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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파문(破門).가출.기차역에서의 최후

[연재 11회] 코니의 소설

  • 기사입력 2022.03.18 20:01
  • 기자명 작가 이정식

1882년 자신의 과거와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반성 속에 《참회록》을 낸 후 톨스토이의 문학 활동은 종교적・정신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61세 때인 1889년에 집필에 착수해 10년 후인 1899년 세상에 나온 《부활》은 그의 종교적・정신적 변화 의 실체가 담긴 결정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와 더불어 톨스토이 의 3대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부활》은 톨스토이가 1887년 자기 집에 손님으로 머물렀던 유명한 법률가 코니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착상한 소설이다. 훗날 톨스토이는 스스로 《부활》을 ‘코니의 소설’이라고 불렀다. 코니는 톨스토이에게 1870년대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했던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취한 손님으로부터 100루블을 훔친 죄로 수감된 핀란드인 창녀의 이야기였다.

◉ 코니의 소설

로잘리야 오니라는 이름의 이 여인은 부유한 지주로부터 별장을 임 대하고 있던 홀아비의 딸이었다. 중병이 든 아버지는 자신의 병이 회복 불가 능한 것임을 알게 되자 별장 주인인 여지주에게 자신의 하나뿐인 딸을 보살 펴줄 것을 부탁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 로잘리야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여지주의 부유한 가정에서 양육되었다. 그러다가 16세가 되었을 때 여지주의 친척인 한 청년 이 그녀를 유혹한 후 버렸다. 임신한 그녀는 거리로 쫓겨났고, 곧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로잘리야의 인생은 망가졌지만 청년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이 그 청년을 절도 혐의로 기소된 한 창녀의 지방법원 재판의 배심원으로 이끌었다. 청년은 자신의 젊은 시절 이기적인 열정 의 희생물인 로잘리야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마음으로 그는 로잘리야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그 제안을 받아 들였지만 감옥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뒀다. 톨스토이는 그 이야기를 코니에게 기록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2년 후 톨스토이는 그것을 소설로 쓰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처음 듣고 소설로 완성하기까지 실로 12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바로 《부활》이다.

▲ 집필중인톨스토이의모습(그림)

《부활》에서 여주인공 카츄샤는 실제 인물 로잘리야와 달리 그녀를 석방시 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 네흘류도프 공작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유형을 떠나면서 만난 정치범 시몬손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시베리 아행을 같이한다. 

◉ 집필을 중단했다 다시쓴《부활》

톨스토이는 1896년경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본질은 무엇에 있는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등을 쓰기 위해 《부활》의 집필을 중단했다가 1898년 후반에 다시 쓰기 시작했다.

《부활》을 다시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당시 교회 의식에 불참하고 병역을 거부함으로써 당국과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시베리아 유형, 투옥 등의 탄압을 받고 있던 두호보르(성령 부정파) 교도들을 물질적으로 돕기 위해서였다. 톨스토이의 제자이자 추종자로서 톨스토이의 부인 소피야와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던 체르트코프 등이 두호보르 교도들을 돕는데 발 벗고 나섰다. 러시아 정부는 마침내 여론의 압력에 밀려 두호보르 교도들의 해외 이주를 허용했다. 톨스토이는 이들의 해외 이주에 필요한 자금을 도와주기 위해 1898년 7월 체르트코프에게 《이르체니예프》, 《부활》, 《세르게이 신부》 등 3 개의 소설을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영국이나 미국의 언론에 팔기를 원한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 톨스토이의 집필때 사용했던 책상, 하모브니키 저택 박물관에 있다.

톨스토이는 《부활》을 완성하기 위해 유형 생활의 체험을 쓴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도 여러 번 읽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애는 검열이었다. 《부활》의 129개 장 가운데 당국 의 검열을 통과한 것은 25개 장뿐이 었다. 《부활》은 검열 때문에 많은 삭제와 수정이 가해진 후 비로소 출판 될 수 있었다.

톨스토이는 1899년 10월 18일자 일기에 “부활을 끝냈다”며 이렇게 적었다.

《 부활》을 끝냈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대로 수정되지 못했다. 성급한 감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손을 뗐고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부활》의 출판으로 번 돈을 모두 두호보르 교도들의 해외 이주를 위한 자금으로 기증했다. 소설을 끝낸 1899년, 약 7천300명의 두호보르 교도가 캐나다로 이주했다.

