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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黃龍)’과 ‘여마(驪馬)가 다투었던 여강변의 신륵사(3)

  • 기사입력 2019.07.05 10:52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가

문화재 :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여주신륵사팔각원당형석조부도(경기도유형문화재 제195호), 여주신륵사원구형석조부도(문화재자료 제134호)
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산113-1(신륵사)

신륵사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여러 채의 건축물이 둘러싸고 그 밖으로는 비석, 석탑, 전탑, 승탑 등이 그 영역을 표시하듯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남한강과 가까이에 돛을 상징하듯 서 있는 전탑은 영월루나 강 건너에서도 조망될 수 있어 신륵사의 대표적 탑이다.

한국의 대부분의 불탑은 석재를 다듬어 쌓아 만든 탑이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벽돌을 구워 만든 탑이 있다. 벽돌은 인류가 최초로 발명한 인공 건축 재료이다. 약 8천년이란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6,000년 전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人들이 진흙을 이용하여 벽돌을 만들고 이 벽돌을 이용하여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바빌론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역의 여러 나라에서부터 고대의 벽돌제조기술이 서쪽으로는 이집트·지중해, 동쪽으로는 인도와 중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까지 전해졌다.

▲ 신륵사 다층전탑    

중국에서는 기원전 500년경부터 벽돌을 이용하여 묘를 만들고 성을 축조하였다. 불교가 전해 내려오면서 벽돌을 이용하여 탑을 조성하였다. 중국의 탑 중에 단연코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전탑 양식이다. 그것은 벽돌이 가지고 있는 내구성과 안정성이 석재와 비슷하고 무게가 돌보다 가벼우면서도 다양한 양식을 표현할 수 있는 데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벽돌 사이에 각종 식물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 탑이 쉽게 붕괴하기도 하고 인위적으로 쉽게 벽돌을 뺄 수 있는 약점도 있다. 당대(唐代)에는 황토 진흙을 사용했고, 송대(宋代)에는 황토 진흙에 벼의 왕겨를 섞어서 내구성을 강화 시켰으며, 명대(明代) 이후에는 석회를 사용하여 안정성이 크게 발전하여 고층으로 불탑을 조성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전탑이 처음 등장한 것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때 양지 스님이 벽돌로 작은 탑 하나를 만들어 삼천불과 함께 절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이미 전탑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전탑은 안동신세동7층전탑(국보 제16호), 안동조탑동5층전탑(보물 제5층전탑), 안동동부동5층전탑(보물 제56호), 송림사5층전탑(보물 제189호), 그리고 신륵사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등 5기뿐이다. 이들 5기의 전탑은 기단부가 단층으로서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 추녀가 매우 짧고, 지붕의 상하에 매우 많은 층단과 탑신의 초층에 인왕상이 지키는 감실을 설치하였다는 것이 전탑의 일반적 특징이다.

▲ 신륵사다층전탑 기단부    

신륵사다층전탑은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 좋은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흙으로 구운 벽돌을 이용하여 쌓은 탑으로 경기도 지방의 유일한 탑이다. 2단의 기단을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전탑의 특징인 화강암으로 마련하였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았다.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마치 7층 같아 보인다. 이 전탑은 통일신라 때에 만든 탑이 아니고 고려 시대에 만든 탑으로, 몸돌보다 지붕돌이 계단 형식으로 이루어져 전체의 모습이 독특하게 보인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다.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계단 형태로 쌓았고,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를 갖추고 그 위에는 우연의 일부까지만 있고 찰주를 드러냈다.

▲ 신륵사 다층전탑 상륜부    

탑의 북쪽에는 수리할 때 세운 비로 전해오며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새겨져 있는데, 조선 영조 2년(1726)이다. 이때 탑을 다시 세워 원래 고려 시대의 전탑으로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는 반원 무늬의 보상화문양이 있는데, 이 무늬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신륵사  대장각기비각    

