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학을 1918년 여름에 그만둔다. 성적은 우수했다. 그런데 그 시절 이광수는 애정문제로 복잡한 상황이었다. 이광수가 두 번째 부인이 된 허영숙(의사, 1897~1975)과 알게 된 것은 1917년이었다. 도쿄여의전에 다니던 허영숙은 도쿄의 유학생 모임에서 처음 이광수를 만났다. 허영숙은 이광수보다 다섯 살 아래다. 이광수는 허영숙이 의학교에 다닌다고 하자, “폐병에는 무슨 약이 좋으냐?”라고 물었고, 며칠 후 허영숙이 약을 사들고 이광수의 하숙집을 찾아갔다. 이 무렵 이광수는 소설 쓰기와 학교 공부 등 과로로 인해 폐병을
이광수의 《유정》은 당초 기행문으로 구상되었던 것이다. 그는 청년시절 자신이 경험했던 시베리아와 바이칼 호수의 이야기를 신문에 기행문 형식으로 실으려고 했다가 소설로 만들어 연재하게 되었다. 《유정》이 에 연재되기 시작한 1933년 10월은 이광수가 7년간 편집국장의 자리에 있다가 로 자리를 옮긴 직후였다. 이광수는 이해 8월 부사장에 취임했다. 《유정》은 말하자면 이광수가 로 옮긴 후 처음 쓴 ‘신고작(申告作)’이라고 할 수 있다. 이광수는 《유정》을 에 연재한
◉ 톨스토이 주의자가 되다이광수는 유학시절 톨스토이에 깊이 빠져든다. 중학교 3학년 때 일본인 동급생 야마사키 도시오(山峙俊夫)가 빌려준 톨스토이의 《나의 종교》를 읽고 나서부터다. 이 시절 이광수에게 톨스토이는 예수, 석가에 버금가는 살아 있는 성인이요, 위인이었다. 이광수가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게 된 것도 톨스토이의 저작을 통해서였다. 그는 톨스토이처럼 되고 싶었다. 그가 문학을 하게 된 것도 톨스토이의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광수는 후일 “문학은 철학, 종교와 동일한 사명을 가진다”라고 주장했는데 이 역시 톨스토이
우리나라 소설에 바이칼 호수와 시베리아가 등장하는 것은 춘원(春園) 이 광수(李光秀, 1892~1950)의 소설 《유정(有情)》(1933)이 최초다. 《유정》은 바이칼에서 시작해 바이칼에서 끝난다. 주인공이 바이칼 호 인근 시베리아 삼림 속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는 풀기 난감한 남녀의 애정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 그런데 그 시절에 어떻게 바이칼과 시베리아가 소설의 배경이 되었을까? 시베리아를 주요 무대로 소설을 썼다는 것이 경이롭다. 작가가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추운 겨울의 묘사도 많다.
