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 집은 항상 명절이 더 쓸쓸했다. 앞뒷집에 사는 작은집 식구들과 차례를 지내고 나면 할 일이 없었다.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내려온 이산가족(離散家族)이라 딱히 찾아가 인사드릴 친척도 없고, 성묘하러 갈 고향의 선산도 없었다.
아버지는 황해도 부농의 아들이셨다. 위로 누나가 둘이고 아버지보다 아홉 살 아래인 작은아버지는 유복자(遺腹子)였다. 집안의 장남인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홀어머니와 함께 집안을 이끌어 나가는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그 바람에 아버지는 아주 일찍 결혼했고, 슬하에 일남 이녀를 두었다.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 많아 살림은 넉넉한 편이었다. 활달한 성격에 음식 솜씨가 좋은 할머니는 인심도 후하셨다. 마을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사에게 마당의 한 모퉁이를 선뜻 내어 주셨다. 덕분에 고향 집 바로 옆에 교회가 세워졌다.
6.25전쟁이 터지고 전선이 오르락내리락하던 시절, 지주(地主)는 무조건 반동분자로 몰아서 처단하는 일이 북에서 벌어졌다. 아버지도 공산당에게 끌려가 모진 매를 맞았다. 얼굴과 손, 발을 제외한 온몸에 시커멓게 피멍이 다 들었다. 할머니는 어떻게든 두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공산당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피신시키셨다. 아버지는 그저 잠깐 피했다가 돌아갈 요량으로 동생과 함께 배를 타고 부랴부랴 남쪽으로 도망쳤다.
처음 계획과는 달리 인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전쟁은 멈추었고, 휴전선이 그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영영 막혀버렸다. 아버지는 졸지에 집도 땅도 가족도 없는 빈털터리 월남 실향민이 되었다. 할 수 없이 인천에서 다시 가정을 꾸리고 4남매를 낳았다. 그나마 같이 내려온 남동생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아버지는 노래를 별로 잘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술을 드시는 날엔 언제나 이 노래를 부르셨다. 호기롭게 시작한 노래는 점차 울음이 되고, 나중엔 가슴을 치며 부르는 통곡이 되었다. 아버지는 남쪽에 내려와서 얻은 첫딸인 나를 붙잡고 고향 집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행여 잘 모를까 봐 종이에다 그림을 그려서 보여 주시기도 했다.
황해도 황주군 삼전면 외송리. 여기가 우리 고향이란다. 우리 집은 마당이 아주 넓고 방도 많았어. 동네 입구엔 키가 크고 잘생긴 소나무도 있었지. 그 동네에서 우리 땅이 제일 넓고 기름지고 좋았어. 우리 밭에서 나는 건 뭐든지 최고로 맛있고 좋았거든.
네 할머니는 일찍이 혼자가 되셨지만 못 하는 것이 없는 분이란다. 그 큰 살림을 거뜬히 이끌어 나가셨어. 진짜 여장부(女丈夫)셨지. 너한테는 배다른 언니가 둘, 오빠도 하나 있단다. 내가 만약 고향에 못 가고 죽게 되더라도 너는 우리 집 식구들을 꼭 찾아가 봐야 해. 절대로 고향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알겠지?
귀에 못 박히도록 들려주는 아버지의 고향 이야기가 나는 정말로 듣기 싫었다. 아버지가 이북 얘기를 하실 적마다 노골적으로 싫어하시던 엄마 눈치가 보여서 더 싫었다.
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하고 호방한 북방인 성향에다 성격이 강한 분이셨다. 누구 앞에서나 거침없이 북에 두고 온 가족들 이야기를 하셨다. 길만 열리면 모든 걸 다 팽개치고 당장 북으로 가버리실 태세였다. 텔레비전에서 남북 이산가족 찾기 행사가 벌어지던 80년대까지도 우리 부모님은 서로 다른 시선으로 마음을 졸였다. 살얼음판을 걷듯 늘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우리 가정은 분단의 아픔을 온몸으로 직접 치열하게 겪어 냈다. 소용돌이치는 시간 속에서 나는 부모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아버지는 끝내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의 생사조차 모르고 돌아가셨다. 지독한 실향의 한을 품은 채 인천 외곽에 있는 황해도 도민 묘지에 누우셨다. 행여 아버지가 가버릴까 봐 노심초사하시던 엄마는 아버지 무덤에 합장(合葬)되셨고, 작은아버지 역시 끝내 고향에 가지 못하고 생을 마치셨다.
최근에 남북 간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나는 새삼 아버지 생각이 나서 가슴이 먹먹했다. 사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고향이라, 막상 길이 열린다 해도 내가 찾아가긴 막막하다. 아버지가 그려주신 약도는 머릿속에서 희미해진 지 이미 오래다. 아버지가 두고 왔다던 아들 하나 딸 둘은 지금쯤 칠십 중반이 훌쩍 넘은 노인이 되었을 것이다.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인데 만날 수 있을까? 설령 만난다 해도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나는 죽기 전에 딱 한 번만이라도 아버지 집에 가보고 싶다. 내 아이들과 손주들을 앞세우고 그 동네 어귀에 들어서는 상상만 해도 울컥 눈물이 난다. 추억도 없고 딱히 만날 사람도 없는데 마냥 그립다. 참 이상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