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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윤필용 장군의 지고지순한 충성심

'진실은 시간의 몫'

  • 기사입력 2022.03.12 12:54
  • 기자명 이석복
▲ 歡喜 이석복(수필가, 차세대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1973년 3월 상순경으로 기억한다.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처 작전장교(대위)로 근무하면서 1972년 10월 유신(維新) 비상계엄의 격무를 마치고 예비군 과장으로 보직이 변경된 지 한 달 쯤 되었을 때였다. 어느 날 아침에 출근했더니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쿠테타 모의혐의’로 체포되었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소식이 들렸다.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1967년 육군 중위 때 육군방첩부대장이었던 윤필용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선발되어 육군 제20사단장으로 근무하실 때까지 모셨었다. 그후 중대장을 마치고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귀국시 윤장군님이 수도경비사령부로 불러주셔서 72년 2월경부터 수경사 작전처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윤장군님은 박정희 대통령께서 제5사단장으로 근무하실 때 군수참모로, 제1군사령부 참모장 하실 때 보좌관으로 그리고 5.16혁명시 최고회의 의장의 비서실장으로서 모셨던 이야기들과 방첩부대장으로서 대통령께 보고드릴 때 이야기들을 풋내나는 전속부관인 나에게도 가끔 해주었다. 때문에 나는 어렸지만 윤장군님만이 간직한 박대통령과 국가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윤 장군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신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낙담하지말고 배신않는 사람을 귀하게 여겨라”, “상급자가 질문할 때 확실하지 않은 것은 모른다고 하고 확인해서 보고하라” 등 인생과 군생활에 걸쳐 교훈적인 가르침도 말씀해주셨다. 그런 분이 박정희 대통령을 쿠테타로 몰아내려고 모의를 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고 직감적으로 모함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었다.

‘쿠테타 모의’ 수사는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이 무자비하게 진행되었으나 결국은 밝혀내지 못했다. 대신에 윤 장군님은 「업무상횡령」, 「특정범죄가중처벌법위반」 등 8개 죄목으로 체포된 후 50여일 만에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소위 「업무상횡령」이라는 것이 고작 ‘안맞는 군복을 줄여입은 수리비 쓴 것’이라니 기가 막히지 않는가? 그리고 「특정범죄가중처벌법위반」으로 씌운 것이 ‘수경사 소속 배구팀 젊은 선수들을 위하여 소고기를 후원받아서 회식시킨 것’이었다. 엮어도 너무 엮다보니 나온 일이었다. 오히려 윤장군님께서 얼마나 청렴결백한 군인이셨는가를 반증한 사례로 유명하다. 가장 안타까운 일은 윤장군님과 과거에 가까웠다는 죄로 40여명의 고급장교들이 억울하게 군복을 벗고 그중 10여명은 실형까지 선고받았던 일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박정희 대통령께서 수경사령관 및 비서실장과 참모장을 제외한 수경사 장교들에 대해서는 수사하지 못하도록 보호조치를 내리셨다고 들었다.

