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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 톨스토이로 인해 방랑의 길로

[연재 17회] 중 3학 때 부터 톨스토이에 심취

  • 기사입력 2022.04.29 12:01
  • 기자명 이정식 작가

◉ 톨스토이 주의자가 되다

이광수는 유학시절 톨스토이에 깊이 빠져든다. 중학교 3학년 때 일본인 동급생 야마사키 도시오(山峙俊夫)가 빌려준 톨스토이의 《나의 종교》를 읽고 나서부터다. 이 시절 이광수에게 톨스토이는 예수, 석가에 버금가는 살아 있는 성인이요, 위인이었다. 이광수가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게 된 것도 톨스토이의 저작을 통해서였다.

그는 톨스토이처럼 되고 싶었다. 그가 문학을 하게 된 것도 톨스토이의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광수는 후일 “문학은 철학, 종교와 동일한 사명을 가진다”라고 주장했는데 이 역시 톨스토이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광수는 톨스토이에 얼마나 빠져 있었는가? 톨스토이에 대해 이광수가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가를 보여주는 네 편의 글이 있다. ‘톨스토이의 인생관’(<조광> 창간호, 1935), ‘두옹(杜翁)과 나’(<조선일보>, 1935. 11. 20), ‘진리 인’(1935. 11. 23), ‘두옹(杜翁)과 현대’(1935. 11. 26~27) 등이다. 

톨스토이에 대한 이광수의 생각이 가장 적나라하게 보이는 글은 ‘톨스토이의 인생관’이다. 여기에서 그는 톨스토이를 석가와 예수의 반열에 올려놓 고 있다.

톨스토이는 지구가 산출한 가장 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예수 이후의 첫 사람이라고 하면 누가 반대할까. 그러면 그의 큼이 어디 있었는가. 그것은 그의 위대한 인류애의 공상(空想)에 있었다. 석가나 예수가 그러하였던 것 모양으로. (……) 그는 소설을 쓰고 우화를 쓰고 논문을 썼다. 그것은 다 인류를 진리의 정로(正路)로 이끌려 하는 방편이었다.(톨스토이의 인생관, <조광>, 1935)

내가 톨스토이의 책을 처음 읽기는 아마 열여덟 살 적인가 합니다. (……) 나는 이 책(《나의 종교》)을 읽고 이것이야말로 진리다. 인류가 이 모양으로 살아야만 평화의 세계를 이룰 것이다. 나는 일생 이 주의로 살아가겠다. 톨스토이는 과연 큰 선생님이시다. 이렇게 감격하였습니다. (……) 나는 그때부터 소설도 쓰고 논문도 썼거니와, 나의 예술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톨스토이 선생이 었습니다. 지금 와서도 종교적 인생관에 있어서 나는 톨스토이와 길이 달라졌지마는 예수교의 해석과 실천적 인생관에 있어서는 전과 같이 톨스토이를 선생으로 섬기고 있습니다.(두옹과 나, <조선일보>, 1935. 11. 20)

여기서 ‘톨스토이와 길이 달라졌다’고 한 것은 이광수가 이 무렵 불교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산학교에서의 3년 반, 그리고 방랑

이광수는 1910년 3월 메이지 학원 보통부(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고향인 정주의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李昇薰, 1864~1930)의 초청으로 이 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철저한 톨스토이주의자가 되어 돌아온 이광수는 틈틈이 학생들에게 톨스토이에 대해 가르쳤다. 톨스토이는 이광수가 부임한 이해 11월에 죽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이광수는 학생들을 모아 톨스토이 추도회를 열기도 했다. 오산학교는 이승훈 선생이 운영할 때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인 1911년의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으로 선생이 장기간(6년) 투옥되면서 재정난을 겪게 되었다.

