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 기사입력 2022.09.17 09:10
  • 최종수정 2024.02.03 15:14
  • 기자명 김희재 작가
▲ 김 희 재(수필가, 한국어 교육 전문가)  

새벽 두 시 반이다. 아직 깜깜한 밤이지만 사실은 이미 새날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원고와 씨름하는 사이, 나는 내일이라 부르던 시간 속으로 들어왔다. 어제, 오늘, 내일이라 부르는 날들은 절대로 고정된 시간이 아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오늘이 지나고 나면 내일이 된다는 말에 아침이면 눈을 비비며 이렇게 묻곤 했다. 

  “엄마, 오늘이 내일이야?”

  “오늘이 오늘이지 무슨 내일이야?”

  “그럼 내일은 언제 와?”

  “오늘 밤 자고 나면 오지”

  “어제 분명히 하룻밤 자고 나면 내일이 온다고 했으니 오늘이 내일이잖아?”

  “엉뚱한 소리 그만하고 얼른 학교나 가거라.”

 나는 오래도록 내일을 만나지 못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었다.

오래전에 교회에서 단체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이스라엘에서 버스로 국경을 넘어 이집트로 갔다. 끝없이 이어지는 광야 길을 달려 시내산에 당도했다. 해돋이를 하기 위해 새벽 두 시에 길을 나섰다. 산에 오르려면 서걱거리는 굵은 모래와 황토색 바위들로 이루어진 구불구불한 절벽 길을 걸어서 올라가거나, 미국 돈 10달러를 주고 베두윈족이 모는 낙타를 타야 했다. 처음 보는 짐승을 타는 것이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걸어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모두 낙타를 타기로 했다.

낙타 몰이꾼 대장에게 따로 1달러를 내면 어둠 속에서 몰이꾼의 이름을 불러 손님과 연결해 주었다. 산행 도중에 몰이꾼이 강도로 돌변하는 일이 있어 실명제로 운영하는 것이었다. 나를 태워 줄 몰이꾼은 피부가 검고 다부진 체격의 키 작은 중년 남자였다.

낙타는 앞다리와 뒷다리를 모두 접어 제 몸 밑에 넣고, 납작 엎드려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겸손해서 올라타기가 미안했다. 낙타 등에 있는 혹과 혹 사이에 얹어 놓은 안장 위에 조심스레 앉았다. 몰이꾼의 신호에 엎드렸던 낙타가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낙타 등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아서 가슴이 철렁했다. 다리에서 느껴지는 뭉클한 촉감과 짐승의 체온이 낯설어 엄마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낙타의 평균 수명이 40년인데 이곳의 낙타는 고작 5년밖에 못 산다니, 사람을 태우고 시내산에 오르는 것이 무척 고된 노역임이 분명했다.

낙타는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도 빠듯한 산길에 낙타와 몰이꾼이 한 줄로 길게 행렬을 지었다. 앞에 가는 낙타의 걸음걸이를 보니 금방이라도 절벽으로 굴러떨어질 것처럼 위태롭다. 무슨 심산인지 낙타들은 모두 길 한복판이 아닌 낭떠러지 쪽으로 바싹 붙어서 걸었다. 그런데도 산행은 예상보다 훨씬 편안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낙타 걸음에 맞춰 꺼떡꺼떡 리듬까지 타며 올라가게 되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산길에 무수한 별빛이 쏟아졌다. 정월 대보름 갓 지난 달빛은 맑고 청량했다. 너무 아름다운 광경에 나도 모르게 그만 목이 콱 메었다. 산길을 오르는 내내 나는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무엇보다도 여기까지 무사히 왔다는 것이 감사했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십계명을 받았던 산에 온 것이 감격스러웠다. 집에 두고 온 가족들에게 미안해서, 나를 태우고 올라가는 짐승이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돌아가신 엄마 생각도 났다. 감정이 절정에 이르면 자기도 주체할 수 없이 우는 사람이 있다더니, 내가 딱 그랬다.

그렇게 한 시간 반을 오르자, 낙타가 갈 수 없는 곳에 다다랐다. 마지막 남은 가파른 돌계단 760개는 내 발로 올라가야 했다. 비좁은 계단 길 바로 옆은 낭떠러지. 천천히 조심조심 앞 사람만 보며 한 시간쯤 더 오른 끝에 비로소 정상에 도달했다. 동틀 무렵이 되었다.

어디에서 그렇게 많이 모여들었는지, 온 산에 사람들이 빼곡했다. 동쪽 하늘에 붉은 띠가 넓게 드리워졌다. 해가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숨도 크게 못 쉬었다. 이윽고 하늘에 새빨간 손톱만 한 것이 나타나자,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산이 터지도록 함성을 질러댔다. 용광로에서 달군 쇳덩어리 같은 태양이 전속력으로 후다닥 날아올라 순식간에 어둠을 걷어내고 새날을 열었다.

▲ 시내산의 일출  

햇살이 퍼지자 황무(荒蕪)하고 삭막한 시내산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풀 한 포기 없는 시뻘건 돌산이 켜켜로 층층이 쌓여 있다. 절대로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만은 없는 풍광인데, 가슴이 터질 듯이 벅찼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참았던 숨을 토하듯 찬양을 불렀다.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노래를 부르며, 순례자들은 감격의 순간을 나누었다. 

  

시내산은 그저 평범한 산이 아니었다. 범접하기 힘든 기운이 가득한 영산(靈山)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부족한 언어로는 산꼭대기에서 보았던 모든 순간의 벅찬 감동을 다 그려낼 수가 없다. 그저 새빨간 불덩어리를 통째로 삼킨 느낌이라고나 할까.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온몸에 가득 찼다. 병풍처럼 둘러선 사람들 사이로 햇살이 확 퍼지기 시작하던 그 순간에, 나는 오랫동안 궁금했던 오늘이라 부르는 시간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유일하게 실존(實存)하는 시간인 ‘오늘’은 창조주가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가장 확실한 호의(好意), 대체 불가능한 선물(present)이 분명하다. 요즘 들어 부쩍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는 히브리서 3장 13절 말씀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나이를 먹는 증표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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