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유역의 삼국시대 축성된 옛 성곽 3

문화재 : (사적) 서울 풍납동 토성
소재지 : 서울 송파구 풍납1동 72-1번지 외

  • 기사입력 2024.07.16 10:43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 풍납토성 남쪽성벽
▲ 풍납토성 남쪽성벽

[한국NGO신문=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한강 주변의 높은 곳에는 적으로부터 감시와 방어의 수단으로 성을 쌓았다면 한강 변의 평지성은 통치자 보호를 위해 축성되었다.

백제시대 초기(한성백제기) 한강 변에 땅을 파고 뻘흙을 깔아 기초를 만들고 그 안팎으로 진흙과 모래흙을 다진 판축기법으로 중심 토루를 쌓았으며, 일부 구간에는 식물을 깔거나 자갈을 이용하여 토루를 보강하는 등 독특한 축성 기술로 쌓은 토성이 자리하고 있다.

▲ 풍납토성 남쪽성벽
▲ 풍납토성 남쪽성벽

서쪽으로 한강에 연한 남과 북의 방향 장타원형 형태를 띠며, 북벽과 동벽, 남벽이 남아 있다. 서벽은 서남부를 제외한 대부분 유실되었다. 1976~78년에 446m의 북벽이 복원되었고, 동벽은 북쪽 일부 구간이 유실된 것을 제외하고 약 2.1km가 남아 있다.

토성의 전체 둘레가 약 3.7k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고이왕 시기와 근초고왕 시기에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백제가 나라다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때를 고이왕부터인 것으로 설명해 왔다. 마한 멸망 역시 근초고왕 대라고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 학설이다. 그러나 풍납토성이 이 학설을 뒤집었다.

▲ 풍납토성 전망대에서 본 안쪽 성벽
▲ 풍납토성 전망대에서 본 안쪽 성벽

한강 변의 충적대지상에 자리한 평지토성이다. 풍납토성의 관심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서벽이 유실되어 드러난 청동제 초두를 비롯하여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지상에 드러나서부터 이다.

성의 외곽에는 서쪽의 한강과 동쪽으로 한강의 지류를 이용한 방어용 해자(垓子)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 학자들은 이 토성이 하남 위례성일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발굴 조사가 지속되면서 풍납토성이 백제의 최초 도성이었음이 학계의 정설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중요성이 인정되어 1936년 성벽 3만 8천여 평이 고적 제27호로 지정되었고, 1963년 사적 제11호로 재지정되었다. 

▲ 풍납토성 서쪽 성
▲ 풍납토성 서쪽 성

1997년 처음 풍납토성의 발굴이 이루어진 후로 20년이 지나는 동안 토성의 절반도 발굴하지 못하였다. 이미 성곽 내부에는 현대 건축물이 빼곡히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1925년 전까지만 하여도 풍납토성은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드러난 유물로 관심을 받았을 때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비정했으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자 1960년도에 서울대학교 고고학부에서 조사하면서 많은 유물을 출토하였으나 몽촌토성을 방위하는 사성(蛇城)으로 추측했다.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았었다. 그러자 1997년 토성 내에서 신축공사를 하는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 선문대 이형구 교수가 몰래 들어가 지표 조사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그동안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 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단 한 번으로 풍납토성이 왕성일 것으로 추측되었다. 

▲ 풍납토성 북쪽 발굴 현장
▲ 풍납토성 북쪽 발굴 현장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중심으로 긴급 조사되고, 건물을 매입하며 철거하면서 수많은 부장품이 발굴되었다. 2011년 동성벽 조사에서 성벽의 건축연대가 부분별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동쪽 중앙부는 기원전 1세기에 준공되었고, 기원전 2~3세기에 증축되었다. 동쪽 남부는 3~4세기 준공, 4~5세기 증축되었다.

 이것은 구 한성백제의 건립연대인 3세기로 다시 올라가 버린 것이다. 연차적 발굴 조사 과정에서 백제 초기 왕성의 흔적인 건물지가 잇따라 발견되었다. 토성 내부 중앙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경단연립 재건축 부지에서 동서 너비 16m, 남북 길이 18m 이상의 ‘呂’자 모양의 대형 건물지와 북쪽 건물의 외곽에 ‘ ’자 모양의 도랑이 감싸고 있는데 너비 150~180㎝, 깊이 120㎝ 정도로 일정하며 바닥에 2~3중의 대형 널돌이 깔려 있다.

