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방첩’은 흘러간 구호일까

  • 기사입력 2023.12.05 16:13
  • 기자명 김석수 칼럼니스트
김석수 컬럼니스트
김석수 컬럼니스트

1961년 쿠데타로 들어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다. 그런데 이 반공 국시는 김종필이 만들었다고 한다. 남로당 경력으로 여순사건(당시엔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는 박정희가 미국 의심을 지울 수 있는 카드로 혁명공약 1호로 내놨고, 이를 본 박정희가 ‘이거 나 때문에 썼겠구만’이라며 받아들였다는 비사다.

어쨌든 선언에 그친 이승만 정부의 ‘반공’은 5.16 이후에 체계화되었다. 동네 담벼락과 전봇대 등에 ‘반공방첩’이란 표어가 나붙었다. 내부의 적인 친북세력 소탕에 나섰고 68년도에는 통일혁명당 간첩단사건을 적발한다. 통혁당은 김종태가 월북해 북한 지령·자금을 받고 결성된 조직으로 조선로동당 지시를 받는 지하당이었다.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다. 검거된 자는 158명이었으며, 이들 중 73명이 송치되었고, 23명은 불구속되었다. 무장공작선 1척, 고무보트 1척, 무전기 7대, 기관단총 12정, 수류탄 7개, 무반동총 1정과 권총 7정 및 실탄 140발, 12.7mm 고사총 1정, 중기관총 1정, 레이다 1대와 라디오 수신기 6대, 미화 3만여 달러와 한화 73만여 원 등이 압수되었다. 이 사건 유명 연루자는 문재인이 존경한다는 신영복과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인 박성준 등이다. 북한에 남은 이들 잔당들은 해주 등에서 ‘통일혁명당 방송’을 시작했고, 그 후신은 ‘구국의 소리’방송을 거쳐 지금의 ‘통일의 메아리’방송이다. 이른바 주사파들을 향해 지령과 메시지를 날리는 대남 공작방송이다.  

이런 간첩단 사건들은 정부로 하여금 반공과 더불어 ‘방첩’이란 구호를 만들게 한다. 그리고 ‘반공방첩’이란 복합어가 하나의 단어로 굳히는 계기가 된다. 방방곡곡에 ‘반공방첩’ 표어가 나붙게 된 배경이다. 

사실 간첩(스파이)이 세계역사를 바꾼 사례는 많다. 알려진 대표 사례가 쏘련의 핵개발이다. 쏘련 핵무기 개발은 빨라도 50년대일 것이라고 예상한 미국은 깜짝 놀랐다. 1949년도에 카자흐스탄 사막에서 실시한 단 한번의 핵실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본에 떨어뜨린 미국 원자폭탄과 똑같은 위력의 핵무기였다. 알고 보니 쏘련이 미국 핵무기개발 계획인 ‘맨해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일부 연구원들을 포섭한 결과였다. 쏘련이 자체 핵개발을 하다가 막힌 부분을 이들 스파이들이 빼돌린 자료를 결합해 미국과 똑같은 핵무기를 만든 것이다. 

인터넷 해킹에 의한 자료 가로채기 전에는 암호해독이 주된 스파이활동이었다. 2차대전 승리의 뒷면에는 ‘컴퓨터의 아버지’ 앨런 튜링이 있었다. 독일군 암호기인 에니그마 암호를 영국 암호해독부의 튜링 등이 판독해 전쟁 판도를 바꿨다. 앨런 튜링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대중의 호기심을 사기도 했다. 그는 당시 영국에선 불법이었던 동성애자로 밝혀져 화학적 거세형을 당했고, 실의에 빠져 사과에 청산가리를 주사해 한입 깨물고 자살했다. 그리고 그를 존경한 스티브 잡스가 그를 추모하기 위해 ‘한입 베어문 사과’를 애플사 로고로 썼다는 설이 유력하다. 죽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튜링을 2013년에 특별사면을 했다. 

태평양전쟁 판도를 바꾼 미드웨이 해전도 암호해독에 성공한 미군승리로 돌아갔다. 일본 해군 주력이 태평상 섬 미드웨이를 공격한다는 암호를 해독한 미군이 기다렸다가 일본 해군을 제압한 것은 ‘미드웨이’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렇듯 첩자질은 아군에게는 승리를, 적에게는 패배를 안겨주는 중대활동이다.  세계 각 나라는 지금도 첩보전과 방첩전에 국민이 알수 없는 막대한 예산을 쓰고 있다. 우리 국정원이 국회심의도 받지 않는 ‘영수증 필요없는 예산’을 막대하게 쓰는 이유도 첩보전과 방첩전의 중대성을 정치권이 알기 때문이다.

12월 4일, 경찰청이 북한 해킹조직 '안다리엘'이 국내 방산업체 등을 해킹해 주요 자료를 빼갔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평양 류경동에서 83차례 접속한 ‘안다리엘’이 통신·보안·IT 서비스 업계 국내 대기업 자회사와 첨단과학기술·식품·생물학 등을 다루는 국내 기술원·연구소, 대학교, 제약회사, 방산업체, 금융회사 등 수십여곳을 해킹했다는 것이다. 그중엔 레이저 대공무기를 비롯한 주요 방산자료도 있는데, 특히 레이저 빔 무기는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오는 첨단무기로 미국 등 군사강국들이 경쟁적으로 개발하고 있는 신무기다. 

