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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산 독재동 선비의 혼이 담긴 석각문

  • 기사입력 2018.07.20 10:32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 : 노고산독재동추사필적암각문(老姑山篤才洞秋史筆蹟岩刻文)-경기도 기념물 제97호
소재지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산65번지



독재동 추사필적암각문을 보기 위해 노고산 쉼터로 올랐다. 노고산은 해살 459m에 이르는 산으로 높지 않지만 정상을 향하는 길은 은근히 힘을 소진시켜야 하는 만만치 않은 산이다. 능선을 따라 정상을 향하기까지는 조망이 좋고 수목이 울창하여 한번 찾으면 다시 찾고 싶은 산이다. 산줄기를 분수령으로 북쪽으로 공릉천이 흐르고, 남쪽으로 창릉천이 흐른다. <동국여도>에서 처음 확인되는 산으로 <대동여지도>에는 ’노고산(老姑山)‘이 ’노고산(老古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 入山石


경사진 숲길을 10여분 오르다보면 온 몸은 땀으로 얼룩진다.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물 한 모금 마시고 암각문 계곡으로 내려갔다. 낙엽이 오솔길을 덮고 있어 발을 내 딛을 때마다 미끄러져 조심 또 조심하며 계곡에 도착하였다. 한적한 계곡에는 물 흐르는 소리와 새들의 재잘거림만 들릴 뿐이다. 크고 작은 바위가 서로 몸을 맞대고 있어 바위 하나하나를 살펴보아야 글씨를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바위에서 ‘入山石(입산석)’이 확인 되었다. 누구의 글씨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차차 다른 글을 확인해 가면 주인공이 있을 것이라 생각 되었다. 바위가 많은 산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되는 것 같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고 있지만 입산석에서 위로 올라가면 기암괴석뿐만 아니라 급경사를 이룬 바위가 계곡을 가득 메워있다. 이 글을 남긴 당시의 선비는 노고산의 바위를 둘러보고 이 글을 새긴 것이다. 입(入)은 산으로 들어가는 첫 문이다.

▲ 忠恕勤 석각


입산석(入山石)을 지나 조금만 아래로 내려가면 바위 윗면에 ‘忠恕勤(충서근)’이라 쓰인 글자가 있다. 이 또한 누구의 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부지런히 충과 서를 닦자’는 깊은 뜻을 새겼다. 충서란 유교의 도덕규범으로, 공자는 자신의 도가 하나의 원리로 관통하고 있다고 하는 데 대하여 증자가 그것은 忠(충)과 恕(서)라고 하였다. 여기서 忠(충)의 개념을 ‘내 몸과 마음을 다하는 것’이고 恕(서)의 개념은 ‘내 마음을 미루어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 流磨瀑 석각


충서근 바위 경사면에는 ‘感思山水(감사산수)‘가 위아래 각 2자씩 새겨져 있다. 산과 물에 감사하는 생각을 가지라는 의미인 것 같다. 손을 씻고 마음을 씻고 생각을 씻고 나서 써내려가는 시상은 곧 산과 물에 감사하다는 것이 되고, 자신이 선비로서의 자세가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감사산수 석각 앞에는 조그만 소가 있다. 바위를 타고 내리는 물은 소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바위에 흘러내리는 곳에 ’流磨瀑(유마폭)‘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계곡에 흐르는 물은 바위를 다듬고 폭포를 이룬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흘러내려온 물은 거친 바위표면을 조금씩 깎아내려 미끄러지듯 내려가다가 어느 곳에 가서 폭포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바위에 새긴 것으로 본다. 보잘것없는 물줄기가 바위에 흐르면서 조금씩 거칠었던 바위 표면을 갈고 또 갈아서 물의 흐름을 좋게 하는 것은 선비의 삶과 다를 바 없다. 선비의 바른 길은 곳 한 줄의 물이도 갈고 닦은 지식은 거칠었던 바위이고, 마지막에 남은 선비의 정신은 곳 폭포가 되어 우렁차게 떨어지는 물줄기가 아닌가 한다.

큰 바위가 비스듬하게 누워있는데 편평한 면에

’眉叟先生杖屨之所(미수선생장구지소)‘

라고 새겨져 있다. 좌우에 李時善書(이시선서) 壬戌篤才洞記言始得(임술독재동기언시득)이 새겨져 있다. 새겨진 글은 “미수 허목 선생이 이곳을 찾아 짚고 왔던 지팡이와 신발을 벗어 올려놓았던 곳”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쓴 사람이 이시선이란 선비가 임술년에 독재동에서 스승인 미수 선생과 함께 찾았던가 아니면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였다는 의미인 것 같다.

미수 허목(許穆)선생(1595~1682)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문보(文父), 화보(和甫)이며, 호는 미수(眉?), 본관은 양천이다. 1595년 연천현감 허교의 아들로 출생하여 1615년(광해군 7년) 정언눌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7년 부(父)가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부친을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2년) 광주의 우천에 살면서 독서와 글씨에 전념하여 그의 독특한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를 완성하였다.
남명 조식의 제자인 정구를 스승으로 삼아 제자백가와 경서의 연구에 전심, 특히 예학과 고학에 일가견을 이루었으며, 그림, 글씨, 문장에 모두 능하였다. 특히 독특한 전서체로 우리나라 서예사에 있어 혁명적인 업적으로 평가되며, 후기 추사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진다. 작품으로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동사 東事≫·≪방국왕조례 邦國王朝禮≫·≪경설 經說≫·≪경례유찬 經禮類纂≫·≪미수기언 眉?記言≫이 있다.

