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어린이날은 비도 오고 두 아들은 이미 성장해서 독립해 있기에 전화로 안부를 묻는 정도로 모처럼 조용히 휴식을 취했던 날이었다. 서재에서 그동안 읽지 못하고 쌓아두었던 책들을 뒤적이며 정리하다가 어린이날이면 으레 떠오르는 옛일이 또 떠올랐다. 매년 어린이날이면 생각이 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첫 번째는 1983년 5월 5일에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8살, 9살 연년생의 두 아들을 데리고 오랜만에 아버지 노릇한다고 서울 광진구에 있는 어린이 대공원에 갔었는데 갑자기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확성기에서는 “실제상황입니다”를 반복해서 외치고 있었다. 시민들은 전쟁이 난 줄 알고 크게 놀라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적성국의 항공기가 귀순하는 상황일 것으로 짐작했지만 일단 아내에게 빨리 집에 돌아가도록 당부하고 급히 삼각지 부대(국방정보본부)로 복귀했다.
당시 나는 국방정보본부장(육군중장)의 보좌관(대령)이였다. 상황을 파악해 보니 적성국이자 미수교국인 중공(당시 지금의 중국은 중국공산당을 줄여서 중공이라고 했음)민항기가 춘천의 캠프 페이지(Camp Page, 주한미육군항공기지)에 우리 공군전투기에 유도되어 비상착륙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중국 선양을 출발해 상하이로 향하던 민항기를 6명의 괴한들이 납치하여 대만으로 가려하였으나, 조종사가 이들을 속이고 북한의 평양에 착륙을 시도하다가 들켜서 우리 영공으로 들어온 경우였다. 이 사건으로 한국과 중공간의 최초 협상이 있었고 우리나라가 유연하게 잘 처리하여 양국 간 무역이 증진되고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에 중공이 참가하는 계기가 되었었다.
두 번째는 중공민항기 납치사건 7개월 전인 1982년 10월에 중공 미그-19 전투기가 귀순했던 사건이 연관되어 떠오른다. 앞 사건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와 외교부가 주로 사건을 처리하였지만 중공군 조종사 귀순사건은 청와대의 지시를 받아 국방부가 주도적으로 조치했던 사건이었다. 당시 내가 국방정보본부장을 수행하여 자유중국과 정보교류회의를 마치고 귀국한 지 2개월쯤 되었을 시기였다. 자유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자유중국 국방부는 우리 일행에 대해 성심을 다하여 대우했다. 우리 정보본부장에게 격이 높은 수교훈장을 수여했고 정보교류 회의에서는 중공과 북한에 대해 그들이 수집한 귀한 정보를 제공해 정세판단에 큰 도움이 되었었다.
그들은 우리 일행을 중공본토에서 가장 근접해 있는 금문도(중공 샤먼시에서 육안으로도 보임)를 시찰할 수 있도록 전투기 에스코트까지 제공해줬었다. 금문도의 모든 군사시설은 지하화, 동굴화가 돼있어 중공의 항공기와 포병공격으로부터 철저하게 보호되어 있었다. 심지어 군 병원도 깊은 암벽 동굴 속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지하 대회의실은 휴일 장병들의 영화관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1950년대에는 수차례 중공의 상륙침공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격퇴시킨 전투역사도 상세하게 브리핑을 받았다.
그 당시 중공 미그기 귀순 사건은 언론보도를 상당히 통제하고 있었다. 중공 조종사 오영근(吳榮根)은 군정보기관의 합동심문에서 대만으로 보내달라고 명백히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최초의 사례이므로 조종사와 기체를 송환해 달라는 중공의 요구와 자유중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대만의 정보국장(공군소장)이 사복으로 비밀리에 입국하여 정보본부장 면담을 요청했다. 우리 정보본부장은 대만 정보국장이 조종사와 기체를 대만으로 보내달라는 요청에 대해 답변을 보류한 채 좀 냉정하게 대했던 것 같았다. 본부장실에서 나온 대만정보국장은 매우 초췌한 얼굴로 호텔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대만의 이와 같은 안보관련 비상상황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점에서 감명을 받았었다.
대만 정보국장이 떠난 뒤 정보본부장에게 다소 항의조로 나의 견해를 말씀드렸다. 자유중국은 우리나라 독립 전후 지원은 물론 6.25전쟁과 이후에도 굳건한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특히 양국의 정보기관 간은 긴밀한 협조관계인데 대만 정보국장에 대한 조치는 배려가 부족했던 것 같다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정보본부장은 기분이 언짢아하시면서 대만정부국장에게 미안하게 되었지만 아직 국가의 처리방침이 결정되기 전이므로 희망적인 말을 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대만정보국장이 중공 조종사를 보안조치 하에 만나서 사진 정도 찍도록 해주고 우리가 최선을 다해 대만으로 송환토록 노력하겠다는 언질을 주고 귀국시키면 대만정보국장은 장경국 총통과 국방부 부장에게 대한민국 군의 우호적 분위기를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냐고 건의를 드렸다.
그러자 정보본부장은 차장을 불러 논의한 끝에 내가 건의한 방안을 시행토록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호텔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대만정보국장에게 연락해 정보본부장을 다시 만나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대만정보국장은 정보본부 차장의 안내로 비밀리에 귀순조종사 오영근을 만나고 대만으로 돌아갔다. 그후 우리 정부에서는 조종사는 대만으로 추방하고, 기체는 중공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방침을 결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치도 ’007작전‘같이 했다. 얼마 후 대만정보국장은 대만공군으로서는 전례없이 공군중장으로 진급하였다는 후문을 들었다.
나는 ‘83년 7월 전방사단의 포병연대장으로 전속명령을 받아 부임한 후 한 달 쯤 뒤에 국방정보본부로부터 자유중국 대사관에서 훈장수여식에 참석하여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뜻밖에 일이라 놀라기도 했지만 아직 부임초이고 사단장의 첫 순시가 예정되어 있어 참석하지 못하고 훈장과 훈장증만 전달받았다. 훈장증서에는 ’대한민국 국방정보본부장 조리(助理 ; 한국군 보좌관) 이석복 상교(上校 ; 한국군 대령)‘라고 수여자의 직책과 성명이 적혀있었다. 또한 ‘협조 오영근의사 순리반국촉진 중한군의(協助 吳榮根義士 順利返國促進 中韓軍誼)’라고 훈장을 수여하는 공적사항을 명기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귀순한 북한군 조종사에게 의사(義士)칭호를 부여하지 않는데 반하여 대만에서는 매우 높이 대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중한군의(中韓軍誼) 즉 자유중국 국군과 대한민국 국군 간 우의(友誼)를 강조한 것이 새삼스럽다.
비록 우리나라가 국제정치 역학과 국가이익 차원에서 1992년 중국인민공화국(옛 중공)과 수교함에 따라 불가피하게 대만과 단교를 하게 되었지만 대만(자유중국)은 여전히 외교관계를 떠나서라도 우리나라와 국가안보 및 해상교통로(수출입 통행의 생명줄) 확보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자신의 3연임 임기(2023년부터 5년)내 대만을 통일하려 한다는 것이 공공연한 우려이므로 우리나라도 중국이 무력으로 대만을 침공 시 대비계획을 마련해서 때를 당하여 낭패를 당하지 않도록 대한민국답게 대응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군의 유비무환(有備無患)을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