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식 국방부장관 후보자를 위한 변명

  • 기사입력 2023.09.20 22:41
  • 최종수정 2023.10.25 22:51
  • 기자명 김석수 칼럼니스트/직접민주연구원장
▲신원식 국방부장관 후보자가 과거 매국노 이완용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이 알려지면서 논란 거리가 되고 있다.[MBC 영상 갈무리]
▲신원식 국방부장관 후보자가 과거 매국노 이완용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이 알려지면서 논란 거리가 되고 있다.[MBC 영상 갈무리]

막걸리 반공법이란 게 있었다. 막걸리 마시고 말을 잘못해서 반공법위반으로 처벌받았다. 관련한 우스개 소리는 접적 지역인 철원군에서 농사짓던 한 노인이 추곡수매 쌀값이 형편없이 떨어지자 대폿집에서 술마시다 온갖 불평불만을 털어놨다. 살기 힘들다며 정부를 비난했다. 마침 옆자리에서 술 마시던 보안부대 요원들이 “이 영감, 이거 빨갱이 아냐?”라고 시비걸었다. 그러자 그 노인이 “뭐? 빨갱이 좋아하네”하자 요원들은 이 노인을 반공법으로 체포했다. 그 노인의 조서에는 “빨갱이 좋아”까지만 적혀있었다. 결국 빨갱이를 좋아했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 처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웃자고 한 얘기지만 실제 이런 사례가 있다. 1968년 요리사 김종천씨는 파출소에 연행되자 “선량한 국민을 왜 못살게 구느냐, 공화당은 공산당만도 못하다”라고 말해 유죄판결 받았다. 1970년도에 김 아무개는 자신의 집을 철거하러 온 철거반원들에게 “김일성보다 더한 놈”이라고 말해서 역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말과 해석이 극단화되고 있다. 앞뒤 자르고 선동하고 싶은 것만 부각시키니까 그렇다. 진영정치의 부작용이다. 신원식 국방부장관 후보자가 이완용을 옹호했다고 비판하는 보도가 있다. 그가 한 집회에서 "우리는 매국노의 상징으로 이완용을 비난한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에 저항했다 하더라도 일본과 국력 차이가 너무 현저해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완용이 비록 매국노였지만 한편으론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비판자들은 ‘이완용이 매국노’라고 규정한 것은 생략하고 ‘어쩔수 없었다’를 부풀려 이완용을 옹호했다고 강조한다. 물론 신원식 후보를 비난하고 싶은 이들에겐 좋은 먹잇감이다. 그러나 보통 시민이 봤을 땐 '솔직하게 말하는 직설적인 군인품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종합적으로 보기보다 어느 진영관점에서 한 부분만 편식해서 보는 문제가 우리에게 있다. 

역사는 본문(텍스트)만 읽으면 뜻을 알기 어렵다. 그 본문의 뒤에 있는 배경(컨텍스트)을 함께 봐야 한다. 이완용의 매국을 둘러싼 배경은 단순하지 않다. 구한말에는 정부가 부실했다. 나라를 지킬만한 군사력도 없었다. 경제력은 더욱 형편없었다. 지방 미관말직까지 매관매직으로 인한 탐관오리들 가렴주구로 동학난 등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관군을 대신해 나라 지키려는 의병이 일어나긴 했다.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이 확대되어 1907년의 군대 해산 이후에는 해산 군인이 합류한 정미의병으로 세력이 커졌다. 1908년에 의병수는 절정에 달해 7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다 일제의 남한 대토벌작전인 삼광작전으로 의병은 크게 위축된다. 1909년에는 2만5천 명으로 급감했고, 1910년에는 고작 수천 명만 남았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주나 연해주 등지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었다. 그 사이에 대한제국은 쪼그라들었다. 1905년에 일본의 승리로 끝난 러일전쟁 직후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통감부 설치로 대한제국은 준식민지로 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1910년 이완용은 현실론을 택한다. 일본 황족 평균 세비가 6~8만 엔인데 비해 대한제국의 이씨왕가 세비는 150만엔이었다. 일본 천황 다음가는 부자대우였다. 영친왕과 결혼한 일본 황족 이방자 여사도 단순 정략결혼이 아니라 영친왕의 세비가 일본 황족보다 월등히 높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또 고종과 순종 등에 대한 ‘전하’ 호칭과 포괄적으로 민족을 보존해준다는 일제에 협조하는 것이 최적의 결론이라고, 똑똑한(?) 이완용은 판단한다. 그렇게 나라를 일본에 넘겼다.  강제병합이 아니라 조약이란 좀 순화된 평화적(?) 방법으로 조선을 집어삼킨 것은 이토 히로부미 작품이다. 한일병합 1년 전인 1909년 안중근에게 총살당한 이토지만 조선을 평화적으로 병합하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 그는 일본내 과격한 급진 정한론자들과 치열하게 싸웠다. 이토는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에 치를 골치 아픈 통치비용을 절감하고 이익만 쏙 빼먹으려는 부드러운 지배전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서방 선진국들이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식민지 직접 지배방식이 아니라 간접지배하는 신식민지 전략이 이토 전략이라고 할수 있었다. 실제로 대한제국의 이씨왕가는 이토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순종은 이토의 죽음이후 측근에게 “이토 공작이 있기에 한국이 존속할 수 있었다. 지금 공작을 잃었으니 국운이 이미 다하였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할 정도다. 영친왕도 이토가 매우 잘 대해준 측근이라고 여겼다. 

안중근 거사로 이토가 죽자 일본 정부안에서 군국주의자들이 득세했다. 한일병합을 추진하고 조선을 직접 지배한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 일으켜 만주를 장악하고 1937년엔 중일전쟁을 벌인다. 일제 군국주의는 이토가 죽은 후 본격화되는데, 외교노선보다 군사노선을 앞세웠다. 어쨋든 앞뒤 맥락을 보면 이완용의 매국 배경에는 그를 비난만 할수 없는 요인이 있다. 그런 점에서 신원식 후보자가 힘을 기르고 내우외환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순신의 유비무환 자세가 필요하다고 직설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는 논란을 피해 잘 빠져나가는 정치인 체질보다 있는 그대로 말하는 군인출신이다. 이런 꼿꼿장수가 있어야 대통령이나 외교부 장관이 외교에서 발언권을 높일 수 있다. 강직한 군인은 정치를 잘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모함하면 이순신처럼 필요할 때 써먹지 못한다. 숭배하자는 게 아니라 나라주인인 국민이 인재를 잘 써먹는 자세와 방법을 익혀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국민이 진짜 나라주인이 되어 실력있는 종들을 부려먹을 수 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공정사회
경제정의
정치개혁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