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육사를 나왔다. 내 이마에는 언제나 육사 레떼루(라벨)를 붙이고 다닌다. 내 어깨에는 대령이라는 계급장이 붙어 있다. 육사 레떼루와 어깨 위의 계급장은 나의 힘의 원천이었다. 발걸음 하나 띨 때마다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이 레떼루 때문에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왔다. 이 덕분에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최대의 인정을 받았다. 그것이 레떼루의 힘이었다. 육사에는 다른 대학과는 달리 3금 제도가 있고, 명예 제도라는 게 있다. 그 당시 술과 담배와 여자는 금기로 걸리면 용서 없이 퇴학당했다. 특히 정직과 거짓은 명예 제도의 근본이다
설날 아침에는 으레 만둣국을 먹는다. 우리 집은 평양에서 6·25 때 피난 내려와 사는 집안이다. 설날이면 으레 만둣국을 먹는다. 어려서 설이 가까워질 때면, 어머니는 늘 평양에서 먹던 그대로 만두를 빚어 끓여주었다. 겨울이 다가오면 마치 김장김치 담그듯 수북이 만들어 며칠을 두고 먹곤 했었다. 우리 집은 피난 내려와 부산 용두산의 판잣집에서 살았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끝날 무렵 서울로 이사 왔다. 지금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자리에 서울운동장이 있었다. 그 뒤편에 세 들어 살았었다. 그때는 다 가난했다. 늘 배가 고팠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상도 많이 변했다. 내가 어려서 어머니한테 많이 듣던 말이 사내가 시장바구니 들고 다니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에 대한 바람도 시간의 흐름 속에 다 묻혀버렸다. 어머니의 당부를 거역하며 불효막심한 아들이 되어 오늘도 장바구니를 들고 동네 슈퍼를 찾았다. 이런 일이 나의 일상이 되어버린 지는 벌써 십수 년이 지난 오랜 일이다. 세상이 바뀌니 사람들의 생각도 다 바뀌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미성년자가 있으면 어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호되게 나무랐다. 또 학
유난히도 무덥던 어느 여름날 청계천에 나갔다. 맑고 시원한 물에 유혹되어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첨벙’ 발을 담갔다. 시원하다. 금방 몸 전체가 시원해진다. 어린아이처럼 물장구를 쳤다. 물속에선 팔뚝만 한 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쳐 다닌다. 서울 한복판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두 손으로 시원한 물을 떠서 얼굴을 적셨다. 어릴 적 내 모습이 추억으로 떠오른다. 어려서 나는 청계천 옆에서 살았다. 지금은 없어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 뒤편이었다. 어린 시절 보았던 청계천은 그렇게 깨끗하지도 맑
오래전 을지로 6가에 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 갔었다. 마치 우주선과 같은 모양으로 멋있게 지어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부드러운 곡선으로 푸른 잔디밭이 있고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공원도 있어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이었다. 내부에는 역사관, 기념관 같은 볼거리가 있고 편안히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에 푹신한 소파들도 놓여 있다. 또한 먹거리도 풍부하고 쇼핑 명소도 있어 하루를 보내는 데는 아주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좋은 곳이지만, 내게는 아주 특별하고도 많은 추억을 가진 장소이기에 더더욱 좋은
지난주 친구 셋이 만났다. 다들 당구를 좋아하는 터라 오랜만에 당구를 치고 오후 5시에 끝냈다. 코로나 4단계 거리두기 제한으로 저녁 6시 이후에는 두 명만 함께 앉아 식사할 수 있기 때문에 일찍 끝낸 것이다. 친구가 셋이다 보니 서둘러 가서 6시까지 식사를 마치기 위해서이다. 날이 하도 무더워 숨쉬기조차 힘든데 게다가 마스크까지 쓰고 있으니 더운 음식은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시원한 얼음이 둥둥 뜬 메밀소바를 먹으러 갔다. 입구에서부터 무슨 죄지은 사람 같다. 열 체크한다고 카메라 앞에 섰다. 카메라 화면에 얼굴을