학교 운영이 결국 기독교 재단의 오산교회 쪽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학생들에게 톨스토이를 가르치는 교사 이광수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톨스토이가 삼위일체론, 처녀 잉태, 부활 등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부정한다는 이유로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 신봉자였던 이광수 역시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에 있어서 톨스토이와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한 이광수를 기독교회가 가만둘 리 없었다. 1913년 여름에는 일부 학생들이 이광수는 톨스토이주의를 선전하는 이단자라며 배척운동을 벌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결국 이광수는 1913년 10월, 3년 6개 월간 정들었던 오산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광수는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던 1910년 7월 고향 정주에서 병중에 오늘 내일하던 선친의 친구 백 모 씨의 부탁으로 그의 딸 백혜순과 혼례를 올렸다. 얼굴도 안 보고 올린 혼례였다. 혼례식 때 처음 백혜순을 보고 크게 실망했던 모양이다. 이광수는 백혜순에게 좀처럼 정을 붙이지 못했다. 둘 사이에 첫아들이 있었는데, 돌도 안 되어 죽었다. 아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아이도 싫었는지 안아준 기억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후일 두 번째 부인 허영숙과의 사이에 난 아들 봉근은 끔찍이 사랑했다. 그러다가 그 아이가 일곱 살에 갑자기 파상풍으로 죽자 “피눈물이 나도록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이광수는 “만일 인연으로 태어나는 것이라면 그 어린애(첫 부인과의 첫아 들)가 내게 대한 미진한 인연을 풀기 위하여, 또 나로 하여금 자식 죽은 슬픔을 가르치기 위하여, 인정 없는 악한 버릇을 징계하기 위하여 다녀간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무정한 아비요, 남편은 벌을 받아야 옳을 것이다”라고 후 일 《그의 자서전》에서 썼다.

▲ 춘원 이광수 방랑도 

이광수는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방랑길에 올랐다. 그 당시 나라 잃은 지식인들에게 망명이나 방랑은 유행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광수는 방랑을 떠나기에 앞서 아내를 불러서 “이제부터 정처없는 길을 떠나며, 다시 조선에 돌아 오더라도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다른 남편을 얻어서 시집을 가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 말끝에 반드시 한바탕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아내는 지극히 냉정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당신 생각이 그러신 줄 알아요. 나는 친정에 가 있지요. 어디를 가시든지 몸 성히 댕기시고 큰 이름 내시오.” 

아내는 빙그레 웃기까지 했다. 빈정대는 말은 아니었다. 이광수는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으나 아내가 그저 싫었다. 그러면서도 아내의 가슴을 아프게 한 업보는 자신이 장래에 꼭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주에서 안동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 지금의 단동이다. 중국 사람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밥값까지 치르고 나니 주머니에 남은 돈이 일 원 칠십 전이었다. 이광수는 이 돈만큼만 차표를 사 가지고 봉천에 내려서는 걸식을 하며 북경까지 갈 작정이었다. 그리고 중국 남방으로 내려가서 안남 (베트남), 인도, 페르시아, 소아시아, 아프리카의 이집트 그리고 아프리카 남 단 희망봉까지 가는 꿈을 꾸면서 안동 현 정거장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갔다.

여기서 또다시 우연한 만남이 이뤄졌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고개를 들어보니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3~1950)였다. 

◉ 정인보를 만나 상해로, 상해에서 시베리아로

위당과는 초면이 아니었다. 몇 해 전 최남선 집에서 한두 번 만난 일이 있었다. 위당은 정처 없이 방랑을 떠나는 길이라는 이광수의 이야기를 듣더니, 날씨도 추워지는데 돈도 없이 어딜 가려고 하느냐며 이광 수에게 일본 유학시절의 동료인 가인 홍명희, 호암 문일평, 소앙 조용은 군 등이 상해(상하이)에 있으니 거기로 가라면서 중국 돈 20원을 주었다. 자신은 조선으로 들어가 돈을 만들어 다시 상해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의 이광수(1926)

이광수는 마음을 바꿔 위당의 말대로 상해로 가기로 했다. 그가 준 돈으로 푸른색 중국옷을 하나 사 입고 상해로 가는 배에 올랐다. 1913년 11월 말의 일이다. 

