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雨傘)

  • 기사입력 2023.03.05 20:55
  • 최종수정 2024.02.03 15:12
  • 기자명 김희재 작가
▲ 김 희 재(한국어교육전문가.수필가)
▲ 김 희 재(한국어교육전문가.수필가)

  텔레비전을 보던 남편이 물어본 그 단어는 내게도 매우 낯선 어휘였다. 새로 시작한 드라마 제목 ‘슈룹’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슈로 시작되는 낱말이기에 요즘 젊은이들이 새로 만들어 낸 신조어일 것이라고 언뜻 생각했다. 은어 아니면 줄임말, 혹은 외국어 합성어인 줄 알았다. 검색해 보니 예상과는 달리 ‘우산의 옛말. 슈룹 爲雨繖.’이라고 나온다. 슈룹이 우산을 일컫는 말인 줄은 정말 몰랐다.

  생각해 보면, 우산이란 어휘만큼 함축적으로 쓰이는 이미지도 드물다. 수필의 소재로 많이 쓰였고, 노랫말에서도 다양한 의미로 나타났다. 내게 가장 먼저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동요 속에 들어있는 정다움이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골목길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 대고 걸어갑니다.

  이 노래에서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가 어디를 가는지 콕 집어서 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는 있다. 

  나는 딸만 셋인 집의 아침 풍경을 떠올린다. 고만고만한 딸 셋이 서로 좋은 우산을 들고 나가려고 쟁탈전을 벌인다. 결국, 행동이 제일 굼뜨고 마음 여린 첫째가 동생들에게 밀렸다. 별수 없이 달랑 남은 찢어진 우산을 들고 나서며 엄마를 향해 살짝 눈을 흘긴다. 새 우산 좀 사달라고 하는 투정을 담았다. 하지만 엄마는 모르는 척 외면한다.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발걸음 가볍게 골목길로 들어선다. 그들에게 가난은 약간의 불편함일 뿐이다. 내 상상 속에서 우산 셋이 나란히 걷는 풍경은 언제나 즐겁고 정답다. 

  우산은 은유적인 이미지도 많이 내포하고 있다. 자식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부모, 언제나 곁에서 동행하는 배우자, 존재만으로도 설레는 연인,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나 기관 등이 대표적인 이미지다. 덕분에 우산은 유행가 가사는 물론 공익 광고에도 종종 등장한다. 

  또 자기만의 세계를 구획하는 독립적 공간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남에게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자기 혼자 소유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우산속이다. 마주치기 싫은 사람이나 상황을 피할 수 있고,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독점할 수도 있다. 동그랗게 활짝 편 작은 세상 속으로 우주가 들어와 응축된 힘으로 온몸을 감싸 준다. 그 오붓한 느낌은 혼자 우산을 쓰고 깊이 사색하며 걸어 봐야만 알 수가 있다. 

  나는 한때 독신주의자였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규범 안으로 들어가서 살 자신이 없었다. 한국전쟁 후의 가난한 시대 상황과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유교적 분위기에서 유년기를 보낸 내가, 대학생이 되어 마주하게 된 세상엔 생소한 문화가 넘쳐났다. 책을 통해 알게 된 보봐르 부인과 사르트르의 <계약 결혼>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평생 한 사람에게 매여 사는 것은 답답하고 지루한 일 같았다. 나 자신을 여자라는 틀에다 가두어 놓기도 싫었다.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독립적인 인격체로 살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고, 내 이름으로 당당하게 사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그저 막연히 혼자 사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런 나를 자기의 반려자로 맞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이 나만을 사랑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원하는 세계로 선뜻 들어가지 못했다. 혼자서 많이 망설이고 고민했다. 나의 삶도 주체하기 힘든 판에 타인과 삶을 공유하며 산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20대의 나는 심신이 건강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넉넉하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터널에 갇혀 있었다.

  막연한 불안과 회의에 붙잡혀 방황하던 나를 붙잡아 준 분은 성경공부 모임에서 만난 미국인 선교사님이셨다. 그분은 갈팡질팡하던 내 삶에 새로운 기준을 마련해 주셨다. 나는 진심으로 선교사님의 가르침을 좋아하였다. 할아버지라 부르며 따르게 되었다. 오랫동안 연애는 하면서도 결혼하기를 주저하던 내게 선교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배우자는 우산 같은 존재랍니다. 비 오는 날엔 젖지 않게 해 주고, 한여름 뜨거운 햇볕도 가려 주지요. 길 가다가 도로에 고인 흙탕물을 만날 때도 막아 주고, 힘들 때는 지팡이 삼아 의지할 수도 있어요. 간혹 불량배를 만났을 땐 호신용 무기로 쓸 수도 있고요. 그러니 혼자 애쓰지 말고 그 사람의 손을 잡으세요. 그는 좋은 우산이 되어 줄 것입니다.”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지신 그 말씀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콱 박혔다. 서서히 내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삶의 모양이 완전히 확 바뀌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손주 다섯을 둔 할머니가 되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감사한 일이다.

  요즘 사람들은 공공연히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고 말한다. 사는 게 힘들고 앞날이 막막해서 그런지 아예 비혼을 선언하는 사람들도 많다. 암울한 시간 속에서 헤매던 젊은 날의 내 모습도 딱 그랬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니, 혼자 걷기엔 너무 멀고 막막한 길이었다. 이제는 내가 휘청거리는 사람들을 붙들어 줄 차례다. 그래도 우산 같은 그대와 동행한 덕분에, 힘든 줄 모르고 여기까지 왔노라는 말을 해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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