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유역의 삼국시대 축성된 옛 성곽 7

문화재 : (사적) 파주 오두산성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필승로 369-1

  • 기사입력 2024.09.19 23:17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 검단산에서 본 오두산성 
▲ 검단산에서 본 오두산성 

 파주 오두산 전망대에 오르면 임진강과 한강을 볼 수 있고, 두 강이 만나서 조강이란 이름으로 바다를 향해 가고 있다. 이 만나는 강안 단일 구릉에 우뚝 솟아 있는 해발 119m의 오두산은 삼국시대에 축조하여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나라의 방패가 되어 사용되었던 오두산성이 자리한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서해에서 한강 혹은 임진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하여 일찍부터 군사 · 지리적 요충지로 인식되어 왔다.  

▲ 오두산성에서 본 임진강
▲ 오두산성에서 본 임진강

서북쪽으로는 경기도 개풍군 임한면의 남단이 사이에 두고 바라보고 있다. 한강 넘어 서쪽 방향에는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동쪽에는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동남쪽은 검단산이 자리한다. 남쪽의 높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이어지는 지형이 형성되었다. 산성은 정상부의 험준한 지형을 따라 8부 능선에 퇴뫼식으로 축조되었는데 내성 둘레 1281.2m, 외성 둘레 610.1m 정도이며, 내부 면적은 약 74,430㎡ 정도이다. 해발 80∼90m 사이에 있으며 두 계곡을 포함하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정상부를 감싼 내성과 계곡부의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강과 인접해 있는 가파른 북쪽 절벽 위에 약 10여 미터의 성벽이 잔존하고 있다. 산 정상 부근에는 여기저기에 성벽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수축된 것으로 보인다. 외성의 동벽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되었다.

▲ 오두산성에서 바라본 한강
▲ 오두산성에서 바라본 한강

 지금의 오두산 정상에는 전망대가 자리하고 있어, 옛 오두산의 모습은 알 수 없다. 1990년에 통일동산 조성 사업으로 지표조사와, 1991년에 일부구간에 대한 긴급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1994년에 또 다시 지표조사가 실시 되었다. 2006년에는 통일전망대측의 요청과 문화재청의 오두산성 정비 결정에 따라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에서 동벽 유구를 조사하였다. 2007년에는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해 41m 정도의 내성과 외성으로 석축성이 정연히 드러났다. 성벽은 암반을 평평하게 고르고 그 위에다가 석축을 하였는데, 암반층 위에 장대석을 기단으로 삼고 잘 다듬은 가늘고 긴 직사각형 모양의 석재로 1∼2cm 정도 들여쌓기를 하면서 바른층쌓기로 축성하였다. 현재 이 구간은 잘 정비· 복원되어 있다. 

  오두산은 오도산(烏島山)에서 오두산(烏頭山, 구도산(鳩島山)), 오두산(鰲頭山) 등 여러 이름이 변화되었다. 산의 모습이 까마귀, 비둘기, 자라의 머리 모양과 닮았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산의 명칭 변화로 산성의 명칭도 오도성(烏島城), 오도성산성(烏島城山城), 오도산성(烏島山城), 오두산성(鰲頭山城), 오두산성(烏頭山城) 등으로 변화하였다.

▲ 오두산성에서 바라본 한강과 임진강 합수 지점
▲ 오두산성에서 바라본 한강과 임진강 합수 지점

[한국NGO신문=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오두산성은 문헌 및 고고학적으로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일 가능성이 제기되어 주목받았는데 백제의 북방전초기지였던 관미성은 병신전쟁(丙申戰爭, 369)에서 고구려 광개토왕의 수군이 백제의 아신왕(阿辛王)을 치고 수도 위례성(慰醴城)을 함락시키기까지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하경로를 밝혀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즉 육군이 아닌 수군을 보냈다는 것은 결국 오두산성이 당시에는 섬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변 관미성은 ‘'백제 북쪽 변경지대의 요새로서 사면이 깍아지른 듯이 가파르고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요새이고 광개토왕이 군사를 7도(道)로 나누어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하였다.(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而 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乃拔)’라 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면 관미성의 입지 조건이 오두산성과 연결된다. 

