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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촌장

연재 26회

  • 기사입력 2022.03.26 23:33
  • 기자명 이철원 전 아라우 부대장
▲ 격오지 마을에 급수를 지원하고 있는 아라우부대원 

필리핀의 행정단위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내려오는 Province( 주) City(시), Municipality(군/읍), Barangay 등 네 개로 구성되어 있 다. 최소 행정단위인 바랑가이는 1,000명 이상 주민이 사는 마을단위로 형성되어 우리의 리里나 동洞에 해당되며 바랑가이의 장長을 ‘바랑가이 캡틴’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촌장’이라고 불렀다. 바랑가이는 주민들에게 정부의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정창구의 역할과 치안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 뿐 아니라 바랑가이 캡틴은 주민간의 분쟁을 조정하고 범죄자는 마을 감옥에 가두어 놓기도 한다. 통상 촌장이 마을에서 가장 부자이고 여러 가지 권한을 행사하므로 촌장의 눈 밖에 나는 사람은 마을에서 살기가 쉽지 않으며  촌장을 통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마을에 가면 촌장이 일하는 마을회관(바랑가이 홀)을 중심으로 보건소, 노인정, 유치원, 감옥, 초등학교 등이 모여 있다. 그 주변에 대개 시멘트로 포장한 농구장과 성당, 간혹 시장이 형성되는 공터가 있다. 이렇게 과거 식민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바랑가이가 만들어지다 보니 그 전통이 아직까지 이어져 마을의 모든 활동이 마을회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의료지원이나 영화상영, 구호품을 분배시 에는 항상 마을회관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태풍으로 인해 거의 모든 마을회관이 피해를 입어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으나, 국가에서 예산 지원이 지원이 안되다 보니 촌장들이 우리에게 복구지원을 요청하여 보건 소와 노인정, 유치원 위주로 복구해 주었다. 

파병 4개월이 지난 어느 날 현지 여자가 위병소에 와서 부대장에게 꼭 전해줄 것을 부탁하며 편지를 남기고 갔다. 편지 내용을 보니 “마을 촌장이 아라우부대 의료지원팀을 부르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며 집집마다 돈을 걷고 있습니다. 한국군을 부르는데 정말 돈이 필요한 것인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제가 여기에 온 것을 촌장이 알면 마을에서 살 수 없으므로 비밀로 해 주세요”라는 내용이었다. 우리의 복구 지원활동이 주민들에게 알려지고 격오지 마을 위주로 의료지원을 나가다 보니 촌장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부대에 와서 “우리 마을에 의 료지원을 해 주세요”라고 경쟁적으로 요청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가 작전지역 내에 있는 200여 개의 바랑가이를 파병기간 중 전부 지원 할 수 있도록 나름대로 우선순위에 따라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고 있었지만 혜택을 받지 못한 마을에서 당장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정글 속의 바랑가이는 전기도 안 들어오고 전화와 교통수단도 제한 되어 외부와 연락이 단절된 상태에서 살다보니 이러한 일이 발생할 개연성이 있는데 사전에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 나는 이 사 항이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현지 통역을 불러 “마을에 가서 확인해 보 라”고 하였다. 또 다른 마을에서도 이러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어 대책 마련이 필요하였다. 이 마을은 부대에서 2시간 떨어진 해안 마을로 작전지역은 아니었다. 그런데 실제 촌장이 한국군 의료팀을 부른다며 마을 주민들에게 돈을 걷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나는 경찰서장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며 “사실이 맞는지 정확히 확인을 하여 범죄행위가 있으면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부탁합니다” 라고 요청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마을은 촌장이 구호품 분배를 불공정하게 하여 많은 주민들이 촌장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 전에도 구호단체가 마을에 올 때마다 촌장이 주민들에게 돈을 걷은 것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경찰조사가 시작되자 촌장이 도망가서 시장이 임시 촌장을 임명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사건으로 나는 “아라우부대가 절대 돈을 받지 않고 재해복구와 의료지원을 하고 있다”라는 것을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홍보하였다. 시 장과 군, 경찰과도 협조하여 이러한 사실을 주민들에게 알리도록 요청하였다. 어느 사회를 가든지 ‘지도자를 잘 만나야 주민들이 행복한 삶을 사는데 이런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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