그는 상해에서 홍명희, 문일평, 조용은 등 반가운 친구들을 만났으나 모두 궁하게 지내는 처지였다. 이광수는 한 달 이상이나 홍명희와 매트리스도 없는 푹 꺼진 작은 침대를 같이 쓰며 지냈다. 그러던 중 상해 조선사회의 지도급 독립운동가인 예관 신규식(申圭植, 1879~1922)으로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동포신문인 <신한민보>에서 주필을 구하는데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이광수는 상해에 오래 머물 처지도 아니어서 이 제안을 수락하고 1914년 1월 초, 러시아 의용함대 선박 풀타와호를 타고 상해를 떠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이광수가 그리워하던 톨스토이의 나라다. 홍명희가 부두까지 나와 전송을 해주었다.

그런데 왜 미국으로 배를 타고 곧장 가지 않고 러시아를 경유해 가는 것으로 코스를 잡았는가? 이광수는 이에 대해 1936년에 쓴 《다난한 반생의 도정》에 “바로 미국으로 가지 않고 시베리아를 통과하게 한 이유를 나는 기억 못한다”며 “다만 신예관(신규식)에게 들은 말은 당시 길림성 목릉(무링)에서 요양 중인 추정 이갑(李甲, 1877~1917) 선생을 찾고 거기서 여비를 받으라는 말뿐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광수는 상해에서 미화 약 200불에 해당되는 돈을 러시아 루블로 바꾸어 갖고 배에 올랐다. 그것만 해도 생전 처음 만져보는 큰돈이지만 그 정도 여비로 미국까지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신예관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중국 무링에서 요양 중인 추정 이갑을 만나면 여비를 줄 것이라며 이광수를 보냈던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무링까지 갔으나 거기에도 돈은 없었다. 한 달 가량 그곳에 머물다 치타에 가면 여비 문제가 해결될 것이란 말을 듣고 다시 치타행 기차를 탄다. 이광수는 무링에서 안중근 의사의 바로 아랫동생인 안정근의 집에서 기거했다. 

대한제국 무관 출신인 추정 이갑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11년경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병을 얻어 거의 전신마비 상태로 무링에서 요양중이었다. 이광수는 이곳에서 약 한 달간 추정의 말동무 겸 편지 대필 등을 했다.

이광수는 《그의 자서전》에서 무링을 떠나 하얼빈을 거쳐 치타에 이르는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다. 아래 글에서 영어 대문자로 이니셜을 쓴 것은 일제의 검열을 의식한 때문으로 보인다.

내가 탄 차는 자정에 M(무링) 역을 떠났다. 역두에는 A(안정근) 씨와 어린 동무들이 나를 보내었다. 나 떠나는 것을 꼭 보아야 한다고 내 방에 쓰러져 자다가 더러는 못 깨고 더러는 깨어서 정거장까지 나온 것이었다. 나는 이 어린 사람들의 배웅을 가슴에 사무치게 고맙고 기쁘게 생각하였다. 나는 그들을 한 번씩 안아 주고 차에 올랐다. 나는 병든 지사 C(추정 이갑)씨 생각, 어린 친구들 생각, 또 어찌 될지 모르는 내 앞길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잘 이루지 못하였다. 새벽에 차창 밖으로 내 눈에 띈 것은 소백산맥의 눈에 덮인 삼림이었다. 늙어서 뼈만 남은 고목이며, 바람에 쓰러진 고목들. 함박눈은 펄펄 내리는데 가도 가도 삼림, 집 하나 사람 하나 볼 수 없는 이 처녀림의 고요하고 거룩한 경치! 나는 소년시절의 깨끗하던 생활을 생각해 보았다. 

(……)

나는 하르빈에 내려서 이상하게 들뜬 마음으로 하루인가 이틀을 자고, 어느 눈 내리는 오후에 떠나는 모스크바행을 탔다. 가도 가도 끝없는 눈의 벌판, 어느 것이 송화강인지도 분별할 수 없는 가이없는 눈의 벌판. 흥안령에서 밤이 새었다. 아침 햇빛이 굉장히 찬란하게 흥안령의 눈에 쌓인 모양을 비추었다. 역두에는 사람들이 오락가락하였다. 그들의 얼굴은 분을 바른 것같이 희었다. 솜털에 성에가 맺힌 것이었다. 

(……) 만주리에서 여행권 검사와 짐 검사는 무사히 끝나고 나는 이제 다시 아라사(러시아) 국경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튿날 오정 때를 지나서 차는 기차역에 닿았다. 도착하는 시간을 미리 알리지 아니했기 때문에 정교보사에서는 아무도 나온 이가 없었다.

