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온 느낌이다.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멈춰 세웠다. 친구들과 함께 북유럽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슈 미술관에서 관람하고 있었다. 에르미타슈에는 진귀한 미술품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약 300만 점에 달하는 작품을 자세히 다 보려면 매일 8시간씩 봐도 족히 몇 년은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주요 작품만 골라서 구경했다.
‘빛의 화가’라고 불리는 렘브란트의 전시실에는 <십자가 내림> <아브라함과 이삭> <다나> <돌아온 탕자(蕩子)> 등 걸출한 대작이 걸려 있었다. 전시된 그림은 대개 성경을 모티브로 그린 작품이었다. 특히 <돌아온 탕자>가 나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림의 모티브가 된 성경 속 이야기는 이렇다.
옛날에, 어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맏이는 성실하고 아버지 뜻에 순종하는 착한 아들이었고, 작은아들은 방탕하고 놀기 좋아하는 문제아였다. 어느 날, 날마다 빈둥거리며 놀기만 하던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졸랐다. 아버지가 큰돈을 내어 주자 다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다. 제 맘대로 먹고 마시며 허랑방탕 살다 보니 가지고 간 돈은 금세 바닥이 나고, 거지 신세가 되었다. 모든 것을 다 탕진한 작은아들은 돼지우리에서 쥐엄나무 열매를 주워 먹으며 간신히 연명했다. 고향 집에서는 종들도 따뜻한 방에서 배불리 먹고 지낸다는 걸 기억해 내고, 이렇게 사는 것보다 아버지의 종이 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마침내 염치불고(廉恥不顧)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거지꼴을 한 작은아들이 돌아오자,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버지는 두 팔 벌려 반겨 맞았다. 그간의 잘잘못은 한마디도 따지지 않았다. 가장 좋은 옷을 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겼다. 살진 짐승을 잡고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마치 죽었던 아들이 살아온 양 기뻐하였다. 밖에서 일하고 돌아오던 큰아들은 그 광경을 보자 부아가 치밀었다. 서운하고, 억울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배신감마저 느꼈다. 평생 아버지 곁을 지키며 살아온 자기를 위해서는 작은 잔치조차 베풀어 준 적 없는 아버지가 집안의 재산을 다 탕진해버린 동생을 위해 이렇게 성대한 잔치를 벌이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림에는 여섯 사람이 보인다. 붉은 망토를 걸친 자애로운 표정의 노인은 아버지이고 남루한 차림의 뒷모습은 작은아들이다. 아버지 옆에 붉은 망토를 입고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는 남자는 큰아들이다. 그 옆에 앉은 사람과 그림 중앙 조금 뒤편에 윤곽조차 희미한 남자는 시종, 왼쪽 위 어둠 속에 그림자처럼 희미한 여자는 시종이거나 친척일 것이다. 빛의 화가라는 별호가 부끄럽지 않게 램브란트는 각 인물의 얼굴에 빛의 강도를 다르게 표현했다. 등장인물 중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가장 환하고 해같이 빛난다.
자세히 보면,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두 손이 사뭇 다르다. 하나는 여자의 손이고, 다른 하나는 남자의 손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손은 엄격한 부성과 자애로운 모성을 나타낸다. 한 몸에 부성과 모성을 다 갖춘 아버지. 그는 분명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아버지 앞에 엎드려 뒷모습만 보이는 작은아들의 발에도 복선이 깔려 있다. 한쪽은 맨발이고, 다른 쪽은 헌 신발을 반쯤 걸치고 있다. 더러운 신발을 완전히 벗어 버려야 새 신발을 신을 수 있는데, 그는 아직도 더러운 신을 다 벗어버리지 않고 있다. 화가는 언제든 타락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인간의 욕망을 신발로 표현했다. 이는 옛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언어를 배제하고도 이렇게 심오한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화가의 영성(靈性)이 놀랍다.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오랫동안 에르미타슈 미술관에서 안내하며 공부했다는 가이드가 일반적인 견해와 다른 해석을 들려주었다. 그림 뒤편 중앙에 서 있는 희미한 남자가 큰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해석이 맞는다면, 화가는 왜 등장인물 중에 큰아들의 얼굴을 가장 어둡고 흐리게 그렸을까? 늘 성실하고 착하게 순종하며 살아온 집안의 후계자를 유령처럼 흐릿한 형체로 어둡게 그린 것은, 질투와 옹졸함으로 기쁨이 사라진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했다. 그녀의 해설에 나는 깊이 공감했다. 그런 시각으로 보는 것이 더 일리가 있다.
함께 관람하던 일행이 다 이동한 후에도 나는 혼자서 그림 앞에 한참 더 서 있었다. 워낙 유명한 그림이라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거대한 액자 속에 든 원화(原畫)의 감동은 예상보다 훨씬 강렬했다. 그림은 거울이 되어 내 모습을 그대로 비추기도 했다. 나의 내면에도 두 아들의 속성이 고스란히 다 들어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더러운 신 한 짝을 발에 걸치고 있는 작은아들처럼 나는 아직도 욕망의 끈을 완전히 놓지 못하고 있다. 끊임없이 방황하고, 흔들리고, 고민하고, 아파하며,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그런 주제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허허로운 연륜을 앞세워 짐짓 큰아들처럼 굴기도 한다. 입을 비죽이 내밀고 심통을 부리는, 치졸하고 옹졸한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른다. 날마다 자기를 돌아보며 깨우치지 않으면 그림 속의 큰아들처럼 어둠 속에 영영 갇힐 수도 있다.
스치듯 빨리 지나가며 본 많은 그림 중에서 이토록 강한 울림이 있는 작품을 만난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리어 온 것임이 분명하다. 부디 어둠에 갇혀있지도, 제자리를 맴돌지도 않는 삶을 살라고 당부하시는 것 같다. 큰맘 먹고 먼 곳까지 온 보람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