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유역의 삼국시대 축성된 옛 성곽 6

문화재 : (사적) 고양 행주산성
소재지 :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로15번길 89

  • 기사입력 2024.09.03 21:37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 행주산성 대첩문
▲ 행주산성 대첩문

[한국NGO신문=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행주산성에서 가장 높은 대첩비에 올라서면 사방이 확 트여 있어 어디든 눈높이까지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다. 전쟁의 승리 조건이 갖추어진 산성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행주대첩이 일어난 곳으로 권률 장군을 비롯한 의병과 승병 2,300여명이 왜군 3만 여명과 맞서 싸워 승리를 얻어낸 역사적 현장이다. 당시 승병과 의병뿐만 아니라 아낙네들이 행주치마를 이용해 돌을 나르며 싸움을 거들었다는 일화도 전해오고 있다. 

1991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산성의 정비 복원을 위해 토성지에 대한 시굴 조사를 실시한 것이 첫 번째 학술 조사였다. 이후 여러 차례 학술 지표조사 및 시굴조사,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고양 행주산성은 7세기 대 전중반에 축조된 석축 성벽과 이후 개축된 토축 성벽, 그리고 고려 말 조선 초에 다시 개축된 석축 성벽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개축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 권율 도원수 상
▲ 권율 도원수 상

행주산성은 해발 124.9m의 덕양산 정상을 동쪽 끝으로 하여 해발 70~100m에 걸치는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테뫼식(山頂式) 석축산성으로 처음 축조되었다. 이후 12~13세기경 토성이 축조되었고, 다시 고려 말, 조선 초에 석축 성벽이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에 치 1기가 추가되었고, 8세기 중반에서 9세기 전반에는 보축 성벽과 함께 다시 치 1기가 추가되었다. 이후 계단식으로 석축이 이루어졌으며, 2차 석축 성벽과 치가 추가되는 등의 수축이 있었다. 이후 12세기에서 13세기에는 석축 산성의 북쪽과 서쪽으로 토성이 축조되며 산성의 확장이 있었고, 다시 치가 추가되었다. 이후 토성벽의 수축이 있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토성이 폐기되고 다시 3차 석축 성벽이 축조되는 등 삼국 통일기부터 고려 및 조선시대까지 복잡한 수 · 개축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토성이 석축 산성의 북쪽과 서쪽으로 존재하고 있어서, 테뫼식 산성인 내성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이중성으로 보기도 한다. 

▲행주산성 중장사
▲행주산성 중장사

 『선조실록(宣祖實錄)』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권율이 행주에서 왜적을 대파하였는데, 녹각(목책)을 설치한 뒤 토석성(土石城)을 쌓아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확인되는 토축 성벽은 당초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9년도 발굴 조사 당시 기단 석축 내부의 기조부 조성층 하부에서 고려시대 전중기에 해당하는 기와편이 출토되어, 고려 중기에 축조되었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즉, 고양 행주산성은 기단 석축형 판축 토성으로, 석성에서 토성으로 개축된 특이한 사례이다. 출토 유물로는 토기와 자기, 기와와 철기 등이 있다. 토기는 대체로 7세기에서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뚜껑과 완(盌), 대부완(臺附盌), 호, 벼루 등이 확인되었다. 기와는 격자문과 선조문이 타날된 평기와와 쌍조문이 있는 막새도 확인되었다.

▲ 행주대첩 기념관
▲ 행주대첩 기념관

행주산성은 강건너 양천고성과 함께 서해에서 한강을 따라 서울로 진입하기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손에 넣은 이후 만들어져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중요한 관방유적이다. 설화에 의하면 6세기 초 고구려 안장왕 때, 백제가 한강을 차지하고 있을 당시 고구려가 행주를 공격하여 한강일대를 차지하게 되는 사건은 ‘안장왕과 한씨미녀’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의 을밀 장군이 행주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덕양산에 진을 친 백제군과 마지막까지 싸워 그 일대를 점령한 후 고봉산에서 봉화를 올렸다는 이야기는 행주산성의 존재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행주산성은 조용히 지났지만, 조선시대로 와서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행주산성은 주요한 전략적 요새로 활용된다. 