언젠가 딸아이와 함께 경복궁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광화문 앞에서 딸아이가 물었다.“아빠! 광화문이 무슨 뜻이야?”순간 머리가‘띵’했다.‘아니~ 대학원을 나오고 석사까지 받은 아이가 그것도 모른단 말이야?’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기야 학교에서 한자(漢字)를 배운 적이 없으니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있으랴. 오래전 KBS에서 방영했던 사극‘정도전’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었다. 정도전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를 도와 경복궁을 창건하고 남쪽에 큰 문을 세우면서‘사정문(四正門)’이라 명명했다.‘네 가지 바른 일’이란 뜻으로 풀
세월이 어수산하니 하루가 멀다 하고 대형화재가 발생하고 있다. TV에 비치는 불타는 광경을 보니 옛 어린 시절 부산 용두산에서 살던 생각이 난다. 어린 내가 어머니 등에 업혀 부산에 내려온 것이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용두산 판잣집에서 살았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어머니가 전쟁을 피해 혈혈단신으로 낯선 땅 부산까지 내려와서 어디 한 곳 발붙일 데가 있었으랴! 피난민들이 하는 대로 용두산 언덕배기에 잠이라도 자야겠다고 만든 곳이 판잣집이다. 그런 집을 ‘하꼬방’이라고 불렀다. 일본어로 상자라는 뜻의 방(房)이란 말이다. 나무
누구나 그렇듯이 나 역시 어려서 호기심이 참 많았다. 6·25전쟁이 막 끝난 후라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상황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유일한 재미는 라디오 듣는 것이었다. 라디오에서는 늘 노래가 흘러나오고 뉴스도 나오고 드라마도 나왔다. 라디오를 들으며 나는 라디오 안에 아주 작은 사람들이 들어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날 나는 작심하고 라디오를 뜯어봤다. 그 안에는 가느다란 전깃줄과 작은 유리 전구들이 많이 꽂혀있었다. ‘엥? 이게 뭐야?’ 허탈했다. 나는 어느 것에나 호기심이 많던 아이였다. 평양에서 사범학교를 나와 선생
어머니는 늘 말이 없고 조용하셨다. 갸름한 얼굴에 몸은 가냘프고 하늘하늘했다. 아마 요즘 태어났다면 숱한 남자들의 애간장을 꽤나 녹였을 법도 하다. 까만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즐겨 자주 입어서인지 마치 한 마리 학과 같은 모습이었다. 어려서 나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애처롭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 입학식이나 특별한 날에도 어머니가 나와 함께 학교에 가려 나서면 나는 한사코 혼자 가겠다면서 내달렸다. 선생님을 만나고 친구들이 볼 어머니의 모습이 창피했었다. 어머니의 내성적인 성격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어머니는
요즘 나는 노래를 부른다. 작년 3월부터 부르기 시작해서 지금껏 300여 곡을 불렀다. 직접 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려왔다. 노래를 부르고 그에 맞는 사진과 영상들을 직접 찍거나 인터넷에서 찾아 동영상으로 편집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하나부터 열까지 ‘나’ 홀로 작업이다. 시간도 걸리고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완성하고 나면 마치 영화감독이 한 작품을 완성한 것처럼 황홀감에 도취하곤 한다. 노래를 아무리 열심히 불러도 동영상을 만들지 못하고 남기지 못한다면 내가 노래를 부르는지 누가 알기나 하랴? 작고한 코미디언 서영춘이
몇 년 전, 나는 코칭하러 다녔다. 어느 날 가방을 챙기는데 아내가 물었다. “돈은 받아요?” “돈은 무슨∼ 무료봉사지!” 늘 하는 말이다. “돈도 안 받으며 뭐 하러 다닌담.” 아내 얼굴에 쓰여 있다. ‘봉황의 마음을 참새가 어찌 알랴!’ 스스로 위안했다. 오래 전 현직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인생의 후반부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생의 전반부는 남으로부터 받는 삶이다. 인생 2막은 남을 위해 뭔가 주는 삶을 살기로 했다.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인생이다. 그 경험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기로 했다. 늦은
어느 해보다도 무더운 불볕더위가 예상되는 올 여름, 특정 날짜는 이미 마감된 상품들이 많을 정도로 여름휴가 예약이 한창이다. 바캉스 준비에 자연히 찾게 되는 여행사. 실제로 여행사 팀장들은 올 여름 휴가 지역으로 어느 곳을 추천할까? 4, 5일 정도 짧고 알차게 즐길 수 있는 단거리 지역에서부터 6일에서 8일 정도 여유를 두고 즐길 수 있는 장거리 지역까지, 여행사 팀장들이 선정한 올 여름 휴가 추천 지역이다.- 단거리 지역동남아 - 마지막 남은 천국 ‘필리핀 보라카이’마지막 남은 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때 묻지 않은 환상적인 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