◉그의 문학에 전기가 되었던 모험극작가 겸 단편 작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1860~1904). 그는 44년의 짧은 생을 살았으나 그의 작품은 지금도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그의 생애와 작품을 이야기할 때 30세에 감행한 시베리아 횡단과 사할린 섬 방문을 빼놓을 수 없다.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지고 문단의 주목을 받을 때였다. 위험하고 의미없는 여행이 될 것이라고 말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 모험적 여행은 그의 문학에 커다란 전기가 되었으며, 그의 인생관을 크게 바꿔놓았다. 그는 여행
◉가난한 의사의 둘째 아들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모스크바에서 빈민병원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집은 병원 의사들의 숙소였던 병원 옆 3층짜리 건물의 1층 일부였다. 이 건물 1층의 가족이 살던 곳은 현재 도스토옙스키 생가 박물관이 되어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도로 쪽 건물 벽면에는 ‘1821년 11월 11일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난 집’이란 작은 표지판이 붙어 있다. 도로의 이름도 도스토옙스키 거리다. 이곳에 들어서면 도스토옙스키가 형 미하일과 함께 지냈다는 형제의 방이 처음 눈에 띈다. 방이라곤 해
◉ 유형지의 비참한 환경1850년 초, 옴스크에서 시작된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유형 생활은 그가 종종 ‘지옥’에 빗댈 정도로 비참했다. 그러나 후일 그는 그의 유형수 시절에 대해 ‘나의 혼의 구제를 위한 중요하고도 유익했던 때’라고도 말했다. 그 기간에 많은 깨우침을 얻기도 했다는 말이다. 그 후의 작품에 유형 생활의 경험이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4년간의 유형 생활을 끝내고 석방된 후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유형지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오래전에 폐기되어서 이젠 사용할 수 없는 낡고 찌
◉ 국립 레닌 도서관 앞의 도스토옙스키 동상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 가까운 언덕에 위치해 있는 국립 레닌도서관. 러시아 국립중앙도서관 격인 이 도서관 앞 광장 한복판에는 커다란 동상이 하나 서 있다. 우리에게 《죄와 벌》,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로 잘 알려져 있는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동상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벗겨진 그의 머리와 어깨 위는 하루 종일 그곳을 휴식처로 삼는 비둘기들의 배설물로 인해 허연 얼룩이 져 있다. 러시아 지성의 상징인 국립 레닌도서관 앞에 서 있는 도
1882년 자신의 과거와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반성 속에 《참회록》을 낸 후 톨스토이의 문학 활동은 종교적・정신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61세 때인 1889년에 집필에 착수해 10년 후인 1899년 세상에 나온 《부활》은 그의 종교적・정신적 변화 의 실체가 담긴 결정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와 더불어 톨스토이 의 3대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부활》은 톨스토이가 1887년 자기 집에 손님으로 머물렀던 유명한 법률가 코니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착상한 소설이다. 훗날 톨스토이는 스스
《안나 카레니나》 역시 오랜 구상과 준비 끝에 집필에 착수하게 되는데, 아내 소피야의 일기 가운데 이에 관한 대목이 기록되어 있다. 소피야는 1870년 2월 24일 이 작품과 관련해 남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어제 남편이 나에게 말하길, 순결하지 못한 상류사회의 기혼 여성상이 떠올랐다고 했다. 남편은 또 자신의 임무는 이 여인을 애처롭고 비난받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여인의 주위를 맴도는 일련의 남성상도 떠올랐다고 말했다.(《톨스토이》) 1870년이면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마무리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사에 금자탑을 쌓은 톨스토이(1828~1910)의 명작 《전쟁과 평화》는 데카브리스트와 깊은 관계가 있다. 톨스토이는 1856년, 전년도에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의 특별 사면으로 시베리아에 유형 갔던 데카브리스트들이 30년 만에 유럽 러시아로 귀환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했다.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톨스토이가 데카브리스트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뛰어난 작가적 감각으로 당시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데카브리스트들의 정치사적, 역사적 역할을 중요하게
