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NGO신문=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창덕궁 후원 부용지, 영화당을 지나 불이문을 들어서서 우측의 애련지를 보며 걷다 보면 전통가옥인 연경당이 자리한다.
장락문을 들어서면 우측에는 사랑채로 통하는 장양문(長陽門)이 있고 좌측에는 안채로 통하는 수인문(修仁門)이 있다. 장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과 사랑채 마당을 경계 짓는 담장이 있고 가운데에 통용문인 협문이 정추문(正秋門)이 있으나 건물은 하나로 연결된 구조이다.
궁궐 후원에 사랑채, 안채, 안 행랑채, 바깥 행랑채, 반 빗간, 서재, 후원, 정자 및 연못을 갖춘 사대부의 주택건축이 들어서 있는 것이 궁궐건축과의 비교가 된다. 이른바 99칸 집이라 불리고 있으나 현재 건물의 실제 규모는 109칸 반이다.
<동궐도>에는 반 빗간 구역에 5칸 규모의 창고와 5칸 규모의 행각이 있고, 측간 1칸과 헛간 3칸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123칸 반으로 보이나 <궁궐지>에는 120칸으로 기록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이 건물은 1828년(순조 28)에 사대부의 생활을 알기 위해 효명세자(익종)가 왕께 요청한 것이 건립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하나 『동국여지비고』 , 『궁궐지』 ,『순조무자진작의궤부편(純祖戊子進爵儀軌附編)』 ,『순조실록』, 동궐도(東闕圖)」 등의 자료에 의하면 1827년에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축 의식을 맞아 이를 거행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풀이된다. ‘연경(演慶)’이라는 명칭도 ‘경사스러운 행사를 연행(演行)한다’는 의미에서 지었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 공사를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연경당은 가장 먼저 솟을대문인 장락문을 들어선다. “장락(長樂)'은 오래도록 즐거운 삶을 누리는 월계의 문‘이라는 의미로 신선처럼 아무 걱정과 근심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염원을 담고 있는 뜻이다. 솟을대문으로 1칸의 구조이다. 장락문을 들어서면 행랑채가 있으며 이곳에는 말을 둔 마구간과 화장실 등으로 구성되었다. 행랑채 마당에서 다시 솟을대문으로 만든 사랑채로 들어가는 장양문과 평대문으로 만든 안채로 들어가는 수인문이 있다.
연경당은 가옥 전체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사랑채의 당호이기도 하다. 궁궐의 건물임에도 단청을 하지 않고 남녀 공간을 나누어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였는데, 이것은 18~19세기의 반가 건물과 유사함을 찾을 수 있다. 내부는 연결되어 있어 사대부의 살림집과 유사하다. 다만 가묘가 없는 점과 부엌이 안방 옆에 있지 않고 반빗간이 따로 둔 것이 일반 사대부가의 구조와 다른 점이다.
사랑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사랑방과 누마루로 구분하였다. 누마루와 대청의 문은 접어서 들쇠에 매달아 사방을 개방함으로써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도록 한 구조이다. 대청에서 사랑방으로 연결되는 곳에는 8각형의 창을 낸 불발기를 설치하였다. 사랑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고 뒤쪽의 침방은 취침하는 곳이다. 툇마루를 사분합문을 달았다. 대청과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구성하였고, 가구 구조는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고 종도리와 주심도리로 된 5량가의 간략한 구조를 띤다. 툇마루는 우물마루를 하였으며, 누마루는 별도로 돌출되지 않고 툇마루와 같은 선상에 있고 화려한 창호살로 구분하였다. 누마루 하부에는 장주초로 기둥을 받고 있으며, 팔작지붕의 합각에는 전돌로 문양을 내어 합각벽을 마감하였다. 본채는 2단의 장대석 기단을 두었는데, 누마루는 한 단을 내린 기단 위에 설치하였다. 기단 위에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는 내·외벽을 설치하였으며, 내·외벽 앞에는 괴석을 담은 석함이 놓여 있다. 사랑채 바깥면은 온돌방이 있는 부분이 조금 더 나와 있어 일자형 평면에 변화를 주었다.
사랑채 동편에는 문인을 접객하던 선향재가 남북으로 길게 자리한다. 건물의 좌우에는 온돌방을 두었고,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하였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벽면 하부에는 온돌을 위한 합실아궁이가 있으며, 전후면에는 통풍과 습도조절이 잘되도록 일반적인 창호를 달았다. 지붕의 처마 양쪽으로 동판 지붕을 덧대었는데 이는 선향재가 서향집이므로 해 질 무렵 햇볕이 질게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지붕의 하부에는 차양을 덧대고 심끈과 도르래를 달아 햇살을 조정하였다.
