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여왕이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보물들까지 팔아가며 콜럼버스를 후원하게 된 숨겨진 이유는 없을까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두 사람 간의 은밀한 감정적 교감 같은 것 말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J 시인이 툭 던진 화두였다. 우리는 상상력과 문학적 감수성을 발휘하여 콜럼버스와 이사벨 여왕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다들 기존에 알고 있던 역사 지식보다는 스페인에 와서 알게 된 야사(野史)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본 영화 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다. 이
리스본에서는 계속 비가 내렸다. 포르투갈 국경을 지날 때만 해도 화창하던 날씨가 리스본에 가까워지자 심술을 부렸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는 쨍쨍하다가도 버스에서 내릴 때만 되면 먹장구름이 몰려와 비를 뿌렸다. 그래도 괜찮아. 우리를 환영하고 축복하는 비라고 생각하자. 세상 모든 일은 해석하기 나름이니까. 리스본 거리의 보도블록은 전부 대리석이다. 좁은 이면 도로는 옛날 대중목욕탕 타일처럼 작게 자른 것을, 대로에는 크고 넓적한 것을 깔았다. 로시우 광장에는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물결무늬로 만들어 놓았다. 멀쩡한 바닥이 움푹 들어가게
오래된 나의 버킷리스트 중에는 미국에 있는 헤밍웨이 기념관에 가보는 것도 있었다. 그건 문학에 대한 열정을 발산하지도, 버리지도 못하던 내가 꾸었던 막연한 꿈이기도 했다. 그 소원은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 가는 바람에 얼떨결에 이루어졌다. 그 당시 나는 유학생 뒷바라지와 육아로 정신 못 차리던 30대 중반이었고, 반복되는 일상에 치어 절절매던 참이었다. 미국 영토의 최남단, 쿠바가 빤히 보이는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 헤밍웨이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내 기대보다 작고 평범한 주택이었다. 1928년에 쿠바를 처음 방문했던 헤밍웨이는 말년
“할머니, 못해?” 2018년생, 다섯 살 재경이가 빤히 쳐다보며 묻는다. 텔레비전에서 무슨 만화를 찾아 달라고 하는데, 리모컨에서 뭘 눌러야 할지 모르겠다. 평소에 우리 집은 전원과 채널, 음량 버튼만 사용하는 터였다. 내가 쩔쩔매는 것을 보고, 82년생 아들이 슬그머니 리모컨을 받아 들고 어디를 누르니 원하는 프로그램이 좌르르 나온다. 순간, 나는 머쓱하고 부끄러워 헛웃음이 난다. 어떻게 조작하는 거냐고 물어보니 대답이 너무 쉽다. “그냥 여기를 이렇게 누르면 돼요.” 하지만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영 못 알아듣겠다. 리모컨에
단톡방이 연신 울린다. 온종일 좋은 글, 유익한 정보가 계속 올라온다. 벌써 몇 번째 같은 것을 계속 올리는 사람도 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딱 맞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좋은 글에 멀미가 날 지경이다. 대충 휙휙 넘기다가 오랜만에 보는 ‘바닥짐’이라는 단어에 눈이 번쩍했다. 바닥짐(Ballast)이란 선박 용어로 적당한 복원성을 유지하고 흘수와 트림을 조절하기 위해 배의 하부에 싣는 중량물을 일컫는 말이다. 배가 전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배 바닥에 채워 넣는 물이나 돌, 물건을 말하는 것이다.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균형을
물 한 병 챙겨 들고 국립대전현충원 둘레길로 산책을 나선다. 야트막한 숲길에 솔잎이 쌓여 있어 딛는 촉감이 폭신하다. 소나무와 대나무,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이다. 깊이 사유하며 걷기에도 딱 좋은 코스다. 묘비들이 작은 꽃다발 하나 품고 일사불란하게 대오를 맞추고 있는 묘역을 지나도 무섭지 않다. 호국영령들이 모여 계신 곳이라 그런지 음습한 기운은 전혀 없다. 밝고 따스한 기운이 가득하다. 죽음까지도 뛰어넘을 수 있는 숭고한 삶의 가치를 생각하며 천천히 걷는다. 괜히 또 가슴이 뭉클하다. 나는 스무 살 즈음에 육사 생도를
손에 태극기를 든 어린이들이 앞장서고, 어른들은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뒤따라 들어왔다.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할 공연팀은 무대 연습을 해 보느라 행사장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고 쓴 현수막이 창공에 휘날렸다. 공연팀의 북소리까지 합세하니 내 심장도 마구 뛰었다. 울컥했다. ‘머내만세운동 104주년 기념행사’가 2023년 3월 25일에 열렸다. 당시 시위 행렬의 시발점이던 고기초등학교 앞에서 출발하여 낙생저수지를 지나 동천근린공원까지 행진하는 코스였다. 현재는 목
텔레비전을 보던 남편이 물어본 그 단어는 내게도 매우 낯선 어휘였다. 새로 시작한 드라마 제목 ‘슈룹’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슈로 시작되는 낱말이기에 요즘 젊은이들이 새로 만들어 낸 신조어일 것이라고 언뜻 생각했다. 은어 아니면 줄임말, 혹은 외국어 합성어인 줄 알았다. 검색해 보니 예상과는 달리 ‘우산의 옛말. 슈룹 爲雨繖.’이라고 나온다. 슈룹이 우산을 일컫는 말인 줄은 정말 몰랐다. 생각해 보면, 우산이란 어휘만큼 함축적으로 쓰이는 이미지도 드물다. 수필의 소재로 많이 쓰였고, 노랫말에서도 다양한 의미로 나타났다.
