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현의 인생에세이 목록 ( 총 : 2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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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한 가슴 저미는 울림 '엄마의 눈물'
“살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린다.”“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마라.”드라마 의 중심축을 이루는 이 두 문장은, 단지 의학적 사명감을 넘어 인간이 살아가는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이 작품은 병원을 배경으로 한 의학 드라마이지만, 그 안에는 환자와 가족, 의료진이 얽힌 삶의 절박함과 존재의 의미가 짙게 배어 있다.2016년부터 방영된 이 시리즈는 시청률을 넘어선 힘을 지녔다. 지방의 한 작은 병원을 무대로,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부조리한 현실과 그 속에서도 신념을 지키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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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빈자리를 만드는 '쉼표의 시간'
글을 쓰지 않은 지 두어 달이 지났다. 게으른 내 잘못은 탓하지 않으면서 하릴없이 지나는 하루해가 야속하기만 했다.모처럼 쓸 거리가 생각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도 금세 잡생각에 휘말려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그려지지 않은 채, 사유의 길은 매번 제자리에서 헛돌기만 한다. 그러다 유튜브 채널이나 관심 있는 블로그를 찾아다니며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생각이 게으른 자의 표본인가. 마치 내 안의 내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이러고도 나는 작가라 할 수 있는가. 글을 쓰지 않는 나는 과연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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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소학'에서 읽힌 아버지의 유산
옷장 선반에 오래된 책이 한 권 꽂혀 있다. 검은 표지는 낡고 헤져서 접힌 자리에 속살이 드러나 있다. 송나라 주자가 쓴 《소학(小學)》이다. 내가 책을 좋아하고 글 쓰는 일을 즐기기에, 아버지는 내게 다른 어떤 것보다 책을 남기셨다.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는 병석에 계셨다. 집으로 모시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 형제들은 부모님이 살던 옛집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형제들이 다시 그 집에 모였다. 부모님의 유물이라야 책과 옷가지, 이불, 부엌살림이 전부였다. 검소하고 단정한 두 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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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품격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학교에 가기 전, 내 이름이라도 쓸 줄 알고 싶어 누나에게 종이에 써 달라고 졸랐다.“학교 가면 다 배울 텐데….”그러면서 누나는 신문지 가장자리에 큼지막하게 이름 석 자를 써 주었다. 내 이름에 들어 있는 ‘기역’과 ‘니은’이 뭔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것을 마치 그림 그리듯 따라 써 보았다. 이름을 스스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 신기할 수가 없었다. 아침 식사 중이던 식구들 앞에서 생애 첫 작품인 그림 글자를 뽐내 보였다. 나의 학교생활 첫날은 그렇게 설렘 속에서 시작되었다.새로 나온 국어 교과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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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결실이 들려주는 선율 '흙의 변주곡'
온몸이 뻐근하다. 배 근육이 땅기고 허리는 뻣뻣하다. 두 팔로 바닥을 짚고서야 겨우 일어날 수 있다. 허벅지와 종아리도 쑤시는 듯 아프다. 침대에서 간신히 내려왔지만, 바로 옆 세면장 가는 길이 천 리처럼 멀게 느껴진다. 정신은 또렷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칠 전 지역 봉사단체가 가꾸는 텃밭에서 난생처음 고구마를 캤다. 여럿이 함께하는 일이라 서두를 필요는 없었지만, 맡은 일은 그냥 두지 못하는 성미 탓에 무리하고 말았다.먼저 줄기를 베어내야 했다. 헝클어진 덩굴을 쳐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밑동을 움켜잡고 낫으로 자르다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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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의 '유리 액자', 조지어천(照之於天) 하다
지난여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양평의 한 호젓한 카페에 들렀다. 옆문을 지나면 나무 지붕 아래로 아담한 회랑이 이어지고, 그 뒤로는 갈색 벽돌 담장이 낮게 둘러져 있었다.담장 중앙에는 투명한 유리판이 액자처럼 걸렸고, 그 유리판에는 건너편 강과 산의 신록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펼쳐졌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액자 앞 서양식 탁자와 의자가 놓인 자리에 앉았다.잔잔한 빗소리와 함께 스피커에서는 더 캐스케이즈(The Cascades)의 〈Rhythm of the Rain〉이 흐르고 있었다. 비는 바람을 타고 유리창을 스치듯 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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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의 길’ 다산초당을 마주하다
