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원을 걸으며 드라마를 생각하다

  • 기사입력 2023.06.05 23:01
  • 최종수정 2024.02.03 15:11
  • 기자명 김희재 작가
    김 희재 (수필가, 한국어교육 전문가)
    김 희재 (수필가, 한국어교육 전문가)

 물 한 병 챙겨 들고 국립대전현충원 둘레길로 산책을 나선다. 야트막한 숲길에 솔잎이 쌓여 있어 딛는 촉감이 폭신하다. 소나무와 대나무,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이다. 깊이 사유하며 걷기에도 딱 좋은 코스다. 

  묘비들이 작은 꽃다발 하나 품고 일사불란하게 대오를 맞추고 있는 묘역을 지나도 무섭지 않다. 호국영령들이 모여 계신 곳이라 그런지 음습한 기운은 전혀 없다. 밝고 따스한 기운이 가득하다. 죽음까지도 뛰어넘을 수 있는 숭고한 삶의 가치를 생각하며 천천히 걷는다. 괜히 또 가슴이 뭉클하다.

  나는 스무 살 즈음에 육사 생도를 만났다. 6년여 동안 밀고 당기는 연애를 한 끝에 결혼하였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예비역 육군 대령의 아내가 되었다. 돌이켜 보면, 남들처럼 달콤한 신혼의 단꿈을 꿀 여가조차 없는 고단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전출명령에 따라 보따리를 싸고 풀며 정신없이 팔도강산을 휘돌아다녔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여유롭게 젊음을 구가하는 삶은 꿈도 꾸지 못했다.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최우선인 군인에게 집안일은 항상 맨 나중 순위였다. 그 바람에 살림과 육아를 혼자 도맡아 종종걸음치며 살았지만, 나는 언제나 남편의 군복이 자랑스러웠고 내심 뿌듯했다. 

  오래전에 방영되었던 <태양의 후예>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드라마다. 우리의 중대장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이야기여서 좋았다. 생명이 위태로운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젊은이들이 멋있어서 더 좋았다. 각자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재난 현장에서 인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자국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특전사의 모습은 슈퍼맨보다 더 멋있었다. 무조건 상명하복(上命下服)해야 하는 군대 조직 속에서, 서로 신뢰하고 의리를 지키는 사나이들의 우정엔 가슴이 뛰었다. 다분히 비현실적인 설정인데도 나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인공들과 함께 울고, 웃고, 가슴 졸였다. 

  특히 국가 간에 외교 안보 문제로까지 번진 인질 구출 사건의 책임을 묻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책임 소재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자리에 대통령이 등장하여 모든 책임은 최종 결정권자인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외교 안보 채널을 전부 가동해서 대통령이 직접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하고, 특전사령관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인사한다. 

  “우리 국민을 무사히 구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아주 짧게 지나가는 이 장면이 가장 좋았다. 열 번도 넘게 비디오를 돌려보며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는 ‘우리 국민’이라는 어휘에 감격했다. 볼 때마다 매번 울컥하고 눈물이 났다. 봐도 봐도 고맙고 시원한 카타르시스였다. 

  작가는 드라마를 통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忠誠)’이라고 역설했다. 국가는 ‘이름 없는 국민 한 사람’을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참된 군인정신이 무엇인지도 재조명해주었다. 

  드라마 덕분에 군인의 이미지는 물론 딱딱하고 투박한 군인 말투도 친근하게 되었다. 특히 ‘~지 말입니다.’로 끝나는 말투는 남녀노소가 다 따라 하는 유행어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에게 군 복무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도 확산시켜 주었다. 실제로 특전부사관 지원자가 급증하여 경쟁률이 5대 1이 넘었다. 파급 효과가 정말로 대단하고, 선한 영향력을 지닌 드라마였다.

  연애 시절부터 남편은 내게 군인은 성직자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두 직군(職群) 모두 평소에 세 가지 준비를 항상 하고 있어야만 하는 점이 닮았다고 했다. 국가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출동할 준비, 명령을 (부르심을) 받으면 어디로든 이사 갈 준비, 국가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준비가 그것이다. 그렇게 준비하고 매 순간 충성을 다해야만 명예로운 훈장 (면류관)을 받는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평생 잊히지 않았다. 

  비록 시대와 가치관은 바뀌어도, 소소한 개인의 행복보다 국가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진한 감동을 준다. 나는 앞으로도 태양의 후예를 능가하는 재미있는 드라마가 계속해서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왕이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들에게까지도 공감받을 수 있는, 여운이 오래 남는 감동적인 이야기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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