그러나 소설 《부활》로 톨스토이는 일대 대사건을 겪게 된다. 톨스토이는 그동안 러시아 정교회의 부패와 권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는데 검열을 거치면서 수없이 많은 수정이 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에는 교회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많은 내용이 들어 있다. 다음은 소설 속의 정교회 전례에 대한 비판이다.

이 전례에 참석한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지금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행해지는 이 의식이 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고 조소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사제가 사람들 앞에 들고 나와 입맞춤하게 한, 끝에 칠보 메달이 달린 금 십자가만 해도 그리스도가 지금 그와 같은 일이 행해지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못박혀 죽게 된 형구(刑具)를 본뜬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빵과 포도주를 먹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여기는 사제들은 실상은 그리스도가 아닌 신자들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것이라는 데는 미처 생각이 닿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자기와 같이 생각한 ‘불쌍한 사람들’을 희롱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펼친 복음을 감추어 그들에게서 최대의 행복을 빼앗고 더욱 참혹한 괴로움 속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부활 1》, 박형규 옮김, 민음사, 2003)

러시아 정교회는 마침내 1901년 2월 22일 톨스토이에 대해 ‘파문’을 결정 한다. 

▲ 모스크바의 아름다운 정교회 성당 

◉ 파문후 곳곳에서 항의 시위

러시아 정교회 종무원은 톨스토이에 대한 파문 결정 후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다.

(……) 그리스도 교회는 처음부터 여러 이단자나 가짜 교사들의 비난과 공격을 받아 왔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위에 건설된 교회의 기초를 흔들려고 했다. 하지만 신성한 교회는 영원히 쓰러지지 않는다. 어떤 힘도 교회를 이기지는 못한다. 그런데 가짜 교사가 또 나타났다. 백작 레프 톨스토이가 그 사람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로서 러시아에서 태어나 정교의 세례를 받은 자인데 그 오만한 지력(知力)에 유혹되어 (……) 그를 길러준 정교회를 거부하였고, 하느님이 주신 재능을 그리스도와 그 교회 에 어긋나는 사상을 세상에 보급시키는 데 쓰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가 제시한 파문의 근거는 다음의 여섯 가지였다.

첫째, 톨스토이는 삼위일체의 살아 있는 하느님을 부정했다. 둘째, 그는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하느님의 아들임을 부정했다. 셋째, 그는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의 동정녀 임신과 처녀성을 부정했다. 넷째, 그는 사후의 생과 죄에 대한 심판을 부정했다. 다섯째, 그는 성령의 자비를 거부했다. 여섯째, 그는 성찬식의 성스러움을 부정했다.

톨스토이가 파문되었다는 뉴스는 사회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곳곳에서 정교회의 조치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반면, 톨스토이의 집에는 그를 위로하기 위한 엄청난 수의 손님들과 편지, 꽃다발이 날아들었다. 아내 소피야는 당시 상황에 대해 “며칠간 우리 집은 일종의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사람들은 톨스토이가 그러한 문제들 때문에 파문당했다기보다는 러시아 정부와 정교회가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비판을 가해 온 톨스토이를 증오했 을 뿐 아니라 심각하게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톨스토이가 파문을 당한 지 100년째 되던 해인 지난 2001년 그의 손자인 톨스토이 박물관장 블라디미르 톨스토이가 러시아 정교회에 서한을 발송했다. 그는 서한에서 “1901년 2월 22일, 러시아 정교회에서 결정한 톨스토이에 대한 파문은 러시아 역사에서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았다”면서 “정교회 교인들은 하느님을 거부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민족의 천재이고 예언가이며 민족 문화의 자존심이자 영광으로 굳어진 사람을 거부하기도 어렵다”며 러시아 정교회에 톨스토이와의 화해를 촉구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 정교회 측은 “러시아에서는 누구나 톨스토이를 작가로 존경하지만 톨스토이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종교관에 대해 회개한 적이 없으므로 이 문제를 다시 토론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는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 

