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NGO신문=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몽촌토성역 1번 출구를 나서면 올림픽 세계평화의 상징인 도베르만의 평화의 문을 모티브로 디자인된 문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듯 웅장하게 서 있다. 문 가운데에는 88 올림픽 당시 점화하였던 성화 불씨가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고 있다. ‘세계평화의 문’ 은 한국전통건축의 둥근 곡선을 활용하고 비약과 상승의 이미지를 강조한 작품이다. 조형물의 천장 부분인 날개 하단에는 한국 전통 양식인 단정을 주조로 하여 사신도인 청룡, 주작, 백호, 현무를 양면에 단층으로 그려 넣었다. 문의 앞쪽 좌우로 열주 탈이 각 30개씩 늘어서서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문을 들어서 동쪽으로 향하면 넓고 긴 호수가 있고 그 너머서 높은 언덕에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호수와 높은 언덕에 대한 역사적 흔적을 찾아보기로 한다. 문에서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물이 가득 담겨 있는 호수처럼 생긴 연못이다. 이 연못은 한강의 지류를 이용하여 만든 해자이다. 해자는 동쪽의 토성과는 달리 또 다른 성이다. 적군이 이 해자를 건너서 성벽이나 성문을 들어와야 싸움이 벌어지지만, 해자를 앞에 두고 싸움은 긴장 상태로 있는 것뿐이다. 우리나라 성곽 중에 해자의 흔적이 있는 곳은 한강 본류와 지류를 이용한 풍납토성과 금강의 자연적인 해자를 이용한 공산성, 사비기의 부여나성은 백마강의 서편과 북편으로 강을 자연적인 해자로 삼고 있다. 또한 낙안읍성에도 해자가 있다.
해자의 시작은 선사시대 취락을 감싼 환호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 이후 취락 주변에 환호를 돌려 방어적인 성격을 분명히 하는 방어취락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환호가 등장한 시점은 청동기시대이고 이후 초기 철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까지 이어진다. 한국사에서 확실한 해자는 삼국시대 유적에서 찾아야 한다. 고구려 최초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중국 요령성 환인(桓仁)시 하고성자(下古城子)는 혼강을 자연적인 해자로 삼고 있으며 두 번째 왕성인 길림성 집안(集安)시 국내성(國內城)은 압록강과 그 지류인 통구하(通溝河)를 해자로 삼고 있다. 신라의 왕성인 경주 월성(月城)의 경우, 월성의 남쪽을 흐르는 남천이 남쪽의 자연 해자 역할을 하고 북편과 동편, 서편은 불규칙한 웅덩이를 파서 해자를 만들었다.
몽촌토성의 해자를 건너면 토성이 자연 구릉을 따라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몽촌토성은 백제가 설립한 시기에 풍납토성과 함께 만들어진 도성이다. 몽촌토성이 알려진 시기는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경기장을 짓는 과정에서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이 일반 백성이 사용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군대 막사로 추정되는 주거지와 저장 구덩이, 굽다리 접시, 세발 그릇, 기와, 철제 도구, 뼈 갑옷 등이 발굴되었다. 청자 조각이나 금동으로 만든 허리띠 장식 등은 중국과 교류가 있었다는 유물도 나왔다. 이때부터 발굴 조사와 연구가 시작되었다.
몽촌토성에서 풍납토성까지의 거리는 약 700m 거리이며, 서남쪽에는 방이동 고분군과 석촌동 고분군이 자리 잡고 있다. 풍납토성은 인위적으로 흙을 이용해서 배 모양의 성을 쌓았다면, 몽촌토성은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하여 한강 변 인근에서 비교적 높은 곳에 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몽촌토성을 이리토성이라 불러왔고, 학계에 관심을 두게 된 때는 1975년 웅진 천도 1,500주년 기념 학술대회부터이다. 이 학술대회에서 이기백 선생이 석촌동 고분군에 대응하는 생활 근거지로 이리토성을 거론하면서 성읍국가 단계 백제국의 성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후 ‘88 서울 올림픽’ 체육시설 부지로 확정되자 1983~1989까지 6차에 걸쳐 조사가 실시 되었다. 일부 고지대를 중심으로 내부 시설물을 확인하는 정도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족기와 직구단경호 등의 백제 토기류와 중국제 도자기와 금동제 과대금구(銙帶金具, 허리띠 장식), 뼈로 만든 갑옷 등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면서 백제 초기 왕성으로 보는 견해가 정설화 되다시피 하였다.