세상 사람들은 이곳을 걷기 좋은 길이라 했지만, 팔월의 무더위 속에 다산초당을 오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의 유배지가 어찌 편안하고, 다산을 만나러 가는 것이 생각만큼 그리 수월하겠는가.소나무 뿌리가 삐죽이 나온 산길을 올라야 하고, 바위가 많은 곳에서는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야 한다. 대나무 담장을 잡고 올라가는 비탈길에서는 옷매무새를 고쳐 잡으며 숨을 고른다.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는 산 중턱에 길도 없는 길 위에 있다. 다산은 이 길을 오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산의 자취에 다가선다는 생각만으로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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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버 40년, 내 인생의 이정표 '속도제한'
경찰서 교통과에서 딱지가 날아왔다. 우체통을 여는데 낯선 우편물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봉투를 뜯어보니 집 근처 도로변에서 자동차 속도위반을 했단다. 자그마치 12km나.그날 일을 돌이켜 보았다. 가족들과 외식 나갔다가 무심코 액셀을 밟던 중에 경고음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 언뜻 계기판의 표시가 제한 속도를 조금 넘기는 했었다. 어린이 보호구역이었다.우리 동네는 길만 나서면 온통 어린이 보호구역이다. 30km 속도 제한 표시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아예 동네의 거리 전체가 노랑 물결 일색이다. 길바닥에도 노란색 주의 표지 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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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꽃, 민족의 별
여름철이면 시골길 가로등 아래로 불나비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떼 지어 날아든다. 어두움이 얼마나 싫었으면 저렇게 죽을힘을 다해 불빛을 찾아오는 걸까.세상에는 음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둡고 습한 긴 터널 속에 갇힌 채 끝이 어딘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앞에 놓인 장벽이 너무 높아 혼자서는 넘을 수 없다. 넘기는커녕 홀로서기조차 힘겹다. 찌든 가난에서 벗어나고,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거나 깨어진 가정을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써도 번번이 좌절된다.그리고 또 있다. 숙명처럼 음지를 선택하는 이들. 신에 대한 믿음과 소명 하나로 온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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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자리 머문 자리, 노마드의 행복
나는 지금 미국 시애틀 5번 국도를 달리고 있다. 보잉사로 견학을 가는 길이다. 오늘로 보름간의 미주 대륙 서부여행이 끝난다. 그동안 낯선 여행지에서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과 눈빛을 마주하고 옷깃을 스쳤다.때로는 이방인으로, 때로는 정다운 이웃으로 짧은 인연을 나누었다. 모두의 얼굴엔 여행자 특유의 들뜬 행복이 배어 있었다. 새로운 곳을 찾고, 새로운 맛을 즐기며, 새로운 이들을 만나는 건 호모 사피엔스의 본능이자 멈출 수 없는 호기심의 발로다.긴 여정 속에서 현지인들과의 깊은 교류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스쳐 가는 여행객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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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치유센터…하루가 또 그렇게 저물어 간다
옆방의 환우가 항암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갔다. 이른 아침 듬직한 아들이 아버지를 모시러 왔다. 아내는 종일토록 방을 지키다가 저녁 무렵 식당에서 밥상을 차려 방으로 들였다. 온 식구의 하루는 가장의 아픔을 나누며 긴장 속에서 지나고 있었다.낙엽이 흩날리는 늦가을 주말 오후, 나는 피곤한 몸도 추스를 겸 한적한 시골의 치유센터에 들어와 자연 속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풀벌레 소리 잦아든 숲속 작은 방에서 하룻밤을 지냈다.어스름 새벽이 밝아 오자 스피커에서는 여지없이 기상 시간을 알린다. 아바(Abba)가 부른 'I have a d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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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노애락을 한 몸에…나는 공이다
나는 공이다. 가죽 껍질의 조그만 내 몸속에는 바람이 가득 차 있다. 가볍고 탄력이 있어 땅바닥에 구르기도 하고 통통 튀기도 곧잘 한다. 남들은 공처럼 둥글게 살라 하지만, 그 말이 썩 유쾌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보기도 좋고 갖고 놀기는 쉬워도 둥글고 가벼운 생김새가 내 고통의 이유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나는 줄이 하얗게 쳐진 네모난 공간 안에서 산다. 그 안에 있을 때만 역할이 있고 가치가 인정된다. 바깥으로 나가면 누군가의 손에 들려 던져지거나 발로 차여서라도 안으로 들어와 있어야 제구실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오직, 아득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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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에도 마음이...‘동심원 그리기’
연蓮이 연못에 초록빛 수를 놓았다.창덕궁 후원을 거닐다가 애련지愛蓮池에 발길을 멈추었다. 불로문을 지나면 바로 왼편에 있는 ‘연꽃을 사랑하는 연못’이다.연잎 사이로 하얀 연꽃이 고개를 내민다. 지나가는 길손에게 인사라도 나눌 참이던가. 다소곳한 매무새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으니 그 자태가 학처럼 고고하다. 저 멀리서 보일 듯 말 듯한 연꽃은 수줍은 탓에 얼굴빛이 발갛게 물들었다.연못 가장자리에는 청아한 애련정愛蓮亭이 물속에 발을 담근 채 서 있다. 연꽃을 바라보는 눈빛이 그윽하다. 구름도 연못에 내려앉아 흐르고, 새들은 수면 위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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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분트’, 고척돔의 함성