◉ 한국에서는<카츄샤>로 오랫동안 인기 누려

톨스토이의 《부활》이 우리나라에서는 <카츄샤>란 제목의 연극과 영화로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다. 앞서 일본에서 는 1910년대에 일본의 시마무라 극단이 《부활》을 같은 제목으로 연극 무대에 올려 전국적인 붐을 일으켰다. 당시 일제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소개되어 우리나라에서는 <카츄샤>라는 이름의 신파극으로 공연되었다. 일본의 <부활>이나 조선의 <카츄샤>나 모두 소설 《부활》에 담긴 교훈적이고 계몽적인 내용은 빼고 비련의 주인공 카츄샤만을 부각시킨 통속적 내용의 연극이었다. 해방 후에는 1960년에 유두연 감독에 의해 영화 <카츄샤>로 만들어졌다. 당대 최고 배우였던 최무룡과 김지미가 남녀 주연으로 출연했다. 내용은 《부활》을 한국판으로 각색한 것이다. 《부활》의 네흘류도프가 서울에서 공부하다 내려온 시골 부잣집 아들 ‘원일’로, 카츄샤가 이 집의 허드렛일을 하는 ‘옥녀’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영화 주제가였던, 송민도가 부른 ‘카츄샤의 노래’ 도 크게 히트해 음반도 많이 판매되었다. 

▲ 김지미가 출연한 영화 <카츄샤>의 장면을 표지로 한 ‘카츄샤의 노래’ LP음반 (1960년대)

한국에 톨스토이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초였지만, 지식인들 가운데서는 이보다 앞서 톨스토이에 심취한 이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다. 두 사람 다 일본 유학시절 톨 스토이에 깊이 빠져들었다. 최남선은 1910년 톨스토이의 사망을 전후해 그가 발행하던 <소년> 잡지에 두 차례에 걸쳐 톨스토이 특집을 싣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위대한 사상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특집을 실은 이유를 설명했다. 최남선과 이광수는 톨스토이를 ‘그리스도 이후 최대의 인격자’로 보았다.

이 두 사람처럼 톨스토이에 열광한 이들이 있는 반면에 당시 국내 지식인 중에는 톨스토이의 무저항주의나 병역 거부, 납세 거부 등 반국가주의 사상 에 대해 우려하는,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반대하며 반전론을 외쳤던 톨스토이는 생전에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쟁터가 되었던 조선의 운명에 대해서도 염려했다. 일 본의 총리대신이었으며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조선을 지배하려는 그는 타락한 무도(無道)의 인간”이라고 비판했다는 말 도 전해진다. 

◉ 새벽에 몰래 가출을 감행

톨스토이는 노년에 들어 자신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눠 주고 싶어 했다. 이미 소설 《부활》에서 네흘류도프를 통해 강조한 내용이다. 아내 소피야는 “재산을 다른 사람들에게 다 주면 남은 자식들은 어떻게 되느냐?”며 동 의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 등으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랫동안 갈등이 계속되었다. 

  

톨스토이는 마침내 1910년 10월 28일 새벽, 가출을 감행했다. 톨스토이의 가출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 다. 오래전인 1884년 여름, 처음으로 가출을 시도해 도보로 한참을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 1897년에는 가출을 결심하고 소피야에게 편지까지 써놓았다가 그만 둔 적도 있다.

톨스토이는 최후의 가출 석 달 전 쯤인 1910년 7월 22일, 야스나야 폴랴나 인근의 숲속에서 최측근 체르트코프 등이 참석한 가운데 모든 문학 작품과 문서의 소유권을 막내딸 알렉산드라(샤샤)에게 넘긴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톨스토이는 알렉산드라가 그의 소유의 모든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눠 주라는 자신의 유지를 가장 잘 실천할 적임자로 생각했다. 물론 소피야나 대부분의 다른 가족들은 모르게 한 일이다.

그러나 소피야는 유언장이 작성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그것을 찾아내려고 애썼고, 이로 인해 톨스토이와의 갈등은 한층 깊어졌다. 가족간의 문제까지 간섭해 온 체르트코프에 대한 소피야의 증오심도 극에 달했다. 체르트코프는 톨스토이보다 더한 톨스토이주의자였다.

톨스토이의 가출에는 딸 알렉산드라와 주치의이자 친구인 마코비츠키가 함께 했다. 처음에는 셰키노 역에서 1등칸을 탔던 모양이다. 하지만 톨스토 이는 고르바체보부터는 3등칸을 타자고 했다. 