몽촌토성을 걸어보면 석성과는 다르게 지형이 다른 지점보다 구릉이 이어지지 않은 지점을 연결하여 축성한 것을 알 수 있다. 토성은 남북이 730m, 동서 570m 마름모꼴의 모양이다. 토성의 성벽 정상부의 기준으로 서북 벽은 617m이고, 동북 벽은 650m, 서남 벽은 418m, 동남 벽은 600m로 전체가 2,285m에 이른다. 동북 벽에서 동북쪽으로 뻗어나간 성벽은 치성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성벽의 규모는 곳곳이 차이가 나는데, 서북 벽과 동북 벽의 절개 조사에서 기저부의 너비는 50~65m, 높이는 12~17m, 성상의 넓이는 7.5m~10.5m 정도이다. 발굴 조사에서 성벽 입자의 점성이 강한 점토를 두께 5~10cm 단위로 얇게 펴서 다져쌓는 판축기법으로 축조하였다. 동쪽으로 경사가 완만한 곳은 삭토하여 급경사로 하였다. 또한 서, 북, 동북쪽에는 해자를 두었는데 넓은 공간의 해자는 인공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성내천의 물길을 이용하고 성곽 쪽으로 일부 팠던 것으로 추정한다. 1984년, 1985년의 2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일부 구간은 목책(木柵) 구조로 이루어졌음을 밝혔다.
이밖에 북문지, 동문지, 남문지가 발견되었는데, 자세한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약 10m 내외의 너비에 부분적으로 할석을 깐 것이 확인되었으며, 기능상 출입구뿐만 아니라 배수구의 역할도 겸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마름모꼴 성벽의 각 변에 하나씩 3~5m 정도로 판축 성토하여 만든 망대지도 4기 확인되었다. 이들은 성벽 중에 자형이 가장 높은 곳을 선택하여 일부 성토한 토단 형태로 되어 있으며, 각각 사방을 조망하기 가장 좋은 고지대에 세워져 있다. 서북망대지는 몽촌토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해당하는 표고 44.8m의 정상부에 있으며, 잠실과 풍납동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이곳에서는 백제 시대의 중첩 건물지가 확인된 바 있다.
문터는 3곳이 확인되었는데, 너비는 북문터 약 10m, 동문터 약 7m, 남문터 약 10m이다. 북문터는 너비 약 10m 가운데 서쪽의 5m 정도 되는 부분이 성벽 아랫부분에 이어져 편평하게 판축 되었으며, 나머지 동쪽 부분에는 깬돌이 깔려 있다. 망대는 4곳에서 확인되었는데,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3∼5m 정도로 흙을 쌓아 만들었다. 서북쪽 망대 터는 몽촌토성에서 가장 높은 정상부에 위치하여 석촌동과 잠실, 풍납동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두 곳의 연못지가 확인되고, 수혈주거지는 성벽 정상부나 경상 면에 위치하는데 주로 병사들의 막사로 이용된 것으로 추정한다. 곡식이나 음식물을 저장하는 저장공이 발견되었는데 성벽 정상부의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출토된 유물로는 백제 한성기의 전형적인 토기인 고배, 삼족기, 직구단경호, 광구장경호, 심발, 장란형토기, 단경호, 단경옹, 시루, 뚜껑, 원통형기대, 병 등이 다수 확인되었으며, 중국 위진대(魏晉代)의 회유도기와 동진대(東晉代)의 청자 등 중국 도자기편도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병사들이 입었던 철갑과 두겁창, 창고달, 칼, 도끼, 화살촉 등 성에서 갖추어야 할 무기류가 발굴되었다.
서남지구 고지대에서는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고 온돌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475년 고구려가 한강 이남을 점령하고 이후 백제와 신라 연합군에 의해 밀려나는 551년까지 일정 기간 이곳에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몽촌토성은 방어성의 기능과 궁성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본다. 즉 고지대에 위치한 건물지와 판축대지가 존재하는 것은 토성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금동제 과대금구와 중국제 도자기 등의 유물에서 풍납토성과 더불어 몽촌토성에도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신분의 사람이 거주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 475년 고구려에 의해 백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임을 당할 당시, 장수왕이 이끄는 3만 대군이 한성을 에워싸고 북성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남성으로 옮겨서 공격하니 성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가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 아래로 보내 죽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에서 북성과 남성에서 몽촌토성은 한성의 남성일 가능성이 높다.
몽촌토성은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 국가 형성에 축성된 별궁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도성이다. 특히 중국 유물의 출토는 백제와 중국 남조 국가의 활발한 교류와 판축 성토에 의한 토성 축성은 백제 한성기를 중심으로 한 백제 토성의 유형과 축성 방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