오전 9시 11분에 출발하는 도버行 뉴저지 트랜짓(New Jersey Transit)은 이 층으로 된 쾌적한 기차였다. 나는 뉴욕 맨해튼 34번가에 있는 팬스테이션에서 열차를 타고 뉴저지 메디슨으로 향했다. 빌딩 숲속에 있는 역(驛)에서 출발하여 링컨 터널을 빠져나오자 풍경이 확 바뀌었다. 그림보다 더 멋진 갈대숲이 기습적으로 나타났다. 나지막하고 한적한 마을 풍경을 따라 기차가 여유롭게 달렸다. 나는 지금 뉴욕 여행 중에 우연히 연락이 닿은 K 목사네 집에 가는 길이다. 이번 여정의 끝자락에 이런 기차여행이 들어 있을 줄은 정말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 집은 항상 명절이 더 쓸쓸했다. 앞뒷집에 사는 작은집 식구들과 차례를 지내고 나면 할 일이 없었다.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내려온 이산가족(離散家族)이라 딱히 찾아가 인사드릴 친척도 없고, 성묘하러 갈 고향의 선산도 없었다. 아버지는 황해도 부농의 아들이셨다. 위로 누나가 둘이고 아버지보다 아홉 살 아래인 작은아버지는 유복자(遺腹子)였다. 집안의 장남인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홀어머니와 함께 집안을 이끌어 나가는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그 바람에 아버지는 아주 일찍 결혼했고, 슬하에 일남 이녀를 두었다. 대대로
거제도엔 그녀가 산다. 겨울도 그리 춥지 않은 자기네 동네로 한번 놀러 오시라는 그녀의 초대엔 진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우린 일상에 매인 탓에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속절없는 세월이 10년 넘게 지나갔다. 이러다간 그녀가 사는 섬에 함께 갈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겠다 싶어 겨울 정기모임을 거제도에서 하기로 했다. 부랴부랴 숙소를 예약하고 2박 3일 일정을 잡았다. 회원들이 전국에 흩어져서 사는 터라 가까운 지역끼리 모여서 승용차로 떠났다. 서울과 인천, 대전에서 출발한 차량 네 대가 진주 근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났다.