이시선은 미수 선생의 제자로, 이곳을 함께 찾았던 것 같다. <영남인물고>에 의하면, 이시선은 안동부 춘양현 유곡에서 나고 자라 젊어서 과거시험 준비를 하였으나 부친의 가르침에 ”진흙 수렁에서 명리 다툼을 하는 벼슬길은 장부가 갈 길이 아니다.“라는 말을 뼈저리게 새겨듣고 전국유람에 나섰다. 전국의 명산과 역사 속의 영웅들이 활동하였던 평양, 개성, 경주 등 옛 도읍지를 돌아보았다.

▲ 篤才洞 석각


허목 선생은 같은 남인이었던 지봉 이수광 선생의 묘를 찾았다 잠시 쉬었다 가기 위해 독재동을 제자와 함께 이곳을 찾았고, 제자가 바위에 글을 새겼을 것이다. ’篤才洞(독재동)‘을 새겼다.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독재계곡을 일컫는다. 이시선은 임술년(1682)에 이곳에서 글을 쓰고 글을 새겼다. 실제 미수 허목 선생이 64세가 되던 해(효종 9년, 1658) 여름. 고봉(高峰)의 죽원(竹院)에서 5일간 머물 때, 서산西山)의 주인과 독재동 계곡에서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 父遺萬卷 이시선 석각


이시선(李時善)은 독재동 계곡에 많은 글을 남겼다. 대부분 그가 남긴 글이다. 몇 차례 이곳을 찾아서 글을 쓰고 새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뚜렷하게 남은 자신의 이름 석 자도 남겼다. 그는 1684년 8월 27일에도 이곳을 찾아 많은 글을 남겼다. ’君降三恩(군강삼은)‘ 임금은 세 가지 은혜를 내리고. ’師敎四可(사교사가)‘ 스승은 네 가지 옳은 것을 가르치고, ’父遺萬卷(부유만권)‘ 아버지는 많은 문서를 남겼으니 ’感祝者我(감축자아)‘ 내가 그 분들에게 감사하고 축복한다. ’李時善(이시선) 謹書(근서)‘ 삼가 쓰다. ’甲子 八月 二十七日(갑자 팔월 이십칠일)‘ 1684년 음력 8월 27일에 새겼다고 하였다.

▲ 夢齋 석각


독재동 계곡에 가장 많은 관심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필체로 추정되는 글 ’夢齋(몽재)‘라는 석각이 있다. ’꿈꾸는 곳‘이라고 하면 가장 적당할 것 같다. 누구에 대한 글이고 무슨 의미를 갖는 글일까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두 글자, 그 옆에는 ’秋史?(추사?)‘라는 글이 각인되어 있다. 누구나 이 글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이라고 한다.

큰 바위에 새긴 夢齋(몽재) 우측에는 秋史?(추사?)가 새겨져 있고 아래에는 甲子 庚午 戊戌 甲寅(갑자 경오 무술 갑인:1684년 5월 21일 4시)이란 간지가 표기되어 있다. 이 년도를 환산해보면 1684년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몽재란 글씨는 추사의 글씨가 아니고 이때 이곳에 찾은 이시선 또는 이번이 새긴 글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몽재(蒙齋)‘는 조선 중기의 학자 이번(李燔:1657~1704)의 호이다. 이번은 윤증(尹拯)에게 수업을 받고 학문을 익혀가면서 우리나라 학자의 예설을 강구변증하고 경전의 미사오지나 의장문물 등에도 깊이 관심을 가졌으며, 성력(星曆), 시책(蓍策), 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통효한 인물이다. 윤증은 허목과의 깊은 관계가 있는 인물이고, 이시선은 허목으로부터 학문을 배워왔음을 알 수 있다. 이렇다면 몽재는 추사의 글씨가 아닌 이번이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았을까 하고 추증할 수 있다. 또한 몽재가 쓰인 바위에 좌측에는 ’石鹿(석록)‘이라고 새겨진 글이 있다. ’石鹿(석록)‘은 허목 선생의 태백산기에 ”임자년 팔월에 희중(希仲)이 금강산을 갈 때에 동쪽으로 가서 해 돋음을 보고 나의 ’석록(石鹿)을 지나다가 말해주기를 원하므로(過我石鹿求言)‘ 지지(地誌) 동유박물(東遊博物)에서 읽은 것 육백여자를 써서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한산(寒山) 송장로(宋丈老)가 윤희중(尹希仲)과 함께 석록(石鹿)으로 나를 찾아왔다.(寒山宋丈老偕尹希仲訪余於石鹿)“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독재동계곡에는 미수 허목을 비롯한 그로부터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과 사상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학문을 논하고 글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추사가 오지 않았고, 1684년 이후에는 이곳에 와서 글을 새긴 사람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 萬懿窩석각


몽재 바위 앞 누워있는 바위에 ’가탁천(可濯泉)‘이라고 새긴 글이 있다. 이 바위의 샘에서 마음을 씻고 몸을 씻은 후 학문을 논하고, 글을 새기라는 의미의 장소로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몽재 바위 아래쪽에는 '만의와(萬懿窩)라는 글을 새겼다. 훌륭한 집이 만채나 있다는 의미이다. 이곳에 있는 크고 작은 바위가 모두 글을 담을 수 있는 집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된다.

▲ 석각 전경


바위에 새겨있는 글은 배우는 유생들의 교재가 되었고,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마음까지 맑게 하였다. 자연이 곧 스승이라는 것을 옛 선비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비들은 자연과의 교감을 위해 죽어있는 바위에 생명을 불어 넣었고, 계곡의 흐르는 물에 얼굴을 비치고 마음까지 비쳐지기를 바랐다. 그래야 진정한 선비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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