3등칸은 사람들로 가득해 비좁기 짝이 없었다. 승객의 반은 담배를 피워 대고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마코비츠키가 톨스토이가 앉은 의자에 망토를 깔아 주려고 했으나 톨스토이는 거절했다.

▲ 톨스토이와 막심 고리키. 고리키는 가끔 톨스토이를 찾아왔다 

톨스토이는 첫날 밤 8시쯤 오프치나 수도원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그는 생애 마지막 글이 된, 사형의 폐지를 주장한 《유효한 수단》의 원고를 마무리했다. 톨스토이는 다음 날인 29일 오후에는 여동생 마리야가 살고 있는 샤모르 진스카야 수도원을 찾아가 동생과 즐겁게 저녁을 같이하며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농가를 한 채 빌려 당분간 지낼 생각을 했다. 10월 31일 그는 소피야에게 “나는 온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당신을 가엾이 여기고 있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는 할 수 없었소. (……) 어쩌면 우리에게 남겨진 생의 이 몇 달간이 그간 살아온 수십 년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 시간들을 값지게 보내야 하는 것이오”라고 가출한 이유를 밝히면서 소피야가 자신을 찾으려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 아스타포보 역에 내리다

그런데 소피야가 그를 찾아 떠났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톨스토이는 급히 마부를 고용해 코젤스크 역으로 향했다. 코젤스크 역에서 볼로보예까지 간 후 여기서 로스토프-돈까지 가는 열차를 타기로 했다. 열차에는 어떻게 알았는지 한 무리의 기자들과 탐정들이 올라타 있었다. 그의 가출은 이미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러시아는 물론 세계적인 뉴스가 된 것이다.

톨스토이의 상태는 이날 오후부터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이날 오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오후부터 열이 오르고 오한이 들었다. 체온이 38.5도까지 올라갔다. 주치의 마코비츠키는 이 상태로 여행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다음 역은 아스타포보였다.

아스타포보 역에 내려 마코비츠키는 역장 오졸린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역에 딸린 자신의 작은 방을 톨스토이에게 제공했다. 곧 스토코프스키란 의사가 달려왔다. 그는 톨스토이를 진단하고는 진료카드에 이렇게 적었다.

이름 : 톨스토이 L. N., 나이: 82세, 지위 : 백작, 12번 열차의 승객, 병명 : 폐렴

톨스토이가 심각한 폐렴 증세로 아스타포보 역장 관사에 앓아누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취재진과 가족, 친지, 추종자들이 이 작은 마을에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했다. 

체르트코프와 큰아들 세르게이, 조수 세르겐코가 먼저 달려왔다. 이어 부인 소피야도 가족들과 도착했으나 톨스토이가 흥분할 것을 우려해 그녀를 방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 같은 와중에 러시아 정교회는 톨스토이가 죽기 전에 그를 방문해 그에게서 참회의 말을 얻어내려고 시도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9년 전 톨스토이를 파문했지만 그가 참회하지 않고 죽을 경우 교회에 이득이 될 것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만약에 톨스토이가 죽음에 임박해 참회했다고 사람들에게 선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교회의 권위를 드높이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정교회의 안토니 대주교는 수도원장 바르소노피 신부를 아스타포보로 파견해 톨스토이가 참회하고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또한 정부에도 이득이 되는 것이었으므로 이 일은 당국과도 깊은 교감 속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오래전부터 정교회 측이 자신이 죽기 전에 참회에 관한 전설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자신의 일기장에, “죽음을 앞둔 내가 참회를 하고 성찬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것은 모두 거짓이다”라 고 그 같은 일을 경계하는 글을 남겼다.

톨스토이의 측근들은 그의 뜻에 따라 아스타포보에 온 바르소노피 신부가 톨스토이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오려는 것을 막았다. 결과적으로 정교회 측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 휴식을 취하고 있는 톨스토이(러시아 최초의 천연 색 사진 중 하나)

◉ 미래의 작품을 위해 신문기사도 챙겼으나

톨스토이는 상태가 조금 나아질 때면 자신에 대해 쓴 부분을 제외한 신문의 주요 기사들을 읽어달라고 했다. 관심을 끄는 기사는 오려서 서류 파일에 넣어달라고 하기도 했다. 병이 나으면 미래의 작품을 위해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톨스토이는 소피야와 자녀들에게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11월  3일까지는 일기도 썼다.