박 대통령은 수경사의 수도서울 방호 및 청와대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막중한 임무와 수경사 장병들의 충성심과 명예심을 배려하셨던 것이리라. 나도 전속부관 출신이라 처음에는 보안사 요원이 미행하는 것을 눈치 챘었는데 얼마 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내 계급수준에서는 윤필용 쿠테타 모의사건의 전말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술을 드시다가 혹시 하신 말씀이 와전(訛傳)되어 이렇게 확대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무리한 수사를 했던 윤장군님의 동기생인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수경사령관에 대한 질투심과 과욕에서 나온 과잉수사가 아닌가하는 의심도 했었다. 단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세등등하던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좌천된 것을 보아 박정희 대통령도 쿠테타 모의가 ‘내부음모’였다는 것을 아신 것으로 보였다. 하여튼 나는 더 이상 수경사에서 근무하는 것이 괴로워서 육군대학 교육입교를 지원했는데 마침 선발이 되어 그해 8월에 악몽(惡夢)을 떨치고 떠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윤 장군님은 ‘형집행정지’로 2년 복역 후 출감하였다. 그동안 나는 결혼도 하고 소령으로 진급도 해서 윤 장군님의 대방동 자택으로 집사람과 함께 인사를 드리러 갔었다.두 내외분이 반갑게 맞아주셨지만 군에서 가장 존경받고 최고실력자이셨던 분이 꿈도 다 못 펴시고 하루아침에 많은 고초를 당하시고 좌절하신 모습을 뵈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후 1년에 한 두 번씩 문안드리다가 세월이 흘러 내가 육군 제5사단장으로 부임했을 때 윤 장군님은 사단을 방문하시고 싶다는 연락을 주셨다. 내가 지휘하는 사단지역은 과거 윤장군님이 지휘하셨던 제20사단지역이었다. 다시 말해 내가 전속부관으로서 윤장군님을 모셨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제5사단은 윤장군님이 6.25전쟁 시 전투했던 부대이며, 박정희 대통령과 첫 인연을 맺었던 부대인데 그의 전속부관이 사단장이 되었으니 감개무량(感慨無量) 하지 않겠는가. 나는 당시 전속부관으로서 붙임성이 부족해서 크게 귀염받지는 못했지만 비록 윤장군님이 군복을 벗으신 후에도 보이지않는 은덕(恩德)을 많이 입었다고 생각했고 감사하고 있다.

내가 현역에 있을 때는 자주 시간을 못냈지만 전역 후에는 비교적 자주 찾아 뵐 수 있었다. 과거 ‘윤필용사건’으로 징역형을 받았던 군후배들이 법정투쟁으로 무죄를 선고받을 때마다 찾아와서 윤장군님께 재심청구를 권유했지만 한사코 거절하셨다고 들었다. 하루는 용기를 내서 윤장군님께 두 가지 요청을 드렸는데 한 건(件)은 박정희 대통령께서 돌아가셔서 안계시니 재심청구를 해서 명예를 회복하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역시 윤장군님은 완강하셨다.

“나는 대통령께 총애를 받던 사람이네. 재판으로 시시비비를 논하는 것은 내가 모신 분께 불충한 일이네. 나는 그분이 주신 것은 상(賞)도 소중히 생각하지만 벌(罰)도 소중히 간직하겠네. 자네들도 재심건은 더 이상 얘기하지 말게”

이처럼 윤장군님은 범인의 도(道)를 넘는 진정한 군인이요 장군의 도를 보여준 것으로 지금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이 숙연해진다. 

결국 이 사건은 윤 장군님께서 2010년 돌아가신 후 아들 명의로 재심을 청구하여 2012년 명예를 완전하게 회복하셨다. 그리고 성남시 분당공원묘지에 안장했던 유골을 동작동 현충원으로 모셔 안장할 수 있었다. 또 한 건은 ‘자서전(自敍傳)’을 후배들에게 귀감으로 남겨달라고 간곡히 말씀드렸다. 그러나 윤 장군님께서는 역시 거절하셨다. 윤장군님께서는 “자서전을 쓰면 결국 자기자랑과 변명을 피할 수 없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박정희 대통령과의 충성심을 지키셨다. 

금년 1월에 당시 윤필용 장군 휘하에서 근무하다가 가까웠다는 인연으로 징역형을 받았던 지성한 회장(예비역 대령, 한성실업 회장)이란 분이 『반추(反芻)』한 책을 펴냈다. 역사를 똑바로 남기기 위해 비사(秘史)를 밝혔다. 드디어 윤필용 사건의 전말을 49년만에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전모는 청와대 박종규 경호실장과 신범식 서울신문사 사장(전 문공부장관)이 과도한 권력욕으로 자신들의 출세에 장애가 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윤필용 수경사령관을 제거하기위해 날조한 음모극이었다는 것이다. 그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진실은 시간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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