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AI CEO가 SK하이닉스에 2029년부터 대규모의 메모리 반도체 공급을 요청하자 최태원 SK그룹(이하 SK) 회장이 정부에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건의했다. AI·반도체 산업 투자 활성화가 목적. 이에 이재명 대통령이 금산분리 완화 검토를 지시하면서 금산분리 완화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SK를 중심으로 재계는 현행 공정거래법상의 일반지주회사 규제 해제까지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개혁연대(소장 김우찬 고려대 교수)는 금산분리 완화가 'SK 맞춤형 규제 완화'라고 비판하며 최태원 회장에게 금산분리 완화 요구에 앞서 이익잉여금과 차입으로 재원 조달 마련, 유상증자를 주문하고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25일 "이번 금산분리 규제 완화 논란은 오픈AI CEO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2029년부터 막대한 규모의 메모리 반도체 공급을 요청하자 최태원 회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정부에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건의한 데에서 비롯됐다"고 밝혔다.
경제개혁연대는 "최태원 회장은 지난 20일 기업성장포럼에서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투자를 감당할 새로운 제도를 마련해 달라는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면서 "하지만 AI⋅반도체 산업의 엄중한 현실을 강조하면서 SK하이닉스를 위한 투자 재원 확보 방안을 정부와 국회에 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개혁연대는 "그러나 최태원 회장은 현행 제도 하에서 SK하이닉스에 필요한 자금 조달계획을 충분히 검토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자에 어려움이 예상된다면 정부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 적절한 순서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제개혁연대는 "회사 보유 투자 재원과 외부 차입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투자를 감당하기 어렵다면 유상증자를 통해 대규모 자금을 유치하고, 지배권을 내려 놓는 방안까지 검토했어야 마땅하다"며 "이러한 노력 없이 'SK하이닉스에 대한 최태원의 지배는 절대 건들 수 없다' 전제에서 투자 활성화 방안을 모색한다면, AI⋅반도체 투자 활성화라는 국가적 명분을 통해 지배주주의 배만 불린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고 국민들을 설득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경제개혁연대는 SK 맞춤형 규제 완화 논의가 반복된다는 입장이다. 경제개혁연대에 따르면 먼저 2014년 외국인투자촉진법이 개정, 증손자회사가 외국인과의 합작법인이면 손자회사가 증손자회사 지분을 100% 소유할 필요가 없도록 규제가 완화됐다. 그러면서 SK의 손자회사 SK종합화학(현 SK지오센트릭)과 일본회사의 합작법인 설립에 편의가 제공됐다는 게 경제개혁연대의 설명이다.
이어 2020년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지주회사(자회사)의 자회사(손자회사) 의무 지분율 요건이 기존 40%에서 50%(상장회사 20% → 30%)로 10%p 상향됐지만 기존 지주회사는 예외가 허용됐다. 이에 사실상 'SK 특혜법안'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당시 SK는 자회사 SK텔레콤의 지분 26.78%, SK텔레콤은 손자회사 SK하이닉스의 지분 20.07%를 각각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상향 의무 지분율 요건을 충족하려면 대규모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기존 지주회사 예외 허용으로 면제됐다.
또한 2020년 공정거래법이 개정, 일반지주회사의 CVC(기업형 벤처캐피탈) 자회사 설립이 허용됐다. '일반지주회사가 금융회사를 지배할 수 없다'는 금산분리 원칙이 최초로 붕괴된 것이다. 당시 SK가 공정거래법 개정을 주도했다. 하지만 정작 SK가 자회사로 CVC를 설립하지 않았다는 게 경제개혁연대의 비판이다.
경제개혁연대는 "SK 맞춤형 규제 완화로 의무 지분율 요건이 완화되고 금산분리 원칙이 허물어지면서 총수 일가가 적은 지분으로 더 많은 회사를 지배할 수 있게 됐다"면서 "그런데도 최태원 회장은 '공정거래법이 열심히 기업집단을 규제해 왔지만 아무도 그게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대한민국의 성장에 맞춘 새로운 규제 틀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본인 때문에 지주회사제도가 경제력 집중 억제라는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듯하다"고 직격했다.
경제개혁연대는 "AI 산업 투자 활성화와 반도체 생산능력 확대 필요성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다. 문제는 방법"이라며 "초기에는 2020년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허용된 일반지주회사의 CVC 규제 완화가 논의되더니 일반지주회사가 사모펀드 운용사까지 보유하게 하자는 주장이 대두됐다"고 밝혔다.
경제개혁연대는 "여기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첨단전략산업기금이 투자할 경우 손자회사가 보유해야 할 증손회사 지분율을 현행 100%보다 낮춰 주는 법안까지 발의한 상태"라면서 "이러한 방안을 제시하는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AI 반도체 투자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고육책이라고 하겠지만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경제개혁연대는 "먼저 경제력 집중 억제라는 중요 정책목표를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경제력 집중 억제는 공정거래법 제1조가 나열하고 있는 중요 목적 중 하나이고, 이를 위해 일반지주회사의 금융회사 지배 금지와 증손자회사에 대한 지분율을 정하고 있는데 모두 포기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제개혁연대는 "경제력이 집중되더라도 AI 투자 전쟁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규제 완화가 불가피하다고 항변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이는 솔직한 항변이 아니다. 규제 완화론자들은 최태원 회장이 SK하이닉스 지배권을 잃지 않으면서 대규모로 AI 반도체에 투자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경제개혁연대는 "회사는 규모를 키우기 위해 외부로부터 증자받을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기존 지배주주의 지배권이 희석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이런 점에서 SK하이닉스가 성장하면서 최태원 회장의 지분이 희석되는 것을 최태원 회장을 포함, 우리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러지 못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공정거래법상 규제가 신성불가침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SK하이닉스는 최태원 회장이 지배한다는 전제는 더욱더 그러하다"면서 "최태원 회장은 더 이상 편법에 의존하지 말고 이익잉여금과 차입 등으로 재원을 조달해야 한다. 정말 생존의 문제라면 지배권을 포기해서라도 유상증자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