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유역의 삼국시대 축성된 옛 성곽 I

문화재 : (사적) 하남 이성산성
소재지 : 경기 하남시 춘궁동 산36번지 외

  • 기사입력 2024.06.18 00:58
  • 기자명 정진해 대기자
▲ 하남 이성산성 전경
▲ 하남 이성산성 전경

[한국NGO신문=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한강은 선사시대, 청동기시대, 삼국시대에 이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심에서 전략적 수로 역할을 해오면서 조선왕조와 일제강점기 무역 활동 등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해 왔다.

한강 유역의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에 이르면서 농경문화의 발전이 이어졌으며, 삼국시대에 이르러 한강 유역을 점유한 국가는 영토의 확장과 더불어 국가 발전의 강력한 터전을 마련한 결과가 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각 지배하던 시기에는 나라가 번영하였고 상실하면 쇠퇴하였다. 한반도의 중심 무대가 되었던 한강은 군사, 경제, 사회, 외교적 제조건을 갖추어 있었기 때문이다.

▲ 이성 산성
▲ 이성 산성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문종 21년에 한강 유역의 중요성을 알고 당시 양주(현 서울)를 남경으로 승격시켜 개경 및 서경과 함께 3대 요지가 되었다. 이후 우왕은 한양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창궐, 대명 관계의 복잡성 등 정치,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고 풍수지리설이 성행하자 도읍이 불길하다 하여 이듬해 2월에 개성으로 돌아왔다. 고려 마지막 왕 공민왕이 천도를 단행하였으나 불길한 일이 자주 발생하여 다시 개성으로 도읍을 옮겨갔다.

▲ 이성산성
▲ 이성산성

 태조 이성계는 즉위 16일 만인 1392년 8월 3일에 도평의사사에게 한양 천도를 명하여 태조 3년(1394년) 10월 25일(음력) 천도를 실현하였다. 천도의 배경은 풍수지리설에 영향을 받은 것과 구가세족의 반발에 대처할 필요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강한 의지는 한강을 끼고 한양의 인문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에 무게를 두었다. 한양은 지세가 군사적 방위에 천연 요새지로 꼽았으며, 국가재정의 운영을 위한 세곡의 운송에 큰 관심을 가졌다. 조산 후기에 이르러 세재개혁과 대동법 실시에 따라 한강은 더욱 중요성을 더하게 되었다. 호남을 비롯하여 충청도 등지에서 수납되는 대동미는 조운선을 통하여 한강으로 수송되었다.

▲ 이성산성 건물지
▲ 이성산성 건물지

 삼국시대의 한강 유역은 근초고왕 때부터 백제 땅이었던 한강 유역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백제 개로왕이 피살되면서 고구려 땅이 되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의 북진으로 신라 땅으로 변했다. 3국이 거쳐 가면서 한강 유역에는 남아있는 유물과 유적이 당시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한강 본류의 길이는 514km에 이른다.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에 이어 4번째이다. 강원도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대덕산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양수리에서 두 강이 합류하여 하나의 한강이 되어 북서 방향으로 흐르면서 왕숙천, 중랑천, 안양천 등의 소지류가 더해져 김포를 지나 임진강을 만나면서 조강이 되어 강화해협에서 바다가 된다.  

▲ 이성산성 12각 건물지
▲ 이성산성 12각 건물지

두 강이 합수하여 흐르는 한강 근거리에는 크고 작은 성을 두어 나라의 평화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팔당에서 내려오다 보면 먼저 백제가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면서 옹진으로 천도할 때까지 약 500년 동안 백제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그때 축성된 백제시대의 성곽인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 아차산성, 이성산성, 남한산성 등이 있다. 몽촌토성은 백제의 도성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 내성과 외성으로 축조되었으며, 성 밖에 해자 시설을 갖춘 도성으로서의 요건을 갖추었다.

 하남시 춘궁동에 위치한 이성산성(사적)은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청량산에서 북쪽으로 내려오는 줄기와 만나 길게 맥을 형성하는 금암산의 줄기에 접해 있다. 남쪽은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이 있으나 북쪽은 작은 구릉만 있어 한강 주변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아차산 서편에 이르기까지 한강 유역의 넓은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북쪽의 적으로부터 한강 유역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 이성산성 동문지
▲ 이성산성 동문지

산성의 총둘레는 1,665m로서 해발 209.8m인 주봉을 중심으로 남쪽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부정형 사각형의 형태이며 성벽 안쪽에는 외곽도를 두어 이동이 용이하게 하였으며, 성벽은 자연 지형을 따라 축조되었다. 성벽이 급격히 회절하는 부분에는 치(稚)를 두었고, 북쪽·서남쪽·동쪽·남쪽에 문터가 있으며 남문이 정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동문터는 사다리를 놓고 오르내리도록 한 현문식의 구조이고 문터의 바닥에는 수구가 성 밖으로 연결되어 있다.

산성의 내벽 축조 방법은 우선 지형이 낮은 부분은 성벽의 안팎을 수직에 가깝게 쌓는 내외협축법(內外夾築法)으로 쌓아 올렸고, 지형이 높은 부분에는 암반을 파내고 성돌을 암반에 기대어 쌓아 올리는 편축법(偏築法)을 이용하였다. 

▲ 이성산성 저수지
▲ 이성산성 저수지

여러 차례 발굴 조사를 통해 건물터와 문터, 성벽, 저수지가 조사 되었다. 건물터에는 총 11동의 건물터가 있는데, 장방형 건물터가 5동, 부석식 건물터와 9각 건물터가 각 2동, 8각 건물터, 12각 건물터가 각 1동씩 있으나, 이외에도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음을 추정하고 있다. 특히 건물의 형태가 9각과 12각은 독특한 건물이다. 9각 건물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天壇)으로, 8각 건물은 토지신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면적은 장방형건물의 경우 80~90평에 달하는 대형 건물이며, 다각형건물들은 20~30평 내외이다. 

▲ 이성산성 성벽
▲ 이성산성 성벽

이성산성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대체로 6~8세기경의 신라시대 토기류와 기와이며, 벼루도 여러 점이 출토되었다. 저수지 내에서는 철제도끼와 쇠스랑, 짚신, 목제인형, 바구니, 팽이 등 다양한 생활 도구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요고와 다량의 목간(木簡)은 당시 사회생활을 알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출토 유물 중 목간에서 명문이 확인되었고, 내용은 무진년 정월 12월에 어떠한 모임이 있었고 거기에 참석한 도사(道使)와 촌주(村主) 등의 지방관과 지방 유력 세력의 직명을 나열한 것으로 해석된다. 무진(戊辰)년 608년이나 668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또한 목간(木簡) 중에는 “남한성(南漢城)”이라는 성의 명칭이 확인되어 이성산성이 남한성 또는 한성이었을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어 더욱 연구가 필요하다. 

▲ 이성산성 배수지
▲ 이성산성 배수지

산성이 축조된 시기와 축성의 목적을 알려주는 문헌자료는 보이지 않으나, 조선시대의 학자 정약용과 중정남한지를 쓴 홍경모, 대동지지를 쓴 김정호는 모두 백제의 성이 하남에 있으며, 왕성 또한 고골의 궁안 마을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사학자인 금서룡(今西龍)은 춘궁리 일대를 백제의 도읍지로 보고 이성산성을 『삼국사기』개로왕조의 북성(北城)으로, 남한산성을 남성(南城)으로 보았다.

▲ 이성산성 석재
▲ 이성산성 석재

 전국에 분포된 18개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다각형 건물 중 반수 이상이 이성산성에 있어 그 쓰임과 시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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