▲ 풍납토성 발굴 후 ]조성된 공원
▲ 풍납토성 발굴 후 ]조성된 공원

이 건물은 내부와 외부를 도랑으로 차단한 점, 도랑 바닥에 널돌과 정선된 숯을 깐 점, 화재로 폐기된 점, 유물이 거의 없는 점 등으로부터 공공 성격의 제의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곳의 대형 웅덩이에는 많은 토기편과 동물 뼈가 출토되었는데, 동물 뼈는 소와 말의 머리뼈이며, ‘大夫(대부)’가 새겨진 직구단경호 등이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제사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확인된 것은 대형 창고이다. 내부에는 다수의 백제 토기와 중국에서 만든 시유도기(유약 도기)와 무늬를 찍은 도기도 출토되었다.

특히 시유도기에는 생선의 뼈와 이빨 등이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한강에서 고기를 잡았다는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다.

▲ 풍납토성 백제문화공원
▲ 풍납토성 백제문화공원

 옛 풍납동 강가에는 폭우로 인한 홍수와 장마로 인한 강우 등으로 상당 부분 사라졌으며,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진행되기 전, 토성의 성벽은 깎고 다듬어 산책로를 내고 오솔길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무너진 성벽 자리에는 시설물들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발굴도 복원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2012년 토성 남쪽 지역을 발굴 조사 하던 중 지하 3층 깊이로 약 2,540평 넓이에 건축 폐기물이 묻혀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쓰레기는 송파구청 공무원의 지시로 이곳에 폐기물이 묻어졌다. 2개월 동안  쓰레기만 퍼내다가 지쳐서 포기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다양한 문화재 발굴에 대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풍납토성에서는 동진제(東晉製) 초두 등 중국과의 교역을 암시하는 유물뿐만 아니라 왜계, 가야계 토기도 출토되었다. 발굴 조사에서는 낙랑계 청동 포수, 부여계 은제 이식 장식과 복골, 북위계 연화문 와당과 월주요 계통의 청자완 등 외래계 유물이 속속 출토되어 당시 풍납토성에서 북방과 남방을 넘나드는 활발한 대외교류 활동이 있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풍납토성 주변에는 백제에 관련된 유적이 산재해 있다. 서남쪽에는 석촌동과 방이동의 왕릉급 고분군과 문헌에 명시된 아단성(아차산성), 사성(삼성동 토성) 외에 풍납토성 동쪽과 남쪽으로도 전략적 요새로서의 이성산성을 쌓거나 남한산에 목책과 같은 방어시설을 설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 풍납토성 수혈주거지
▲ 풍납토성 수혈주거지

 한편, 풍납토성으로 비정되는 ‘하남 위례성’의 축조 이후 꾸준한 왕권 강화와 체제 정비를 도모한 백제는 고구려와 낙랑, 말갈 등 북방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몽촌토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확대 정비된 도성이 ‘한성(漢城)’으로 이해되며, 이러한 구조가 고구려에 함락되는 개로왕대까지 이어져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의 구조로 묘사된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북성’이 바로 풍납토성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으로 존재하다가 몽촌토성이 추가로 축조되면서 한성백제시대 도성의 구조는 풍납토성 단일 궁성 체제에서 ‘북성’인 풍납토성과 ‘남성’인 몽촌토성의 양궁성 체제로 발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 건물지
▲풍납토성 건물지

 풍납토성이 한양도성과 산성 등에 비해 규모 면에서 작다고 생각되나, 시대별 궁성을 비교해 보면 결코 작은 규모의 궁성이 아니다. 같은 시기의 고구려 국내성과 신라의 경주 월성과 비교해 보면 풍납토성은 규모면에서 가장 크다. 경주 반월성에 비해 3배나 큰 것이 풍납토성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공정사회
경제정의
정치개혁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