◉ 179주기에 찾아간 푸시킨의 옛집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시킨(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1799~1837)의 옛집을 찾아간 날은 2016년 2월 10일. 한국에서는 설 연휴 마지막 날인 수요일이었다. 이날 모스크바의 오전 기온은 영하 3℃로 서울보다는 조금 낮았지만 잔뜩 껴입은 덕에 추위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집 건너편에 서 있는, 이미 사진에서 봤던 푸시킨과 그의 부인 나탈리야 곤자로바의 동상을 먼저 카메라에 담은 후 푸시킨의 집으로 갔다. 아르바트 거리의 입구 가까이에 있는 이
◉ 알렉상드르 뒤마 소설의 모티브가 된 폴리나의 사랑과 헌신비록 실패했지만 러시아 최초의 근대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1825년 12월의 데카브리스트 혁명은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 러시아의 문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에게도 영감을 주어 그는 데카브리스트의 혁명의 와중에 피어난 눈물겨운 사랑의 이야기를 소설로 펴냈다. 뒤마가 쓴 소설의 제목은 《펜싱 마스터(The Fencing Master)》(1840).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
◉ 나폴레옹 전쟁이 만든 데카브리스트앞서 제1부 3, 4장에서 시베리아의 치타와 이르쿠츠크를 소개할 때 데카브리스트에 대해 간략히 언급했지만, 데카브리스트가 나오게 된 근원적 배경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1812년 6월, 선전포고도 없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 파죽지세로 석 달 만에 모스크바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텅 비어 있었다. 쿠투조프 장군의 지휘 아래 러시아군과 모스크바 전 시민이 도시를 비우고 후퇴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군이 입성한 그날 밤 부터 모스크바 전역에서
◉ 세계에서 가장 깊고 물이 많은 호수‘바이칼’이란 말은 부랴트족의 언어인 타타르어로 ‘풍요로운 호수’라는 뜻이다. ‘샤먼의 바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러시아인들의 평생 소원 중 하나가 바이칼 호에 가서 죄를 씻고 오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성스럽게 여기는 크고 맑은 호수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바이칼 호 를 ‘북해(北海)’라고 불렀다. 바이칼 호수는 세계 담수의 20%를 저장하고 있는 거대 호수로, 40m 깊이 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투명도를 자랑한다. 담수호수의 표면적만으로 볼 때는 캐나
◉ 부랴트족의 도시 울란우데치타에서 약 10시간을 더 가면 몽골족의 한 갈래인 부랴트족의 도시 울란우데가 나온다. 부랴트자치공화국의 수도다. 역에서부터 한국인과 닮은 얼굴을 많이 만나게 되는 곳이다. 울란우데 역에서 정차하는 시간은 25분. 몽골과의 접경인 이곳은 흔히 러시아 문화와 부랴트족의 문화가 어우러진 매력적인 도시라고 소개된다. 서쪽에 바이칼 호가 가깝게 있다. 울란우데의 인구는 약 40만 명. 부랴트족 중에는 몽골의 라마교를 믿는 사람이 많아 시내에서 불교 사원을 많이 볼 수 있다. 러시아 최대의 불교 사원인 이볼긴스크
◉ 민영환, 1896년 러시아 황제 대관식 참석 후 귀국길에 횡단열차 탑승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처음 탄 사람은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이다. 그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1905년 을사늑약 직후, 고종을 비롯해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세 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인물이다. 민영환은 1896년 고종의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윤치호, 김득련, 김도일 등 사절단을 대동하고 길을 떠났다. 당시 러시아의 수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였으나 대관식은 모스크바에서
◉ 유럽풍 건물이 많은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블라디보스토크는 해안가 언덕에 세워진 도시다. 중국 영토였던 블라디보스토크가 중.러 조약으로 러시아에 귀속된 것은 1860년대. 과거 중국명은 해삼위(海參威)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이후 러시아 극동함대의 거점으로 러시아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다. 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구소련 시절인 1958년부터 1991년까지는 외국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해 당시엔 소련 국적을 가진 사람들만 블라디보스토크에 드나들 수 있었다. 현재 인구는 약 70만 명. 연평균 기온은 4.3℃, 1월의 평균 최저
한국NGO신문은 임인년 새해를 맞아 코로나19 등으로 한동안 여행을 못하고 있는 독자들의 간접 체험과 문학적 소양을 위해 푸시킨,도스토엡스키,톨스토이,체호프 등 러시아 문학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정식의 을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한 차례 씩 연재하고자 한다. CBS 사장과 뉴스1 사장.부회장, 서울문화사 부회장을 지내는 등 언론인이자 작가인 이정식은 처음에는 시베리아를 여행하는 분들께 도움을 주기 위해 를 쓰기 시작했는데 시베리아 여행이 단지 여행에 그치지 않고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오지 않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