장대석으로 한 단을 놓고 낮은 기단 위에는 방전을 설치했고 온돌방 앞에는 쪽마루를 두었다. 내부는 중앙 3칸은 대청으로 좌우 2칸은 온돌방을 두었으며, 내부의 기둥을 설치하지 않아 전체공간이 개방된 모습이다.
선향재 옆으로 높게 쌓은 단이 있고 그 위로 사모정인 농수정이 자리한다. 장락문을 들어선 손님은 장문을 들어와 사랑채에서 주인을 만나고, 다시 선향재에 들려 글을 읽고 농수정에 올라 자연의 멋을 느끼는 시간을 갖는다. 창덕궁 후원에는 부용정, 애련정, 관람정, 존덕정, 승재정 등은 연못에 직접 초석이 물속에 있는 것과 연못을 직접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정자와 계곡의 물길을 볼 수 있는 후원의 정자가 있다. 그러나 연경당의 정자는 트여있는 공간에 있는 정자가 아니고 둘러싸인 담장 안쪽의 높은 곳에 있는 정자이다. 이 정자는 농수정으로 1837년(헌종 3) 이후 이곳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농수(濃繡)’는 ‘짙음을 수놓다’라는 뜻으로, 녹음에 둘러싸여 있다. 연경당 구석 깊숙한 곳에 자리하여 녹음에 둘러싸인 풍경을 표현한 이름이다. 외부의 세계를 모두 잊고 숲에서 지저귀는 새의 소리만 간혹 들리고, 외부에서 사람들의 활동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공간이다. 정자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아도 스스로 녹음에 갇혀 있는 느낌을 받고 장락문에 들어오는 손님, 장양문에 들어와 사랑채로 가는 사람의 모습도 볼 수 없는 정자이다.
「동궐도(東闕圖)」나 『궁궐지(宮闕志)』에 농수정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적어도 순조 때까지는 없던 건물이다. 1837년(헌종 3) 이후 언젠가 만들어진 정자지만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정자에 오르면 남쪽으로 주합루 일대의 뒷모습과 희우정 지붕 일부가 눈에 들어오고 모두 우거져 있는 나무의 윗부분이 보인다. 정자를 오르는 앞쪽에는 자그마한 뜰을 만들었고 꽃을 심은 계단과 구별하기 위해 돌난간을 둘러 경계를 표시하였다.
1칸짜리 이익공 양식의 건물로 지붕은 겹처마의 사모지붕이며, 가운데에는 기와로 된 항아리 모양의 절병통으로 장식하였다. 각 면마다 문이 설치되어있는데 아(亞)자 살로 되어있어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문짝이 넷으로 되어 좌우와 위아래로 여닫을 수 있는 사분합문이다. 창을 내리면 닫힌 방이 되고, 들어 올려 들쇠에 걸면 기둥만 서 있는 열린 공간이 된다. 기둥 바깥으로는 좁은 쪽마루가 둘려 있고, 그 가장자리를 따라 평난간을 둘렀다. 농수정이 있는 작은 공간이 연경당의 후원 역할을 한다.
사각의 기둥 네 곳에는 주련이 각각 두 개씩 걸려 있다. 정면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걸린 주련의 내용을 보면, 임금의 글과 말을 찬양하고, 농수정 주위의 봄 풍경과 함께 소박하게 사는 모습, 여러 사람이 모여 시를 나누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모습, 문장이 질박하고 엄정한 기풍은 정신을 맑게 높여준다는 뜻을 각각 담고 있다.
五色天書詞絢爛 금 조서(詔書)는 글이 오색찬란하고
九重春殿語從容 깊은 봄 궁궐은 말씀 은은하시네
春水方生花來鏡 봄물에 막 생기 돌아 꽃이 사방에 피었으니
吾廬可愛酒滿床 내 오두막집 사랑스럽고 술은 상에 가득하네
如斯嘉會知難得 이 같은 좋은 모임 얻기 어려움 알겠고
常駐詩人若有緣 늘 머무는 시인 인연이 있는 것 같네
漢魏文章多古質 한과 위의 문장 예스러운 질박함이 많고
春秋風日長精神 춘추의 풍기는 의식을 자라게 하네
농수정은 고종이 어사진을 최초로 찍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고종이 어사진을 찍을 때에 좌우로 경복궁 근정전 안에 있는 청나라 하사품인 향로를 양쪽에 놓고 찍었다. 고종이 어사진을 쪽을 당시의 계단은 담장용으로 사용되는 사고석을 하단에 놓고 그 위에 장대석을 놓는 방식을 반복하였는데, 현재 계단은 모두 장대석으로 마감되어 있는데, 이는 변형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