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때 동생이자 스피커(speaker)인 김여정을 자주 내세운다. 이번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9.19 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 기조연설’ 역시 이런 시스템에 의한 것은 아닐까. 따라서 모임 성격의 기본을 설명하는 것이 기조연설이므로 문 전 대통령의 의중이거나 당일 기념행사의 성격을 담은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만일 기조연설이 임종석 실장 개인의 의견이라면 정말 심각한 상황이다. 왜냐면 한 예로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문 전 대통령이 얘기한 ‘평화’와 임 비서실장의 기조연설에서 강조한 ‘평화’의 맥락이 너무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문 정부 5년은 ‘임종석 비서실장의 사상’을 구현한 기간이 되는 것이므로 끔찍하고 아찔한 기간이 되는 것이다.
임 실장의 기조연설 원고 3,300자를 곱씹어 보면서 참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지만, 제한된 지면상 몇 가지만 묻는다.
첫째, 기조연설 내용의 진위를 떠나 임 실장 본인의 친북 ‘자주통일’ 노선과 과거 자신이 행한 수많은 실정법 위반 사건의 진원(震源) 역할에 대해 왜 국민 앞에 먼저 잘못을 말하지 않는가. 임 실장은 현재의 남북 상황에서 ‘통일 논의’는 비현실적이라고 세 번(“비현실적인 통일 논의, 통일 논의는 비현실적, 통일 논의는 분명히 비현실적”)이나 강조했다. 그럼 전대협 회장 시절과 그 후 ‘통일운동’ 당시에는 통일 논의가 현실적이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젊은 날 감상적 호기로 한 철없는 행동이었다는 말인가. 이에 관한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그나마 기조연설에 작은 진정성이라도 더해질 것이며, 또 김정은의 ‘적대적 두 국가론’에 동조한다는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당신네 진영에서 상대편 진영을 향해 ‘반통일세력’이라고 비난했는데, 이젠 당신과 당신네 세력들이 ‘반통일세력’이 된 것인가. 당신들은 남북 간 문제 발생 시와 주요 선거 등 정치 사안이 발생하면 북한을 비난하기보다 보수·우익들을 ‘반통일세력·호전 세력’으로 몰아 부쳐왔다. 이번 기조연설에서도 ‘반통일세력’이란 말은 뺐지만,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을 ‘전쟁 불사’로 보인다고 비판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제부터 당신들이 우리 민족의 염원을 저버린 ‘반통일세력’이 된 것이다.
셋째, 임 실장은 김정은의 ‘평화관’에서 배운 것이 없는가. 당신은 “6차 핵실험이 몰고 온 좌절과 절망을 9.19 평양공동선언을 만들어” “문재인 정부 임기 내내 관리되었던 평화는 오간 데 없고” “첫째도 평화, 둘째도 평화, 셋째도 평화”라고 했다. 그게 진정한 ‘평화’였던가. 문재인 정부 이전까지 만든 핵탄두 중 단 한발이라도 감축했고, 핵 투발 수단인 미사일을 단 한기라도 감축한 상태에서 진행된 ‘평화’라면 진정성을 인정한다. 남북, 북미 간 정상회담을 하면서도 북한은 몰래 핵물질을 생산했고, 각종 미사일 성능 개량을 시도했다.
김정은은 “평화는 구걸하거나 협상으로 맞바꾸어 챙겨 가지는 것이 아니다(2024.2.8., 북한군 창군 76주년 축하 연설)” “평화는 바란다고 저절로 오지 않으며, 평화는 힘으로만 쟁취하고 수호할 수 있다(2022.9.8.,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7차 회의)” “강력한 방위력으로 평화를 믿음직하게 수호할 수 있다(2021.10.11., 국방전람회 기념 연설)”며 ‘힘(무력)에 의한 평화’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이를 외면하는가. 정말 솔직해지자.
넷째, 임 실장은 ‘북한의 대남 노선’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가. 북한의 대남 노선과 전략은 ‘평화적 통일방법(연방제를 비롯한 북한식 통일방법)’과 ‘비평화적 통일방법(무력적화 통일)’이다. 김정은이 지난해 12월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와 올 1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에서 ‘통일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이른바 ‘평화적 통일방법’이며, 오히려 핵무기 등 무력(전쟁)으로 대한민국을 점령·평정·수복·편입시킬 대상이라고 수차 호언했다. 따라서 북한의 대남전략의 본질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다섯째, 당신이 내뱉은 “통일, 하지맙시다.”란 이 한 마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그 한마디는 이산가족과 그들 가족(약 64만 명,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 북한이탈주민(34,183명, 통일부, 2024.6월 기준)과 그들 가족, 사실상 감옥과 같은 북한 사회에서 노예처럼 생활하는 2천여만 명의 북한 주민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절망을 안긴 ‘망언’이라 할 수 있다. 당신과 당신네 정파 세력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그들을 희생시키겠다는 것인가. 그렇게 ‘통일운동가’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통일을 외치던 당신이 왜 이제 슬며시 “미래 세대의 권리”라고 하며 통일을 미래 세대의 과제로 떠맡기나.
독일 통일 사례를 보라. 통일된지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후유증이 심하다. 통일 담론을 계속 논의하면서 ‘남남, 남북 간 이견’도 좁히고, 통일비용을 위한 ‘통일 펀드’ 조성 등 착실히 준비해도 후세들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이다. ‘소득주도성장’과 ‘탈원전’ 등 어설픈 정책으로 엄청난 국가부채를 후대에 넘겨준 것도 모자라 이제 ‘통일 부채’마저 후대에 떠넘기자는 것인가. 한때 국정을 담당했던 세력의 핵심 인사로서 참으로 무책임한 발언이다.
자신들 진영 주요 인사들(정동영 전 통일부장관, 박지원 전 국정원장)도 비판하는 ‘망언’ 같은 이 연설을 왜 했을까. 연설의 맥락을 보면 현 정부의 대북·통일정책 비판을 통해 자신들의 실정(한반도 평화프로세스, 9.19 군사합의 등)을 변명 및 호도하면서, 진영 간 갈등을 조장하여 정치 쟁점화하기 의한 의도가 깔려 있는듯하다.
비장한 표정으로 연설을 시작했지만 임 실장의 ‘일관된 통일운동 궤적’이나 5년간 대한민국 국정을 책임졌던 정권의 중요 직책을 역임한 정치인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가증스럽고 해괴한 요설(妖說)처럼 들린다.
