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고위관계자가 육군사관학교의 독립전쟁 영웅실 철거에 관해 “백선엽 장군의 국립현충원 친일행적 기록 삭제, 독립영웅 흉상 철거에 이은 신종 매국 행위에 다름없다”고 말했다. 그 전에 이종찬 광복회장은 ‘우리 군의 뿌리는 일제강점기 독립군 무명용사라며, 육사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반대한다’는 생각을 거듭 밝혔다.
결론부터 말하면 광복회가 헛다리 짚었다. 광복회는 그 뿌리를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두고 있다. 그 임시정부가 왜 해방 후 귀국하면서 승전국들로부터 정부로 승인받지 못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인정받지 못한 우리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프랑스 망명정부와 자유프랑스군과 비교된다. 독일에 병합된 프랑스는 1940년 드골의 자유프랑스군 1만명으로 해방전쟁을 벌인다. 물론 국내 22만명에 이르는 레지스탕스 운동도 프랑스해방에 중요한 요소다. 중요한 것은 1만 명의 군사력으로 시작한 자유프랑스가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인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전후 처리에 당당한 목소리를 낼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에게도 자주독립 기회가 있었다. 그 꿈을 한방에 날려버린 사건이 1921년에 벌어진 자유시 참변이다. 얼마 전 푸틴과 김정은이 만난 보스토치니의 옛 이름이 스보보드니라는 자유시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면서 상해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 왕국에서 민국으로 국체가 변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각지에 흩어진 독립군을 하나로 통합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청산리, 봉오동전투 등으로 만주일대 독립군을 소탕하려는 일제에 의해 쫒겨간 배경도 있다. 러시아 내전 중 일제가 러시아 짜르편 백군과 연합하여 레닌의 적군과 한인독립운동가들을 연해주에서 몰아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이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통합된 대한독립군단을 만들기 위해 모였다. 당시 자유시는 극동공화국 도시로서 레닌의 적군(볼셰비키)이 장악하고 있었다. 적군은 자유시에 들어오려는 한인부대의 무장해제를 요구했으나, 김좌진 부대 등은 거부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간다. 그후 자유시와 인근에는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고려공산당 상해파가 주도권다툼하다가 러시아 적군과 이르쿠츠크파인 오하묵 자유대대가 상해파 고려공산당군을 공격한다. 그 결과 수천명에 달하는 상해파 부대가 궤멸된다. 피해자 측인 사할린의용대 주장에 따르면, 현장에서 사망 72명, 익사 37명, 기병의 추격을 받다가 산에서 사망 200여명, 행방불명 250명으로 총 600여명이 사망하고, 917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사망 36명, 포로 864명, 질병으로 불참 19명, 도망한 30명, 행방불명 59명이라고 주장하였다. 어쨌든 이 참변으로 수천 명의 독립군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고, 체포된 이들은 시베리아 벌목공 등으로 사라졌다.
이때 홍범도는 체포된 독립군을 재판하는 재판위원으로 참여한다. 일부에선 홍범도가 더 많은 독립군을 지켜내려고 재판위원이 되었다고 하나, 그 논리는 민족을 지키기 위해 나라를 팔았다는 이완용의 변명과 다르지 않다. 인물은 행위로 평가해야지 변명이나 합리화된 논리로 평가할 일이 아니다. 홍범도는 적군 편에 섰고 이 일로 상당수 독립군들이 러시아적군으로 편입되었다. 당연히 대한독립군이란 이름은 사라진다. 홍범도는 상해파 독립군을 진압한 러시아 칼란다리쉬빌리의 명령에 따라 이르쿠츠크로 함께 이동한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해서는 적군 5호군대 조선여단 제1대대장으로 복무한다. 즉 홍범도가 볼셰비키군이 된 것이다.
