡히 봤다. 중학교가 그 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받던 불이익이 일거에 해소되었다.
대기업에 다니다가 중소 봉제 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공장장으로 발령받은 일이 있다. 30대 중반이었다. 마침, 회사창립기념일을 맞아 호텔을 빌려 성대하게 행사를 치렀다. 외부에서 전문 사회자를 불러 댄스 경연대회를 했는데 거기서 내가 1등으로 뽑혔다.
나를 처음 보는 사회자는 어느 부서 직급이 뭐냐고 물어 공장장이라고 했는데도 믿지 않았다. 공장장은 나이 지긋하고 위엄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계속 공장장이라고 했더니 직원들이 맞다고 하는 바람에 사회자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일로 공원들과 가까워져 그해 노사 분규 때도 우리 회사만 비켜 갈 수 있었다.
발트 3국에 40여 명의 패키지여행을 따라간 적이 있다. 한 여름이었으므로 낮시간이 길어 자정 무렵까지 바깥이 훤했다. 그런데 호텔은 덩그러니 논밭 한 가운데 자리 잡아 갈 데도 없었다. 인솔자가 호텔 손님도 우리 외에 없으므로 세미나실을 빌려 댄스 강습을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한 시간 동안 차차차를 가르쳤다. 여기서 가르친 차차차를 다음날 시내 나이트클럽을 전세 내서 그날 밤 신나게 출 수 있었다. 나이트클럽 춤은 막춤이니까 그냥 추면 된다고 춤을 권장했으나 그것도 박자 관념이 있어야 가능하다며 구경하는 사람은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남프랑스 여행을 갔을 때도 젊은 커플이 두 커플이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두 커플에게 댄스를 가르쳐 댄스 시범을 보이라는 숙제를 안았다. 이때도 차차차를 가르쳤는데 두 커플은 시범 보일 수준이 못 되었다.
그래서 근처 공원에서 두 커플에게 차차차를 가르쳤는데 현지 젊은 노랑머리 아가씨가 흥미롭게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손을 내밀자 망설일지도 않고 응했다. 내 리드에 따라 멋지게 한 곡을 췄다. 시범 연습하던 우리 커플들이 내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즉석에서 그렇게 맞춰 잘 출 수 있느냐며 감탄했다.
댄스스포츠는 세계적으로 통일된 스텝으로 어딜 가나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그제야 다시 가르쳐 달라며 연습에 열중했다. 이날 두 커플은 천 년 된 수도원에서 저녁 식사하면서 시범을 멋지게 해 냈다.
얼마 전 다녀온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 때는 다행히 일행 중에 댄스를 좀 했다는 여성이 있었다. 첫날 크루즈 선 가장 화려한 중앙 플로어에서 둘이 춤을 추자 거기 있던 많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둥글게 외곽으로 물러나면서 우리 춤에 경탄했다. 이때부터 오는 날까지 유명 인사 대접을 받았다. 내가 지나가면 인증샷을 찍자고 하지 않나, 중앙홀에 우리가 나타나면 춤을 멈추고 모두 자리에 앉았다.
춤은 그 사람의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기회다. 특기이자 장기가 된다. 그것도 평생 써먹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