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NGO신문=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하여 차지했다. 당시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다가 고구려군에 잡혀 아차산 아래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백제는 한성을 내어주고 옹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겼다. 백제가 떠난 자리는 오랜 세월의 흐름에 땅속에 묻혔다가 현대에 와서 그 사실을 하나하나 찾아내고 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싸웠던 그 흔적들은 땅속 깊은 곳에서 하나둘씩 빛을 얻어가고 있다.
한강은 어떤 강이기에 빼앗고 뺏기는 일이 계속되었을까? 가장 먼저 한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도 한성을 빼앗겼던 치욕을 당했기 때문에 옛 수도와 한강 유역 지역을 되찾는다는 것이 매우 중요했었다. 신라, 가야와 동맹을 맺고 꾸준히 국력을 키웠다. 그 사이 고구려의 혼란은 신라에서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한강 상류를 차지한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파행시키고 553년 신라 진흥왕은 한강 전체를 차지하기 위해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는 갑작스러운 신라의 공격으로 한강 하류 지역을 모두 잃고 말았다. 신라와 백제군은 관산성에서 크게 전투했다. 그러나 백제의 성왕이 사로잡히고 죽게 되면서 한강 하류 지역도 신라가 차지하게 되었다.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워 한강 지역이 신라의 땅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백제는 신라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이 땅에서 사라지고 오랜 역사의 흔적을 땅속 깊이 남겨놓고 국명을 감추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간의 전쟁에서 아주 중요했던 지역이다. 한강은 한반도의 중심에 있는 큰 강이다. 삼국시대에는 한강 유역을 어느 나라가 차지했는지가 국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였다.
한강에 들어오는 입구, 즉 한강 하류에 삼국시대에 축성한 태뫼식 산성 흔적이 남아 있는 성이 양천고성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문헌에 의하면, ‘성산(城山)에 고성(古城)이 있는데, 그 둘레는 726척(약 218m)이고 지금은 성의 기능은 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궁산으로 부르고 있지만, 이전에는 파산(巴山), 성산(城山), 궁산(宮山), 관산(關山), 진산(鎭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러왔다. 파산은 삼국시대에 주변의 지명이 재차파의(齊次巴衣)로서 이것에 여유 된 것이며, 성산은 성이 있었기에 불린 이름이고, 진산은 양천 고을의 관장 설비가 되어 있어서 붙인 것이다. 특히 관산의 관(關)은 빗장으로 한강을 지키는 빗장 역할을 했던 산이라 해서 지어진 이름으로 강 건너 행주산성과 함께 한강을 지킬 수 있는 산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궁산은 산 아래 양천향교가 있어서 궁으로 표시했던 것으로 공자를 숭배하는 유교 사상에 의해 향교를 학궁이리고 하였기 때문이다.
궁산(해발 74.3m)의 정상부에 동~서쪽으로 뻗은 주 능선과 남~북으로 뻗는 가지 능선의 상단부를 에워싼 전체 둘레가 380m에 이르는 테뫼식 산성이다. 성의 북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양천구 강서구 일대의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지점에서 안양천이 한강과 합류하는데 안양천은 잘 알려진 대로 경기 서부 지역을 남-북으로 흐르면서 자연적인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2009년 서울 강서구청에서 고성 정비 복원 계획을 수립하면서 성벽에 대한 발굴 조사가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차에 걸쳐 성벽을 중심으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1차와 2차에 걸쳐 남쪽 치성에 대한 조사, 3차 조사는 서측 성벽, 4차는 산 정상부의 내부 건물지 확인, 5차 조사에서 북쪽 치성 및 보축 성벽에 대한 확인 및 동측 성벽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5차에 걸쳐 발굴 조사에서 양천 고성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6세기 중반 이후에 축성하여 사용하였다가 1차례 이상 증축 또는 개축한 것으로 보이며, 이 과정에서 북벽과 남벽에 치가 추가 되었으며, 축조 기법은 통일신라시대 때 개축되었을 것으로 본다. 성 발굴 조사에서 어골문 기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까지도 성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보고 있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성산(城山)이 현의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그리고 "성산고성(城山古城) 석축이며 둘레는 7백 26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라고 전하고 있어,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미 폐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김천일 장군 등이 의병을 이끌고 이 성에 주둔하였다가 권율 장군을 도와 행주대첩에 참가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해방 직후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유적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성의 형태는 북벽과 남벽에 각각 1개씩의 치성을 두었으며, 성벽은 내탁식(편축식)으로 축조되었다. 현재 훼손이 심하며 2단에서 9단까지 확인이 된다. 성벽의 기저부에는 기단석이 위치할 부분을 굴광하여 기단석이 외부로 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턱을 조성했다. 기단부에는 할석과 점토, 기와를 섞어 기단 보축을 하였다. 특히 서벽과 북벽 일대는 성벽의 몸체 부분의 붕괴로 인해 후대 수축이 이루어졌는데, 북벽 일대에는 보축 성벽도 확인되나 잔존 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다. 북쪽 치는 성벽의 몸체 부분이 붕괴된 후 수축하면서 덧붙인 것으로, 기저부에 큰 장대석을 놓고 다듬은 할석들을 위로 들여쌓기를 했다.