홍범도는 몇 달후인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후 레닌으로부터 금화와 권총을 하사받는다. 자유시침변에 대해 홍범도는 자신이 1938년도에 쓴 자서전 ‘홍범도일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레닌을 만난 일에 대해 그는 자서전에 쓴 이력서에, “1921년 동지달에 모쓰크와로 레닌동무게로 1921년 자유시에서 조선빨찌산을 어간에 뉴혈적 사변이 난데 대한 보고을 하려고 조선빨찌산대표로 갇다.” 고 쓰고 있다. 자신이 적군 편에 가담해 진압한 자유시참변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1927년엔 소련공산당에 입당해 죽을 때까지 소련공산당원으로 살았다.
다시 문제는 광복회다. 광복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계승한다. 자유시참변에서 진압당한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초기에 상해임시정부를 승인한 바 있다. 그 부대가 러시아적군 편에 선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 의해 사라져버렸다. 수천명의 독립군들이 1920~21년 사이에 독립운동을 했지만 자유시참변이후엔 상해임시정부와 관계없이 모두 사라졌다. 진압당한 한인부대는 죽거나 시베리아 벌목공으로 끌려가 사라졌고, 이들을 진압한 이르쿠츠크파와 홍범도 부대 등은 러시아 적군으로 편입되어 사라졌다.
만일 자유시 참변이 없었고 이들이 단일대오로 독립운동을 발전시켰다면 자유프랑스처럼 수만명의 병력으로 식민지가 아니라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인받아 전후에 당당한 독립을 할수 있었다. 심지어 자유프랑스가 2차 대전후 과거사에서 독일과 뺏고 빼앗겼던 알자스-로렌 지역을 연합국 허가없이 점령해버린 것과 같이, 우리도 1870년대 메이지 유신 전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친 쓰시마를 패망한 일제로부터 돌려받아 우리 땅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실제로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이승만대통령은 쓰시마섬을 되찾아와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잇는 광복회는 자유시 참변을 일으킨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최소한 방조후 가해자편에 서서 대한독립군단을 레닌의 품에 갖다 바친 홍범도를 옹호해선 안된다. 특히 피해자인 상해파 고려공산당부대는 상해임시정부를 한때나마 인정한 집단이었던 반면, 가해자인 이르쿠츠크파는 상해임시정부와 전혀 관계없는 집단이었다. 지리멸렬한 임시정부는 이봉창, 윤봉길 등의 개인 의거로 중화민국 장졔스로부터 인정받고 자금 등을 지원받았지만 해방직전에 겨우 500여명의 광복군만 존재했다. 그리고 이중 일부는 미군의 첩보부대인 OSS(CIA전신) 요원으로 활동했을 뿐이다.
우리 선조들의 피맺힌 독립운동사를 폄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오늘의 분단비극의 뿌리는 자유시참변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사변으로 뿔뿔이 사라지고 흩어진 독립군들이 이후에 쏘련과 중공과 미군 등의 하청부대격으로 전락하면서 프랑스처럼 독자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한 임시정부를 인정받는 데 실패했다. 바로 그 뿌리에 홍범도의 행적도 있는 것이다.
육군사관학교는 대한민국을 적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군간부를 양성하는 곳이다. 대한민국의 주적은 엄연히 북한이고, 넓게 보면 러시아와 중국도 해당된다. 그런 교정에 홍범도 장군 흉상이 있다는 것은 정체성을 흐리는 짓이다. 육군참모총장 말대로 대적관을 흐리는 짓이다. 그 개념없는 짓을 문재인이 했고, 지금 그 후과로 소모적인 국민분열이 일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계승한다는 광복회는 홍범도 흉상을 육사교정이 아니라 독립기념관으로 옮기라고 해야 한다. 그것이 광복회가 맥을 바로 잡는 일이다. 맥락으로 보자면, 홍범도 반대편에 있는 광복회가, 육사교정의 홍범도 흉상을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해 역사를 바로잡고 육사정체성을 명확히 하려는 정부를 연일 비난하는 것은, 넌센스 중의 넌센스다. 광복회가 정신 차려야 한다.
마침 25일 오전 11시 국립대전 현충원에서 홍범도 장군의 순국 제80주기를 추모하는 행사가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다고 한다. 이와같이 육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그를 비롯한 독립 영웅들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만큼 우리 국민들이 언제나 기억하고 예우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될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