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을 쏘고 심신을 단련하는 군사적 건물 ‘관덕정(觀德亭)’

문화재 : (보물) 제주 관덕정 (濟州 觀德亭)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관덕로 19 (삼도2동 983-1)

  • 기사입력 2024.04.08 10:27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 제주 관덕정
▲ 제주 관덕정

[한국NGO신문=정진해 대기자] 제주의 해안에는 많은 관방 문화재가 남아 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연대와 환해장성 등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리한다. 또한 섬을 둘러싸고 있는 천혜의 자연인 해안의 높고 낮은 절벽과 다양한 모양의 바위, 사철 우거져 있는 나무 등도 빼 놓을 수 없는 천혜의 자연 관방시설에 포함된다.

▲ 강화도 계룡돈대
▲ 강화도 계룡돈대

특히 해안을 둘러싸고 있는 연대는 강화도의 돈대와 비교할 수 있다. 강화도의 돈대는 54곳이 일정한 거리와 규모로 병력이 화력을 무장하여 섬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라면, 제주도의 25곳의 연대는 적의 침입을 사전에 알리는 횃불이라는 데서 차이가 있다.

▲ 애월 연대
▲ 애월 연대

특히 제주에서의 봉수는 고려 충렬왕 7년(1281)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탐라 등에 봉수를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세종 21년(1439) 제주도에 22개 봉수를 설치해 운영했다는 기록이 있다. 18세기에 봉수제도가 정착되면서 제주 해안에는 총 25곳에 봉수를 설치했다. 바다에 의심 선박이 나타나면 봉화 2개, 가까이 접근하면 봉화 3개, 적군이 해안에 상륙하면 봉화 4개, 접전이 벌어지면 5개의 봉화를 올렸다. 구름과 안개로 연락이 어려울 때는 고둥소리를 활용했고, 낮에는 연기로 교신했으며, 봉수 주변에 연기로 인한 오인을 막기 위해 무속이나 통속적인 제례를 엄격히 금지했다. 봉수마다 훈련을 거친 병사 10여 명을 배치했으며, 이들은 다른 군역을 하지 않았다.

 제주도의 군사 훈련은 훈련청에서 실시했으며, 이곳에서 단련된 병사들을 곳곳에 배치 했었다. 이 훈련청은 세종 30년(1440) 목사 신숙청이 병사들을 훈련하기 위해 관덕정을 짓고 훈련을 했다. 관덕정의 목적은 음풍농월하며 자연과 일치되는 낙을 즐기거나 조용히 독서와 사색하고 학문을 교류하고, 때로는 계회, 방회나 연회를 베풀면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모임 장소로 활용되는 장소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활쏘기하고 군사 훈련을 점검하는 공간으로 했다. 

▲ 제주 관덕정
▲ 제주 관덕정

관덕정은 조선시대의 관아 건물로 처음에는 관덕당이라 불리었다. 관덕(觀德)은 《예기》의 〈사의(射義)〉 편에 나오는 “활쏘기는 진퇴와 주선(周旋)이 반드시 예에 맞아야 한다. 마음이 바르고 자세가 곧아야 활과 화살을 잡을 때 바르고 안정되고, 활과 화살을 잡을 때 바르고 안정되어야 적중을 말할 수 있다. 활쏘기는 덕행을 살필 수 있다. (射者 進退周旋必中禮 內志正外體直 然後持弓矢審固 持弓矢審固 然後可以言中 此可以觀德行矣)”는 말에서 유래한다. 즉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 관덕정 현판
▲ 관덕정 현판

조선시대 지방 관아마다 군사 훈련 시 활쏘기가 포함되면서 관덕정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관아의 여러 채의 건물이 헐리면서 관덕정도 함께 헐리게 되었다. 지방관아의 여러 관덕정 중에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제주도에 있는 관덕정이 유일하다. 특히 창경궁에 왕이 활을 쏘던 관덕정의 정자가 남아 있다. 처음에는 취미정(翠微亭)이라 부르다가 1664년(현종 5년)에 정자를 수리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곳에서 군사훈련과 무과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관덕정의 본래 목적은 춘당대에서 벌어지는 각종 과거와 활쏘기 등 무술 연마를 왕이 신하들과 관전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가을철 궁궐의 단풍 구경을 하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 탐라 현승과  호남제일정 편액
▲ 탐라 현승과  호남제일정 편액

제주의 관덕정도 마찬가지로 앞에는 넓은 빈터가 있고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활쏘기를 했던 곳이다. 설립 당시 세종대왕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에게 제액을 받았고, 대문장가인 신석조에게 「관덕정기(觀德亭記)」를 짓게 하였다. 그러나 화재로 인해 안평대군의 글씨는 손실되었고 관덕정기는 현존하지 않는다. 지금의 관덕정 편액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의 작품인 것으로 청음 김상헌이 지은 「남사록(南槎錄)」에 기록되어 있다.