  관미성이 오두산성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김정호의 대동지지 교하편에는 “오두산성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며, 본래 백제의 관미성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臨津漢水交合處 本百濟關彌城) 그러나 관미성은 말갈의 침공로이기도 한 백제 동북의 관미령(關彌嶺)이라는 전략적 요충지에 축조되었을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켜 주는 지역으로는 예성강 중류 지역과 그 지류인 마탄(馬灘)을 끼고 있는 남안(南岸), 특히 남천(南川)과 금천(榨川)구간이 지목된다. 이 구간은 평양과 개성을 연결시켜 주는 요로(要槛)이기도 하거니와 바닷물이 경도 127° 선의 동쪽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고려사 권56 지리지 교하군편에 교하군(交河郡)에 오도성(烏島城)이 있다. 한강과 임진강 하류가 이곳에서 합류된다.(交河郡 有烏島城[漢江臨津下流會于此])‘,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교하현편에 ’오도성(烏島城)은 현 서쪽에 있다.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의 하류(下流)가 이곳에서 합친다.(烏島城 [在縣西, 漢江臨津下流會于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4년 정월 신묘조」에는 ‘옹진성 곁에 옛 토성 자리가 있는데 3면이 바다에 닿고 지세가 험해서 의지할 만합니다. 이곳에 성을 쌓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토성은 사면이 절벽이며 바닷물이 둘러져 있다는 관미성의 지세와 매우 유사하다. 관미성이 위치한 곳인 파주시의 옛지명은 교하(交河)였다. 교하는 곧 강이 만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만나는 강이란 임진강과 한강이다. 동국여지지 2 경기도 교하 고적에 ‘오도성 산성 석축이고 2,071척이다. 삼국시대때 쌓았고 한강과 임진강이 여기에서 합류된다.(烏島城山城 石築二千七十一尺 相傳三國時所築 漢江臨津會于其下)라 기록되었다.  

▲ 복원된 오두산성
▲ 복원된 오두산성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진 오두산성은 정상 최북단에 중첩된 3곳의 각루(角槰) 가운데 바깥쪽 두 곳은 원래 성벽과 그에 부속된 각루 보다 후대에 증축된 것이다. 북동의 석축부는 다듬은 판석을 아홉 단으로 쌓고 그 위에 점토로 판축하였다. 동쪽 성벽은 하단의 암반을 편편하게 고른 다음 그 위에 장방형 석재의 가로쌓기 형식으로 축조하였다.

  동남쪽 방향의 중간 증선 계곡 3~4능선 상에 석축 흔적이 있고, 능선 우측 계곡은 문터가 있다. 서의 남쪽 좌측 석축 구간이 있으며 중간 지점에 수구를 설치하였고, 수문 좌측에는 기와편이 층층으로 쌓여 있는데, 이곳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건물 터 옆에는 석축으로 쌓은 원형의 우물이 있다. 우물의 하단부는 8각형이며 윗부분은 원통형으로 16층으로 쌓았으며, 지금도 맑은 샘물이 고인다. 동남 계곡 중간에서 능선 정상으로 외성을 축조했으며, 성의 좌측 능선 정상은 각루의 형태이다. 외성의 동벽은 큼직한 돌을 기저부로 삼고 들여쌓기를 하면서 잘 가공한 가늘고 긴 성돌로 바른층쌓기를 하여 삼국시대의 축성법에서는 볼 수 없는 성곽 축조 기법으로 축조하였다. 이러한 축성법은 6세기 후반에 축성하였던 남원 교룡산성,경주 관문성, 순천 봉화산성 등에서 확인되고 있으므로 통일신라시대의 축성법이라 할 수 있다. 성벽은 평탄면을 고른 후 판상석으로 기단 굴도리로 쌓아 올리고 그로부터 안쪽으로 약 1m 뒤로 체성을 쌓았다.  

▲ 발굴 조사중인 오두산성
▲ 발굴 조사중인 오두산성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호편, 명문동체편, 토기저부편, 기와편, 방추차, 철촉 등이다. 특히 대호편은 회청색과 흑색 경질이 대호편의 경부 일부만 남았다. 경부에는 2줄의 파상문이 새겨져 있고 동체와의 접합부에 1개의 돌대를 돌렸다. 동체 외면에는 격자문과 사격자문을 타날하였다. 명문동체편은 흑갈색 경질토기동체편 겉면에 ‘병삼십입(甁三十入)’라는 명문(銘文)이 있다. 제작처에서 병 30개를 납입했음을 뜻한다. 토기저부편는 회색 경질토기와 흑회색 경질토기 저부편 등이 출토되었다. 기와편은 암키와편의 경우 황갈색과 흑회색으로 외면에는 기하학 문양이나 수직문과 어골문의 복합문, 혹은 장방형의 사격자문이 시문되어 있다. 이러한 기와들은 백제때 것이지만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기와편의 명문 가운데는 상초(上草)·초하(草下)·천정(泉井) 등의 글자가 보인다.

  오두산은 현재 군사 지역으로 한강 수변 지역에 경계 철책이 설치되어 있고, 서쪽과 북쪽에 군사 시설이 위치해 산성의 현황 파악이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산 정상부에 1992년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건립되면서 진입 도로가 개설되고, 군사용 도로까지 만들어져 훼손이 심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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