그는 9년 전에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일이 있었다. 당시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가스프라에서 장기간 요양 후 건강을 회복했었다. 그러므로 아스타포보에서도 회복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 던 것 같다.

당국은 톨스토이의 친지들이 역에 머무는 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방해했다. 그러나 랴잔-우랄선 철도 관리자였던 마트레넨스키 장군 같은 이는 아스타포보 역을 지나는 모든 기차에 기적 소리를 내지 말 것 을 지시하기도 했다.

의사들은 러시아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기자들을 위해 환자의 용태를 적은 메모를 하루에도 몇 번씩 문 앞에 걸어놓았다.

▲ 톨스토이 부부.톨스토이의 마지막 사진이다(1910.9.25 

◉ 불멸의 작품을 남기고 가출 10일만에 영면의 세계

그런데 11월 5일 밤부터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7일 새벽 2시경 부터는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맥박이 약해지고 심장의 고동이 희미해졌다. 마코비츠키가 포도주를 탄 물을 톨스토이의 입에 대고 “레프니콜라예비치, 물을 좀 마셔봐요”라고 말했다.

톨스토이는 잠시 눈을 뜨고 물을 한 모금 마셨으나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임종이 임박해 보였다. 체르트코프 등 병상을 지키던 이들이 그제야 소피야를 방에 들어오도록 했다. 새벽 5시쯤 가족들을 모두 방 안으로 불렀다. 

6시 5분, 가늘게 숨을 이어가던 톨스토이가 크게 마지막 한숨을 내쉬었다. 불멸의 작품들을 남긴 위대한 작가이자 사상가였던 톨스토이는 가출한 지 열흘 만에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러시아 국무회의는 이날 전원 기립해 조의를 표했고, 의회도 이날 하루 휴회했다. 차르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의 가장 융성한 시대의 모습을 예술 작품에 묘사한 위대한 문호의 죽음에 충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한다”라고 발표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카프리 섬에 망명 중이던 막심 고리키는 톨스토이의 사망 소식을 듣고 “위대한 영혼이 떠났다. 러시아 전체와 러시아적인 모든 것을 품었던 영혼이 떠나갔다”라고 애도했다. 

톨스토이의 유해는 이튿날인 11월 8일 기차로 야스나야 폴랴나로 운구되었다. 톨스토이가 마지막 부탁으로 자신의 관에 꽃을 바치지 말라고 했으나 그의 유해가 집으로 가는 길 곳곳에는 꽃을 들고 몰려든 애도객들로 붐볐다. 당국은 장례식이 반정부 시위로 발전할 것을 우려해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야스나야 폴랴나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걸어서 야스나야 폴랴나까지 찾아왔다. 

톨스토이의 장례식은 생전 본인의 희망에 따라 종교적 의식 없이 거행되었다. 유해는 집 가까운 숲에 아 무런 표지도 비석도 없이 묻혔다. 톨스토이가 임종을 맞은 아스타 포보의 작은 방은 곧바로 기념관으로

▲ 모스크바 톨스토이 박물관 정원의 톨스토이 동상 앞 에서 필자(2017년 5월초)  

바뀌었다. 방 안의 모든 세간들을 비롯해 방의 모습들은 원형 그대로 남겨졌다. 위대한 인물이 마지막으로 머문, 아스타포보 역에 딸린 이 방은 톨스토이를 따르는 이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한편, 톨스토이의 유언에 따라 출판과 문서에 대한 모든 저작권을 상속받은 막내딸 알렉산드라는 여기에서 생긴 돈으로 야스나야 폴랴나의 땅을 가족들로부터 사들였다. 알렉산드라는 그 후 집과 정원 등 일부만 어머니 소피야 앞으로 남겨 두고, 나머지 땅은 매각 처분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 농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톨스토이의 생전의 소망이 그의 사후 이렇게 실현된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귀족과 지주의 모든 재산이 몰수 되었으므로 토지 분배에 대한 톨스토이의 유언은 그야말로 앞을 내다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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