마치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온 느낌이다.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멈춰 세웠다. 친구들과 함께 북유럽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슈 미술관에서 관람하고 있었다. 에르미타슈에는 진귀한 미술품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약 300만 점에 달하는 작품을 자세히 다 보려면 매일 8시간씩 봐도 족히 몇 년은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주요 작품만 골라서 구경했다. ‘빛의 화가’라고 불리는 렘브란트의 전시실에는
새벽 두 시 반이다. 아직 깜깜한 밤이지만 사실은 이미 새날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원고와 씨름하는 사이, 나는 내일이라 부르던 시간 속으로 들어왔다. 어제, 오늘, 내일이라 부르는 날들은 절대로 고정된 시간이 아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오늘이 지나고 나면 내일이 된다는 말에 아침이면 눈을 비비며 이렇게 묻곤 했다. “엄마, 오늘이 내일이야?” “오늘이 오늘이지 무슨 내일이야?” “그럼 내일은 언제 와?” “오늘 밤 자고 나면 오지” “어제 분명히 하룻밤 자고 나면 내일이 온다고 했으니 오늘이 내일이잖아?” “엉뚱한 소리 그만하
요즘도 매일 혼자서 탄천을 걷고 있다. 벌써 2년 반이 넘었다. 하필 내가 26년 넘게 살던 정든 도시를 떠나, 낯선 동네로 이사 온 지 몇 달 안 되어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외출할 땐 무조건 마스크를 쓰고, 사람들과 거리 두기를 해야 하는 코로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사회생활은 거의 없었다. 마음 편히 찾아갈 곳도,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교회를 비롯해 문단 활동과 동호회 등 내가 속해 있는 모든 사회가 일순간에 다 멈추었다. 여럿이 모여서 웃고 떠들며 같이 밥 먹고 노는 일은 금기사항이 되었다. 고위험군에 속하는
뉴스 시간마다, 분명한 어조로 용서하겠다고 말하는 흑인들의 차분한 모습과 넋이 나간 듯한 백인의 멍한 얼굴이 텔레비전 화면에 나란히 잡혔다. 정의의 투사를 자처했던 백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그들의 모습은 한동안 계속 방영되었고, 흑인들의 입에서 나온 ‘용서’라는 어휘는 전 세계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2015년 6월 17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 있는 유서 깊은 흑인 교회에 낯선 백인 청년이 찾아들었다. 그는 ‘임마누엘 아프리카 감리교회’의 수요예배에 참석하였고, 예배
고운 눈발이 희끗희끗 소리도 없이 내리는 밤이다. 한껏 부풀어 터질 듯한 둥근 달을 배경으로 소담스레 흰 꽃을 매달고 있는 매화. 그 등걸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있는 참새 두 마리의 모습이 마냥 정겹다. 분명히 눈이 오고 있는데도 전혀 춥게 느껴지지 않는다. 춥기는커녕 오히려 포근하기까지 하다. 소곤소곤 정답고 단아한 풍경이다.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는 한 폭의 한국화 이야기이다. 아직 무명에 가까운 젊은 화가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했다는 이 그림이 유독 마음에 들었다. 거의 무채색에 가까운 매화 등걸과 차분한 달빛과 새들이 만들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난 가이드는 피아노를 전공하는 여학생이었다. 호리낭창 마른 몸매에 목소리도 가늘고, 왠지 불쌍해 보이는 표정에다 말투까지 맥이 없는 아가씨였다, 그녀는 우리가 이모처럼 느껴지는지 버스 타고 마이크만 잡으면 쉴 새 없이 종알종알 자기 이야기를 했다. 관광 안내보다 자기 하소연을 더 많이 했다. 처음 유학 왔을 때보다 러시아의 물가가 얼마나 천정부지로 올랐는지, 집세는 얼마나 비싼지, 한국 음식은 또 얼마나 먹고 싶은지 등등. 그녀와 함께 보낸 상트페테르부르크 관광 일정이 무사히 다 끝났다. 우리는 4시 4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비겔란 조각 공원은 해마다 200만 명 이상의 국내외 관광객이 찾아오는 관광명소다. 오슬로시에서 제공한 약 10만 평 부지에다 비겔란의 작품만으로 조성해 연중 매일 24시간 동안 방문객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총 212점이나 되는 조각품의 배치는 물론 가로수와 화단의 위치까지 모두 비겔란이 기획했다. 이 공원의 가장 큰 특징은 한 사람의 조각가가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조각 공원에 있는 여러 작품 중 하이라이트는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모노리스 석탑이다. 이 작품은 높이 17.3 미터, 총 무
우린 그때 쉰 살 고개를 막 넘어가는 중이었다. 셋 다 현직(現職)이었고, 방학하기만을 기다렸다. 친구들이 차를 몰고 서울에서 대전까지 내려왔다. 여기서부터는 내 차로 바꿔 타고 가기로 했다. 일기예보에서는 오후부터 전남 지방에 집중호우가 내릴 것이라고 계속 경고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고 순천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별로 늦지 않은 점심을 먹게 되었다. 허름해서 오히려 정겨운 맛집이었다. 갖가지 곰삭은 젓갈과 나물과 밑반찬들이 수십 가지 놓인 밥상을 받으니 환호성이 절로 나왔다. 우린 그 자리에서 이번 여행의 주
이름 없는 사람들의 전쟁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름을 찾기 위한 전투였다. 나는 요즘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인 싱어게인(Sing Again)에 푹 빠졌다. 대중적 인지도를 얻지 못한 무명 가수들이 서바이벌 과정을 통해 자기 이름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이었다. 모든 참가자는 최종 10인에 들기 전까진 7호, 31호, 34호 가수 등 그냥 번호로만 불렸다. 참가자 중엔 여태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나왔느냐고 감탄하게 되는 실력자들이 많았다. 오랫동안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해온 재야의 고수들도 꽤 있었다. 아무리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