물론 이런 해킹은 북한이 길러낸 사이버공작원들이 한다. 그러나 이들이 온라인에서만 이런 정보를 캐낼 순 없다. 무기개발업체가 어느 곳인지 등 그 밑자료는 우리 내부 간첩들이나 첩자들 협조 없이 알기 어렵다. 지금 재판받고 있는 충북간첩단 사건을 봐도, 이들 주요 임무 중 하나가 각종 산업, 군사정보를 수집해 북한에 보고하는 일이다. 즉 북한 해킹그룹과 국내 간첩들이 첨단무기 정보유출로 이어지는 완성된 시스템인 것이다.   

탈냉전시대를 지나온 우리 국민에게 얼핏 ‘반공방첩’은 낡은 구호일 수 있다.  6~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정권유지를 위한 북풍전략이라고 비난해온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졌던 시절도 있었다. 구냉전이 해체된 탈냉전시대에 국익 중심으로 세계질서가 재편되었던 때다. 90년대 이후에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구호가 이 시절 주된 구호였다. 그러나 60~80년대 ‘반공’이 자유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던 구호였다는 점을 지나치게 폄하는 것도 역편향이다. 구냉전시절엔 거기에 맞는 대응책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세계질서 늘 변한다. 그 변화에 적응하면 살고 지체되면 죽는다. 구냉전에서 탈냉전으로 이어진 세계질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신냉전으로 접어들었다. 이념중심 구냉전과 국익중심 탈냉전과 달리 신냉전은 이념과 국익이 혼합된 중층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때문에 일부 국민들이 구냉전과 탈냉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헷갈리고 있다. 탈냉전시절에 해이해진 안보의식으로 엄연히 닥친 신냉전을 안이하게 보는 일부 관점은 큰 문제다. 

그 사례가 얼마 전 신세계그룹 정용진 회장의 인스타그램 소동으로 나타난 바 있다. 정 회장이 인스타그램에 ‘멸공’이라고 썼다가 혐오표현이라는 이유로 삭제되었는데, 표현의 자유를 무시한다는 정 회장 반발로 인스타그램이 슬며시 복구시켰다. 시중에선 뜬금없이 웬 ‘멸공’이냐고 비아냥댔지만, 사업환경에 민감한 기업인은 시대흐름에 민첩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이 망하기 때문이다. 신냉전시대 이념대결을 강조한 윤 대통령이 역풍을 맞은 것은, 주장의 잘못이라기보다 탈냉전 체질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민의식과의 시간차가 원인이라고 봐야 한다. 시대는 늘 소수의 선각자가 이끌고, 다수 대중이 뒤따라오며, 극소수의 군집이 과거세력으로 뒤처지는데, 이 순서에 약간의 시간 차가 있다. 상식은 다수 대중의 생각이고, 그 상식은 시대마다 즉각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련한 김대중 대통령은 후배들에게 국민보다 한 발자욱이 아니라 반 발자욱만 앞서가라고 했다. 혼자 너무 빨리 가지 말고 대중과 함께 가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신냉전을 맞은 지금, ‘반공방첩’표어는 여전히 유효하다. 구냉전의 ‘반공’은 ‘반전체주의’로 가는 것이 맞지만, ‘방첩’은 그대로 유효하다. 세계 각나라 망국과정을 보면, 외침보다 외침을 막아내지 못한 내부문제가 반드시 있다. 마치 공기 중에 득시글거리는 숱한 병균이 문제가 아니라 빈약한 사람 몸의 면역이 문제인 것과 같다. 면역이 약하거나 파괴될 때 코로나19같은 변형 감기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지, 바이러스 존재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때문에 지금은 우리 안의 면역기능인 방첩의식이 살아있는지 긴급하게 점검해야 한다. 구냉전과 탈냉전시절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냉전 국제질서에 뒤처지면 나라가 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나깨나 간첩조심’은 낡은 구호가 아니라, 우리 생존과 번영을 위한 발판이다. 최근 1인당 GDP 5만5천달러로 우리 2배인 이스라엘이 막강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하마스 공격으로 1200명의 국민이 학살당했다. 그로 인한 전쟁으로 도시가 쑥대밭이 되고 있고 애먼 양쪽 민간인들이 도륙당하고 있다. 먼나라 남의 일이 아니다. 이렇게 신냉전 질서가 전쟁을 통해 우리를 엄습하고 있다. 이런 때에 우리 안의 정쟁으로 국민 힘을 분산시키는 것은 자멸행위다. 그야말로 쓰나미 밀려오는 바닷가에서 한가하게 조개 줍는 격이다. 방첩이란 면역체계를 갖추어야 할 시급한 때에, 다른 일로 어영부영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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