성에서 출토되는 기와는 주로 격자문과 선문 계통이며, 토기 중에는 8세기 대로 편년 되는 인화문 토기가 확인됐다. 그리고 성벽의 몸체 부분 내부 뒷채움토에서 수습한 목탄을 대상으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실시한 결과 대체로 6세기 중엽에서 8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다양한 연대 값이 도출되었다.
성 전체를 둘러보면 궁산 정상을 운동장처럼 평평한 상태이고 성벽을 확인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성내에는 성황사라는 사당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건물 내에는 성황사 신의 위패를 모신 묘당으로 산 아래 거주하는 민초들의 번영과 행복도 이루어 주고 악귀를 몰아내 재앙과 돌림병을 막아주어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에 제물을 차려 산산제를 굿을 한 장소이다. 이 성황사는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성황제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오며 초기에는 중앙 권력이 지방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곳 성황사 성황제는 양천 고을 수령이 올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상황사에 대한 ‘황진(黃瞋) 시’가 소개되고 있다. “古峰斗絶類天成(고봉두절류천성)/漢水通潮一帶穔(한수통조일대황)/殘堞不存神像古(잔첩부존신상고)/村民歲歲賽報祭(촌민세세새보제) 옛 산봉우리 매우 험한 것은 저절로 된 것이고 한강 물이 밀물을 맞아서 띠를 띄웠더라. 산 위에 남아 있던 성의 담장도 다 없어졌는데 신령님을 숭배하는 마음으로 옛사람을 본떠서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굿을 하더라.”
상황사 아래에는 ‘소악루(小岳樓)’라는 현판을 건 누각 한 채가 있다. 한강을 내려다보고 멀리 안산과 남산까지 조망되는 자리에 있다. 원래의 소악루는 조선 영조 때, 동북 현감을 지낸 이유가 경치와 풍류를 즐기려고 이곳에 지었다. 그러나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고, 강서구에서 1994년에 새롭게 신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소악루는 중국 동정호에 있는 악양루 경치에 버금간다고 해서 소악루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예부터 소악루에서 바라보는 한강 변의 경치가 뛰어나 시인 묵객들이 많이 왕래하였다. 그중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있다. 그가 양천현령(1740년)으로 부임한 뒤 만 5년 동안 매일 이곳에 올라 동서남북의 봉화가 오름을 확인하면서 한강 변의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집 한수단유(漢水丹遊)에 한강 변의 옛 모습을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남아 있다.
그의 작품 중 <목멱조돈(木覓朝暾)>은 소악루에 앉아서 해 돋는 정경을 바라보면 초봄의 해는 남산(목멱산)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친구 사천 이병연은 1740년 7월에 양천현령으로 부임한 겹재 정선과의 우정을 생각하며 <목멱조돈>이라는 시를 지어 보냈다.
"(曙色浮江漢 서색부강한)/(觚稜隱釣參 고릉은조삼)/(朝朝轉危坐 조조전위좌)/(初日上終南 초일상종남) 새벽녘 한강에 떠오르니 언덕들 낚싯배에 가린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
궁산의 고성은 신라가 553년 한강 유역을 장악한 이후 어느 시점에 들어 서해에서 한강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수상 교통로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한 것이지만, 이곳에서 본 주변의 경치가 시인 묵객을 끌어들일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지금은 88도로와 주변의 높고 낮은 현대식 건물로 인해 옛 풍경은 겸재 정선의 여러 그림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