여기서 정교보사란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이 미국에서 만든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시베리아 지부가 발행하던, <대한인 정교보> 라는 한글 잡지를 만드는 곳이었다. 안창호 선생이 파견한 오산 이강(李剛, 1878~1964)이 책임자로 있었다. 동포들을 위한 신문을 내기 위한 방편으로 러시아 정교 소식지를 표방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국의 허가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교보사는 이강의 집이기도 했다. 

◉ 러시아에 대한 인식을 바꾼 러시아 헌병의 친절

이광수는 톨스토이주의자이긴 했지만, 어린 시절 고향 정주에서 목격한 러시아 군인들의 행패로 인해 러시아에 대한 인상은 좋지 않았었다. 그런데 치타 역에 도착했을 때 그러한 부정적 인상을 백팔십도로 바꿔주는 일이 생긴다. 앞의 《그의 자서전》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다.

내가 짐을 들고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고 어떤 긴 칼 차고 장화 신은 군인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정교보사의 주소를 말하였다. 그는 손수 짐을 들고 정거장 밖으로 나가서 이스보스치카(마차) 하나를 불러서 태워 주고 웃으면서 작별하였다. 나는 이것이 헌병인가 하고 의심하였다. 모르는 행객에게 대한 호의뿐인 줄을 알 때에 아라사 사람의 국민성에 무척 호감을 가졌다. 아라사 문학에서 본 아라사 사람의 성격을 내 손수 보는 것이 기뻤다. 

이광수는 그때의 일을 훗날 《나의 고백》(1948)에서 이렇게 다시 적었다. 

내가 열두 살 되던 1903년, 이해 겨울에 아라사 병정이 정주에 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오는 길로 약탈과 겁간을 자행하여서 성중에 살던 백성들은 늙은이를 몇 남기고는 다 피난을 갔다. 젊은 여자들은 모두 남복을 입었다. 길에서 아라사 마병 십여 명에게 윤간을 당하여서 죽어 넘어진 여인이 생기고 어린 신랑과 같이 가던 새색시가 아라사 병정의 겁탈을 받아 튀기를 낳고 시집에서 쫓겨나서 자살을 하였다.이때에 어린 나는 우리 민족이 약하고 못난 것을 통분하고 아라사 사람을 향하여 이를 갈았다.

‘저놈들을!’하고 나는 조그마한 주먹을 부르르 쥐었다.

그로부터 칠팔 년을 지나서 나는 아라사 나라를 구경하였다. 흉악한 야만인들이 짐승같이 사는 줄 알았던 아라사 사람들은 인심이 후하고 외국인에게도 친절한 것을 발견하고는 나는 놀랐다. 내가 치타라는 정거장에서 차에서 내려서 쩔쩔매는 것을 보고 헌병 하나가 내 짐을 들고 내가 찾는 곳까지 지로(안내)해 주는 것을 보고 나는 아라사 사람에 대한 인식을 고쳤다.나는 톨스토이도 아라사 사람이라고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배우는 백성이었다. 그러면 내 고을에 와서 갖은 못된 짓을 하던 그 흉악한 아라사 사람들은 어디서 온 무리들인고? 나는 다시 톨스토이를 연상하였다. 그는 그의 《하늘나라는 네 속에 있다》라는 책에서 모든 악은 맹세와 돈을 기초로 하는 제도에서 온다고 말하였다. 그렇게 선량하고 순박한 아라사 백성들도 악한 정치제도 밑에서는 흉악한 국민이 되는 것이다.

▲ 유럽풍의 건물이 많은 하얼빈 중앙대가  

이광수가 치타 역에 내렸을 때 만난 친절한 러시아 헌병은 소설 《유정》에서 주인공 최석이 시베리아에 들어가기 전 하얼빈 역에서 만난 친절한 소련 병사로 등장한다. 하얼빈은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 하기 전까지는 러시아의 통제 하에 있다.

하얼빈은 러시아가 오랫동안 관할한 도시여서 아직도 러시아풍의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동방의 모스크바’라고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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