▲ 덕양정
▲ 덕양정

행주산성의 서남쪽은 한강이 흐르고 동북쪽은 창릉천과 습지대로 서남과 동남이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였으며 동면과 남면은 경사가 급해 적의 접근이 쉽지 않는 곳이다. 적군의 접근은 북서쪽이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넓은 들판에 적의 동태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곳이다. 실록에 의하면 행주대첩의 승리 요인을 지형의 탁월함을 언급하는 내용이 여러번 언급되고 있다. 행주대첩 당시 산성보수는 흙을 쌓아 성을 보축하고 성 안으로 돌을 날라 쌓았으며 목책을 설치하였다. 

▲ 행주대첩비
▲ 행주대첩비

성의 평면 형태는 방형에 가까운 부정형이며 동서로 약간 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성벽의 총연장은 1km가량 된다. 대첩비가 세워진 정상부는 사방 50m가량의 둑이 둘러 있고 내부에 충의정이 설치되어 원형을 알 수 없으나 서북쪽으로 한단 아래 사방 10m가량의 평지가 3~4곳 있는데 이곳은 내성의 흔적이며 초석(礎石)으로 보이는 석재가 일부 노출됐다. 초석의 확인은 성내외를 관장하던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념관 남쪽으로 약 50m의 토성이 이어지고, 충의정 북단에서 토루로 된 성벽이 160m 계속되며 북으로 갈수록 경사가 낮아져 끝난다. 출토된 토기, 기와 파편 등의 유물을 통해 축조 시기가 7~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행주산성은 행주대첩 당시의 치열한 전적이인 동시에 삼국시대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오는 주요 관문이며 북방진출의 요지로 삼국에서 서로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던 곳이다.

▲ 행주산성 토성
▲ 행주산성 토성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조선은 그동안 소홀했던 국방력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음을 자각하였다. 이에 국토를 정비하면서 차후 방어시설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졌다. 1605년 경기 감사 이정구는 경기도의 요해처인 강화, 독성, 죽성, 파사성, 진마산성, 행주산성 등의 형세를 선조임금에게 보고하게 되는데, 이때 행주산성 역시 별다른 군사적 방어시설을 하고 있지 않고 방치되었다. 1902년에 작성된 행주서원의 원규에서 비봉의 수호는 산지기를 정하여 나무나 풀을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한 것은 행주산성을 행주서원이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 행주산성 토성
▲ 행주산성 토성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의 기록에 의하면 “지도면 행주내리 둘레 약 228칸 높이 약 10척 토축단 외부로 돌덩이가 굴러다님. 내부는 평탄하고 도기·기와편이 널려 있음. 높이 6자 1치의 석비가 1기 있는데 ‘원수권공비(元帥權公碑)’라는 글자는 뚜렷해도 기타 양면의 글자는 불분명함. 또 이 누벽에서 서남 방향으로 2~3자 높이의 토루가 연결됨.”이라하였다. 여기서 토루는 내성을 의미하며, 1970년까지 약 50m가 남아 있었다. 또한 행주대첩비는 오랜 풍화로 비신에 금이 가고 그 사이 벌어지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점을 쳤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행주산성은 일제강점기 직전까지 군사적 기지 역할을 하였다. 구한말 외구그이 군대가 개항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서울로 진입할 것을 대비하여 덕양산에서 행주외동에 걸쳐있는 각 봉우리에 포대를 설치했었다. 다행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행주산성은 중요한 방어요새의 기능을 가졌었다. 

▲ 충의정
▲ 충의정

그후 한국전쟁 때 한미연합군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도강하였다. 그 상황을 해병대 행주도강 전적비에 기록하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0년대까지 행주산성은 황폐화 되었다. 그러던 중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행주산성 보수정화 사업이 실행되었다. 우선 1969년에 행주산성 일대를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선정한 것이었다. 이어 본격적으로 그 일대 토지 매수 및 분묘 이장, 소나무를 비롯한 18수종의 1,800주를 심고 잔디를 심는 등  조경공사를 하였다. 또한 충장사와 삼문, 덕양정, 진강정, 대첩문, 대첩비각 등을 짓고 재건비 기단을 개축하고 전면 계단도 만들었다. 이로써 방어요새였던 행주산성은 행주대첩을 기념하며 시설물들을 탐방하는 정신교육장으로 거듭났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공정사회
경제정의
정치개혁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