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容恕)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

  • 기사입력 2022.08.20 01:01
  • 최종수정 2024.02.03 15:15
  • 기자명 김희재 작가
▲ 김 희 재 (수필가, 한국어 교육 전문가)  

뉴스 시간마다, 분명한 어조로 용서하겠다고 말하는 흑인들의 차분한 모습과 넋이 나간 듯한 백인의 멍한 얼굴이 텔레비전 화면에 나란히 잡혔다. 정의의 투사를 자처했던 백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그들의 모습은 한동안 계속 방영되었고, 흑인들의 입에서 나온 ‘용서’라는 어휘는 전 세계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2015년 6월 17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 있는 유서 깊은 흑인 교회에 낯선 백인 청년이 찾아들었다. 그는 ‘임마누엘 아프리카 감리교회’의 수요예배에 참석하였고, 예배 후에 성경공부까지 따라가 뒷줄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한참 동안 조용히 앉아 있던 청년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총격 사건으로 인해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목사를 포함하여 9명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 소식은 인터넷과 방송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범인은 21살 난 인종 차별주의자 딜런 로프였다. 그는 백인 우월주의 망상에 사로잡혀 이처럼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다. 자기 손으로 인종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몇 달 동안 범행을 준비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잡혀 와서도 죄책감은커녕 어처구니없는 궤변만 계속 늘어놓았다. 흑인은 다 무식하고 더러운 성범죄자들이니 모든 백인이 대동단결하여 모조리 쓸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이 분노했다. 놀람과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두고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기독교를 비방하던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며 이죽거리기도 했다. 미국 사회 전체가 술렁거렸다. 자칫하면 흑백 간의 인종갈등으로 번질 조짐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숨을 죽이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 사건으로 희생된 클레멘타 핑크니 목사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였다. 그는 연설하기 전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나 같은 죄인 살리신)'를 선창(先唱)했다. 대통령의 입에서 시작된 노래를 참석자들이 하나둘 따라 부르면서 자연스레 합창이 되었다. 그러자 슬픔과 분노로 들끓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모든 과정도 실시간으로 고스란히 중계되었다.

▲ 당시 장례식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는 오바마 전 대통령(미 의회방송 C-SPAN 영상 캡처)  

용의자 딜런 로프의 보석을 심사하는 약식 화상 재판이 공개법정에서 열렸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관례에 따라 피해자의 가족이 가해자에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들은 울먹이면서 범인을 향해 ‘용서’하겠다고 했다. 누구도 그를 원망하거나 증오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살인범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희생자 타이완사 샌더스의 어머니 펠리시아 샌더스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다. 총격을 받았을 때,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서 죽은 척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자기 목숨은 부지했지만, 아들이 곁에서 죽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두 팔을 벌려 당신을 성경공부 모임에 받아들였소. 그런데,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소. 지금 내 몸에 있는 세포 하나하나가 다 아파서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도하겠소." 

유족들은 이구동성으로 가해자를 용서하겠노라고 분명히 말했다. 억울하고 비통하지만, 결코 증오와 복수심의 노예가 되지는 않을 것을 천명(闡明)했다.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온유하면서도 단호하게 ‘복수의 악순환 고리를 만들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그들이 차분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용서한다는 메시지를 전하자, 살기등등하던 가해자 청년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강력한 펀치를 연달아 맞아 싸울 의지를 다 상실한 몰골이 되었다. 가장 강하고 차원 높은 응징(膺懲)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이 장면은 TV 뉴스 시간마다 계속 방영되었다. 

공개법정에서 보인 유족들의 평온한 모습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깊은 울림이 되었다. 신약성경 로마서 12장 19절~21절 말씀도 떠올랐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눈물을 흘리면서도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라’는 말씀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유족들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늘의 위로와 평안을 비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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