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수레바퀴 앞에서

  • 기사입력 2022.07.10 13:37
  • 최종수정 2024.02.03 15:18
  • 기자명 김희재 작가
▲ 김 희 재 (수필가, 한국어 교육 전문가)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비겔란 조각 공원은 해마다 200만 명 이상의 국내외 관광객이 찾아오는 관광명소다. 오슬로시에서 제공한 약 10만 평 부지에다 비겔란의 작품만으로 조성해 연중 매일 24시간 동안 방문객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총 212점이나 되는 조각품의 배치는 물론 가로수와 화단의 위치까지 모두 비겔란이 기획했다. 이 공원의 가장 큰 특징은 한 사람의 조각가가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각 공원에 있는 여러 작품 중 하이라이트는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모노리스 석탑이다. 이 작품은 높이 17.3 미터, 총 무게 180톤의 거대한 돌에 121명의 사람이 뒤엉켜 있는 형상이다. 가까이서 올려다보려면 목이 꺾일 만큼 높은 석탑의 원통 표면에 벌거벗은 인간들이 뒤엉켜 빙 둘러 있다. 숨 쉴 공간조차 없이 차곡차곡 포개어진 나신(裸身)들은 하나같이 화가 나고 지친 표정이다.

모노리스에 대한 작품 해석은 분분하다. 남근(男根)을 형상화한 것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삶의 투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혹자는 영혼 세계에 대한 인간의 동경 내지는 부활을 내포하고 있다고도 본다. 내 눈에는 내면에 켜켜이 쌓인 분노와 절망, 슬픔 등으로 보였다.

사실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비겔란이란 조각가의 이름조차 몰랐다. 게다가 공원에 전시된 작품엔 제목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작품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겠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인생에 대한 성찰과 삶에 대한 깊은 고뇌에 공감이 갔다. 단단한 돌과 청동을 가지고 살아 숨 쉬는 인체를 만들어 낸 그의 솜씨에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젊은이의 힘줄과 근육은 물론 기름기가 다 빠진 늙은이의 쭈글쭈글한 피부와 주름까지, 그는 뛰어난 관찰력을 토대로 생동감 있게 표현해 놓았다. 어떤 것은 차디찬 돌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작품에 나오는 사람들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외설스럽거나 보기 민망하지도 않았다. 정말 대단한 솜씨였다.

▲ 비겔란의<삶의 수레바퀴>  

나는 그의 작품 ‘삶의 수레바퀴’ 앞에서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이것은 몇 개 안 되는 제목이 있는 작품 중 하나다. 공원의 후문 쪽에 있는데, 네 명의 어른과 세 명의 어린이가 한 데 뒤엉켜 있는 모습의 원형 조각품이다. 이 작품을 처음 보는 순간, 무슨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가슴으로 전해지는 느낌이 강했다. 바퀴가 연상되는 원의 형상은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의미와 삶의 영원성, 요람에서 무덤까지 연결되는 인간의 삶과 계속 돌고 돌아 이어지는 윤회 사상까지 내포하는 것 같았다.

이런 수레바퀴 이미지는 조각 공원 중앙에 있는 청동 분수대에도 있다. 분수대는 여기서 제일 오래된 작품이고, 작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역작이다. 중앙에 6명의 건장한 남자가 온 힘을 다하는 표정으로 거대한 물 쟁반을 양팔로 받들고 있다. 그 주위를 빙 둘러서 사람과 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조각품 20여 개가 놓여 있다. 하나같이 모두 다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이어지는 삶의 여정을 담고 있다. 분수 테두리 옆면에도 인간이 거쳐 가는 생로병사의 과정이 순차적으로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다. 칸칸이 나뉘어 있는 액자들 속에 조상들의 유골을 줍는 어린아이 그림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즐겁고 고달프고 꿈에 부풀어 사는 청장년기 모습, 쓸쓸한 노년을 지나 마침내 유골로 돌아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그림을 따라 한 바퀴를 돌다 보면 사람의 인생이 다 끝나는데, 그 마지막 지점은 다시 출발점으로 이어진다. 완벽한 순환이다.

구스타프 비겔란은 ‘인간의 삶’에 대해 골똘히 연구한 조각가로 평생토록 여러 종교와 성경, 신화를 깊이 연구했다. 그는 거의 모든 작품에다 순환하는 인생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는 다분히 기독교적인 사상과 불교사상이 합쳐진 듯 보이는 내용이다. 이야기 줄거리는 성경을 토대로 하면서, 대미는 죽음이 아닌 또 다른 생을 시작하는 것으로 장식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작품을 보면서 자연스레 윤회설을 떠올렸다.

언젠가 갓 대학생이 된 작은 아이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만일 내가 이 세상에 꼭 태어나야 할 영혼이었다면 설령 엄마를 못 만났어도 누군가의 자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요?” 

“엄마에게 잉태되기 전에 제 영혼의 씨앗은 어디에서 있다가 왔을까요?”

 “세상에 태어나는 인간의 영혼은 계속 새로 생겨나는 것인지, 기존에 있던 영혼 중에서 누군가가 골라서 보내는 것인지 궁금해요.”

그 물음에 나는 딱 부러지게 대답을 못 하고 우물우물 넘기고 말았다. 아들이 말하는 꼭 태어날 영혼이란 것과 잉태되기 전의 씨앗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때가 되면 육신을 벗어버리고 하늘로 돌아가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던 내게 아들의 질문은 기습이었다.

비겔란도 이와 비슷한 질문에 봉착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기독교 사상의 근간에다가 끊임없이 돌고 도는 윤회사상을 연결해 자기 나름대로 삶의 수레바퀴를 만들어 보인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비겔란의 생각처럼 인생의 한 사이클을 다 돌고 난 후에 새로운 사이클을 시작하는 것이라면 그다음 생에 날 생명의 씨앗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냥 야생화처럼 자생하는 것이라기에는 인간의 삶이 너무도 존엄하다. 만일 누군가가 생명 씨앗을 가지고 있다가 새로 싹을 틔워 주는 것이라면 어딘가에 씨앗 창고가 따로 있을까?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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