성종 11년(1480) 목사 양찬이 중수, 숙종 16년(1690)에 목사 이우한이 중수, 영조 29년(1753)에는 목사 김몽규가 중수, 정조 원년(1778)에는 목사 황최언이 중수, 순조 33년(1833)에는 목사 한응호가 중수, 철종원년(1849)에는 목사 이현공이 중수했다. 처음에는 3칸의 건물이었지만, 이후 여러 번 중수와 개축 과정을 거쳐 지금과 같은 규모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는 일본인 도사(島司) 전전선차(前田善次)에 의해 보수됐는데, 관덕정의 처마가 2척이나 짧아지고 문이 달려 정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 제주 관덕정 천장
▲ 제주 관덕정 천장

건물의 구조는 이중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전면 5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26개의 두리기둥이로 이루어진 단층 목조 건축물이다. 또한 이익공 집으로서 처마가 길어 전체적으로 높이가 낮아 보인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는 일본인 도사(島司) 전전선차(前田善次)에 의해 보수됐는데, 관덕정의 처마가 15척(454.5cm)이나 되던 긴 처마의 끝부분 2척(60.6cm)이나 짧아지고 문이 달려 정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창호와 벽체를 가설하지 않고 사방이 트여 있어 누정의 양식이며 건물의 방향은 동쪽이다. 기둥 위는 창방으로 결구하고 창방 아래 인방을 바로 짜 올렸다. 공포는 평방 없이 기둥 위에 바로 짜 올렸는데 쇠서 2개를 둔 이익 공식이며, 기둥 사이에는 화반을 세 개씩 두었는데 이 화반 위에 운공을 보 방향으로 놓아 외일출목도리를 직접 받치고 있다. 바닥의 전면 1칸 폭은 마루를 깔지 않고 네모난 돌을 다듬어 깔았고 2중 기단의 바닥으로 하고, 후면 3칸 폭에만 나무로 짠 우물마루를 깔았다. 누정 안에는 앞뒤 일렬로 네 개씩 높은 기둥을 세워 대들보를 걸고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받쳤으며, 다시 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 관덕정의 화려한 단청
▲ 관덕정의 화려한 단청

이들 대공은 도리 밑의 장혀와 나란하게 놓인 뜬창방으로 연결되었는데, 이러한 가구 수법은 누정 건축에 흔히 있는 것이다. 건물 내부의 포벽에는 건립 당시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7폭의 벽화가 남아 있다. 모두 중국의 고사를 소재로 한 것이다. 남쪽과 북쪽 들보의 상산사호(商山四皓), 취과양주귤만교(醉過楊州橘滿轎),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지금은 그림이 퇴색하여 전혀 알아볼 수 없어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모조품이 걸려 있다. 천장 보와 보 사이에 ‘耽羅形勝(탐라형승)’ 이란 큰 글자는 정조 4년(1780) 김영수 목사가 쓴 글씨이다. 또, 안쪽에는 고종 19년(1882)에 목사 박선양이 쓴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 사방이 트여있는 누정 양식
▲ 사방이 트여있는 누정 양식

관덕정을 해방 이후 한동안 미국공보원, 국민회가 건물을 사용했으나 1959년 3월 9일 문교부에 의해 국보로 지정되면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고,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재지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2003년 12월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 때 2척이나 줄었던 처마를 복구하는 전면적 보수공사가 진행되어 2006년 8월에 마무리되었다.

관덕정에서 군대 사열과 연회의 잔치 같은 모임을 모두 여기서 하였다.’라는 기록에서도 조선시대 관덕정의 성격을 알 수 있다. 1702년에 그려진 탐라순력도를 보면 관덕정에서는 공마 진상과 군사 훈련, 연회 등을 위한 관청 중심의 기능을 하는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관덕정이 위치한 곳은 제주에서 전통적으로 중심지여서 행정의 중심인 제주목 관아와 성주청이 있었고, 관아가 헐린 뒤에는 제주도청, 경찰서, 소방서, 건너편에는 식산은행이 자리 잡고 있었고, 해방 뒤에는 관덕정 바로 옆에 미군정청이 설치되었다. 또한 일제 말기에는 5일 장터로도 이용하였다.

중요한 사건들이 줄줄이 일어났는데, 신축민란 때는 제주성에 입성한 이재수가 관덕정 앞에서 악질 봉세관에 빌붙어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고 천주교를 앞세워 제주의 토속신앙을 파괴한 사이비 신자들을 잡아다 처형했다. 1947년에는 3·1절 기념행사와 관련, 관덕정 앞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부녀자를 포함한 시민 6명이 현장에서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4·3사건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한라산 남로당 무장대의 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을 삽자형틀에 묶어 관덕정 앞에 세워두었다. 관덕정 앞에서 '산폭도' 혹은 '군경 가족'으로 몰려 공개 처형당한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2001년부터는 관덕정 앞에서 탐라입춘굿 놀이 행사를 치름으로써 문화의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관덕정 앞에는 큰 키의 돌하르방 2개가 서 있다.

▲ 관덕정 앞의 돌 하루방
▲ 관덕정 앞의 돌 하루방

조선 초기 대학자로 『동문선』을 편찬한 서거정(徐居正)이 관덕정을 노래한 시가 그의 문집에 전한다.

觀德亭前山似畫  관덕정 앞에는 청산이 흡사 그림 같고

朝天館下水浮空  조천관 밑에는 물이 하늘에 떠 있으리

奇遊萬里男兒事  만리 밖 신기한 유람은 남아의 일이라

應向扶桑早掛弓  응당 부상의 가지에 일찍 활을 걸겠지   

▲ 동북환해 장성
▲ 동북환해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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