행복은 즐기는 자의 것이다.그들에게는 이 순간만이 있다. 지난날의 후회나 내일에 대한 불안감 같은 건 들어설 틈이 없다. 오직 한 가지. 좋아하는 걸 선택해 마음껏 즐기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그러기에 이곳 고척돔 구장은 자유로운 영혼들의 안식처다.응원하다 목이 쉰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학창 시절 동대문 야구장에만 다녀오면 다음 날은 여지없이 목이 쉬었다. 좋아하는 투수와 타자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교 사랑이 가슴을 뛰게 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다 경기가 끝나면 운동장 밖 길거리에서 친구들과 어깨동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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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의 길, “분리될 수 없는 띠를 위하여”
북유럽 발트 연안의 리투아니아 시골 도시인 샤울레이 교외에는 십자가 언덕이 있다. 아픈 딸의 회복을 바라는 아버지가 이곳에 처음으로 십자가를 세웠다는 설도 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된 군인들의 넋을 기리는 뜻으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곳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하루 수천 개의 십자가를 꽂으며 각자의 소원을 빈다고 한다.발트 3국을 여행 중이던 우리 일행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초여름이라 꽤 무더웠다. 예수의 십자가상이 중앙 광장에 우뚝 솟아 있고, 그 뒤로 제법 큰길과 여러 갈래의 샛길을 따라 양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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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 30주년 홈커밍 행사와 어느 출판기념회
진정한 행복에는 가슴 적시는 뜨거운 눈물이 있다. 그들의 말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고 그들의 글은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다. 한 시골의 야간학교 30주년 홈커밍 행사는 학생과 교사가 한마음이 되는 축제장이다. 배움의 열정에는 아름다운 결실은 있어도 포기는 없고 하물며 절망도 없다.할머니 학생 한 분이 부끄러운 듯 발갛게 물든 얼굴로 기념 문집에 실린 자신의 글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간다.“내가 살아온 세상은 빛이 없는 어두운 세상이었습니다. 한글을 모르고 살았던 나는 어디 를 가도 기가 죽어 말을 못하고 그저 속이 상해 속으로 울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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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내 맘을 알아?”…쪽방촌 사람들
언덕배기에는 좁은 골목길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 잠시라도 한눈팔다 보면 길모퉁이에서 헤매기 십상이다. 시간에 쫓길 때는 왔던 길을 맴돌다가 집 찾는데 애가 타기도 한다. 묵직한 반찬통을 들고 이리저리 뛰다 보면 다리는 후들거리고 등에 땀방울이 맺힌다.쪽방촌은 도시의 빌딩 숲 뒤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진 곳. 세상살이에 지친 영혼들이 외로운 삶을 힘겹게 이어가는 공간이다. 불빛 찬란한 도시와의 경계 너머 웅크린 채 살아가는 소외된 자들의 은둔처이다. 한 가닥 남은 희망을 놓쳐버릴까 근심할 여력도 없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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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으로 고난 속 희망의 불씨 찾다
벼룩은 자기 키의 백배 이상을 뛴다. 새끼 때부터 피나는 연습으로 발가락을 고도로 발달시킨 결과다. 뒷다리에는 탄력성이 높은 레실린이라는 단백질 성분이 들어있는데, 힘의 원천이 바로 이 물질인 셈이다.이솝 우화 ‘개미와 베짱이’는 게으른 베짱이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 베짱이는 게으르지 않고, 보기와는 달리 강하고 매사 열심이다. 이름에서 보듯 우리 선조들은 베짱이를 밤새도록 ‘베를 짜는’ 부지런한 곤충으로 여겼다. 베짱이의 날개는 몸통보다 훨씬 길다. 그 날개를 등 뒤로 젖힌 채 서로 부딪쳐서 소리를 낸다. 짝을 찾으려고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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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천지창조
천지창조의 신비가 판타지 소설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빛이 있으라”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시작으로 어둠이 물러나고 빛이 드리웠으며, 혼돈 속에서 우주가 탄생했다. 인간 세상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고, 그날 이후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예인藝人 김명자 작가의 ‘6days+알파’는 단순한 서사가 아니다. 독자의 내면을 흔들고, 존재의 기원을 되묻게 하는 작품이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창조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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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반기는데 나는 어디로...
충남 당진 왜목마을에서 새해를 맞았다.서쪽 바다에도 해가 뜬다. 숙소에서 바라보는 바다 건너편에서 붉은 해가 떠오른다. 여기는 이름 그대로 왜가리 목처럼 지형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바다를 동서로 나누고, 해안이 동쪽으로 튀어나와 있어 동해안처럼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다.새벽의 여명이다. 칠흑 같은 장막이 옅어지자 숨어있던 세상은 제 모습을 조금씩 드러낸다.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에 주홍빛이 어리는가 싶더니 바다에 데칼코마니처럼 붉은색 물감이 풀어져 물이 들기 시작한다.어저께 고개 너머 석문산에서 사라졌던 해가 바다 끝자락으로 올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