전탑 앞 북쪽 편 언덕진 곳에 자연석으로 3단의 기단을 쌓고 가운데에 오르는 계단을 두고 그 위에 사모각 내에 파손된 비가 있다. 이 비는 불경을 만들어 보관하였던 대장각의 조성배경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새긴 ‘대장각기비’이다. 신륵사에 대장각을 세우기 위해 발원한 인물이 목은 이색의 부친 가정 이곡이다. 이색은 불교를 탄핵한 성리학자로, 불교를 가까이하게 된 원인은 부친이 신륵사에 대장경을 간행하여 보시하려던 약속을 대신 이행하고서부터이다. 이색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1381년 4월 연출을 시작해 12월에 끝내고 대장각에 안치하여 공민왕의 자복과 선고·선비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태고보우 및 나옹선사와도 친교를 맺게 되었고, 나옹스님이 입적한 후 회암사에 있는 나옹선사의 탑비 선각왕사비 비문을 쓰기도 하였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비좌 상면에 장방형의 홈을 파서 비신을 꽂고 그 위에 다시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비 몸 양옆에는 돌기둥을 세워 비 몸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하도록 하였다. 이 비석의 비문은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권주(權鑄)가 해서로 썼다. 비문은 비 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남녀 신도)를 구분하여 그 이름을 밝히고 있다. 이색과 나옹선사 문하생들이 발원하여 우왕 6년(1380) 2월부터 대장각을 지었으며, 경률론(經律論) 3장을 인출하고 수장했었다고 한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다. 귀부의 받침, 이수가 새겨진 비 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 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이다.

▲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승탑    

조사당 서쪽에 두기의 승탑이 나란히 서 있다. 한 기의 승탑은 팔각원당형이고 또 한 기의 승탑은 원형 승탑이다. 팔각원당형석조승탑은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평면 팔각의 기단부·탑신부·상륜부를 차례로 중첩하였다. 지대석의 하대석은 일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하대석에는 8판 복엽의 복련을 조식했다. 중대석은 낮은 원통형으로 조성되었는데, 표면에는 아무 조식이 없고 상대석에는 8판의 앙련을 조식했다. 탑신부 역시 평면 8각의 형태로 문비형을 새기고 범자를 양각했다. 지붕돌의 하면은 편평하게 처리하였고, 두툼하게 조성한 기왓골의 끝에는 조화롭지 않은 큼직한 귀꽃을 배치했다. 상면에는 복발, 보륜, 보주를 차례로 배치하여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승탑에서는 이전 시 사리합이 수습되었다.

▲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    

원구형석조승탑은 간략하고 폭이 좁은 기단, 도식적인 연화문 등 조선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연주문 받침 위에 보주를 두른 삼단형으로 구성된 상륜부가 있다. 상륜부 아래 지붕에는 연잎을 얹어 표현하였다. 기왓골을 선명하게 나타내고 4개는 번갈아 가며 용머리를 표현하였다. 사각의 지대석 위에 중대석과 상대석을 마련한 기단부는 조각이 둔중하다. 편평한 상대석 위에는 형식적인 연꽃을 모각하였다. 팔각의 중대석에는 2단으로 나누어 연주문형 기둥을 마련하였다.

▲ 신륵사 구룡루 안쪽    

신륵사의 중심 강당인 구룡루라는 건물은 석가모니 탄생 때 9마리용이 물을 뿌려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경전 내용과 신륵사가 창건될 때 커다란 연못을 메우고 그곳에 살던 9마리용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전설과 연관된다. 구룡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곁처마로 된 2층의 누각이다. 누마루 아래 공간을 수납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막았고, 누각 옆으로 드러나는 우각진입방식을 택하고 있다.

▲ 신륵사 구룡루 바깥쪽    

이 건물은 조선 영조 때 전탑을 중수하고 난 뒤 구룡루를 중수하였고, 또한 1858년(철종 9) 김병기에 의해 신륵사가 중창될 때 구룡루도 중수되었다. 전면에 “구룡루(九龍樓)”라는 현판이 있고 뒷면에는 원충희(元忠喜)가 쓴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에는 김병기의 「신륵사중수기(神勒寺重修記)」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의 시가 걸려있다.

▲ 신륵사 김병기송덕비    

신륵사 구룡루 앞에는 자그마한 비각이 있다. 이 비각에는 ‘판돈령 김공병기송덕비(判敦寧金公炳箕頌德碑)’라 새긴 비가 세워져 있다. 신륵사를 찾으면 누구나 이 비가 어떤 비이기 이곳에 세워져 있는가 한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병기(1818~1875)는 철종 때 여주지방에 큰 홍수가 나자 사재를 털어 양곡 1,000석을 제공한 인물이다. 이 송덕비는 신륵사에 시주하여 법당 및 구룡루 등을 보수하였다 하여, 이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세운 공덕비이다. 전면 좌측 아래에는 ‘간역오위장연안김지택(看域五衛將延安金智澤)’이라 새겨져 있다. 1860년(철종11)에 건립된 것으로 관직으로는 이조판서·예조판서·.좌찬성 등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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